제164화
제164화
“어, 남만. 그리로 가려면 운남을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거든.”
“남만은 왜 가려고 하는 건데요?”
천무린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자신의 단전에서 울리는 공명을 느꼈다.
역근세수경.
소림의 근원인 역근세수경은 세 가지 기운을 담고 있었다.
파사(破邪).
사특함을 깨뜨리고.
파마(破魔).
마공을 쳐부수며.
멸마(滅邪).
종래엔 마를 멸한다.
달마대사부터 육조 혜능에 이르러 완성된 역근세수경은 이렇듯 세 가지 기운을 담고 있었다.
즉, 마공에 대항하고 상대하는 데 천부적인 무공이자 적합한 무공이 바로 역근세수경이다.
그렇기에 천무린은 느낄 수 있었다.
코끝에 감도는 혈운(血雲).
“놈은 벌써 마공에 손을 댔다. 마공의 냄새가 진동을 하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군.”
운남에 도착하자마자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제갈벽의 심복이라는 놈은 벌써 마공에 손을 댔다.
그것이 혈마공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마공을 통해 제법 많은 피를 뿌린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제갈벽을 만났을 때보다 더욱 피 냄새가 짙은 것으로 보아.
‘놈은 아예 본인이 마공을 익힌 것을 숨기지도 않는다.’
마공 속에 섞인 비릿한 피비린내는.
“양민을 학살하고 있을 가능성이 커. 짙은 혈향이 느껴져.”
그 말에 설화린, 당지운의 표정이 크게 변했다.
“양민을 학살……?”
“여, 여기까지 와서 말이야?”
그리고 그 답은 악교운이 대신 내놓았다.
“아마 여기니까 그리 행하는 것이겠지.”
악교운의 말에 천무린이 가벼이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요. 이곳보다 살육을 하기에 좋은, 자기 무공을 시험해 보기에 좋은 무대는 없죠. 주인 없는 땅이니까.”
운남은 중원 무림에서도 남쪽 끝에 위치한 도시로, 교역에서는 더없이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곳이지만.
“주인이 없다고?”
“그럴 리가.”
설화린과 당지운이 가늘어진 눈으로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자잘한 문파들이야 남아 있겠지. 그러나 그들은 운남을 책임질 그릇이 못 돼.”
“운남……. 그리고 남만의 주인이라면……! 설마?”
“그래. 정마대전으로 인해 남만과 운남의 주인인 남만야수궁이 사라졌으니까.”
일반적인 대도시 혹은 소도시라고 할지라도 보통 관할하는 문파가 있기 마련이다.
하북에는 소림이.
섬서에는 화산과 종남이.
사천에는 당가가.
안휘에는 남궁이.
이와 같이 문파가 각자의 구역을 지키며 나눠 먹는 형국이었고, 도시에서 살아가는 양민들은 일정 세를 내거나 상단과 표국에 속하여 문파들로부터 안전을 보장 받고 있었다.
그러나.
“운남엔 주인이 없으니 놈의 알량한 무공을 시험하기에 딱 좋은 곳이지. 혹여 문제가 생기더라도 남만으로 도망가 버리면 그만이니까.”
제갈벽 심복의 심리를 꿰뚫은 천무린의 말에 설화린의 팔뚝에는 닭살이 오도도 솟았다.
“게다가 운남에 있는 군소 방파들이 사라지는 것쯤이야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놈의 실력이 어느 정도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대체 어떻게 된 인간이.
그런 마음을 먹을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무위를 시험하기 위해,
양민을 학살하고 군소 방파를 그 대상으로 삼으려 하다니.
설화린과 당지운의 두 눈에 불꽃이 튀었다. 그 모습에 악교운은 절로 미소가 지어질 따름이었다.
달리 의협심이던가.
악인을 보고 분노하고.
악행을 보고 저지하는.
그것이 협행이 아니던가.
고작 생도 1학년에 불과하지만, 기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놈 때문에 우리가 여기까지 이 고생을 한 거예요?”
“아오, 빡쳐. 열 받아 죽겠네. 온몸에 비수를 다 꽂아 버리고 싶어.”
“협행이고 나발이고, 오늘 그놈 죽탱이에 빙백신장을 꽂아 버려야겠어요!”
“좋아! 오늘은 뭔가 나랑 마음이 맞는걸?”
서로 손뼉을 마주치는 두 생도를 보고 악교운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음.
그래. 하하.
악행을 저지하려는 게 아니라 너희를 귀찮게 만들어서 그렇구나.
누굴 참 닮았어. 하하.
누구를 욕하리.
“그런데 그놈은 정파를 자처하면서 어째서 그리 행동할까.”
악교운의 우문에 천무린이 피식 웃으며 현답을 내놓았다.
“무슨 그런 질문을 하고 그래요. 생각하면 단순한 일이죠. 고작 제갈가의 심복으로 살던 녀석의 코앞에 어쩌면 자신의 운명을 백팔십도로 바꿔 줄 마공이 나타났어요. 그리고 본인을 제외하고 그 마공에 대해 알고 있는 주변의 모든 이가 죽어 버렸고.”
“으음.”
천무린의 말에 악교운이 침음을 흘렸다.
“정파를 자처하면서 들러리로 사는 것보다 마공을 익히고 그럴듯한 명성을 쌓는 게 강호 무림에서 살기 더 편하다고 느꼈겠죠.”
“……잠깐만요. 그럼 관아는요? 관아에서도 악행을 저지르는 이들에 대해 제지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설화린의 말에 천무린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직도 관아 놈들을 믿고 있냐? 운남은 황실의 손길이 가장 미치지 못하는 곳 중 하나야. 그건 네가 살던 북해도 마찬가지잖아. 새외 삼궁은 특히나 황가의 손길로부터 자유로운 이유가 그것이기도 하고.”
“허얼……. 그럼 그렇게 운남의 양민들을 버리는 거예요? 그들은 어떻게 살라고…….”
“뭐, 나름의 변명거리들은 만들어 놓겠지. 황실의 금군들이 북벌이라는 거대한 목표를 늘 핑계 삼아 이야기하는 것이지. 뻔하잖아?”
그 말에 설화린과 당지운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이게 현실이었다.
자기들이 살기도 빠듯하다는 핑계로 힘없는 약자들과 양민들이 죽음에 몰리는 현실.
그저 믿고 있을 양민들과 약자들의 울부짖음에 귀를 닫은 채 말이다. 설화린이 씩씩거리며 주먹을 꽉 쥐자, 천무린이 혀를 찼다.
“누가 온실 속 화초 아니랄까 봐. 아주 빙궁주 그 양반은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구먼? 이래서 곱게 자란 것들은 안 된다니까!”
“이익! 뭐라구욧!”
설화린의 손에 새하얀 한기가 서리면서 당장에 천무린을 향해 짓쳐들어왔고,
“그렇게 느려 터져 가지고 뭐 맞힐 수나 있나 몰라!”
“야! 이리로 안 와요!?”
“존대만 하든지 반말만 하든지! 하나만 해!”
에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물고 뜯는 두 사람을 보고 악교운과 당지운은 그저 한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 * *
운남의 몇 없는 기루이지만, 적랑문의 비호를 받아 운영되고 있는 화양루는 제법 잘나가는 기루 중 하나였다.
“오호호! 이리로 와서 쉬다 가셔요, 대협~.”
“오늘 밤 저와 함께 보내시지 않겠어요? 운우지락(雲雨之樂)이 무엇인지 알려 드리겠어요, 호호호!”
“아이잉! 대혀어업~, 나 보고도 그냥 지나치기 있어요?”
상행과 표행에 지친 이들에게 달콤하게 속삭이는 여인들의 애교 섞인 콧소리.
그리고 진동하는 살냄새와 분 냄새로 뭇 남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니, 절로 발걸음이 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형! 역시 운남으로 오길 정말 잘한 것 같습니다. 대형의 말대로 괜찮은 아이들 데리고 있으니 낮밤 할 것 없이 불나방들이 달려드는군요. 역시 대형이십니다!”
“후후. 녀석, 아부하기는.”
아부라 치부하며 손사래를 치는 적랑문의 문주이자 적랑오객의 대형인 구소엽은 내심 기분이 좋았다.
오랜 기간 사파의 하류 인생을 함께 보내며 장강이라는 큰 줄기를 두고 수로채와 녹림채에게 치이다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눈을 피해 운남에 자리 잡은 지 불과 몇 개월이 되지 않았다.
적랑문이라는 문파를 만들고, 의형제로 피를 나눈 적랑오객의 아우들과 함께 문제없이 운영해 나가고 있으니.
굴러 들어오는 게 돈이요,
날이 갈수록 쌓이는 게 돈이었다.
“운남의 다른 놈들은 어찌하고 있다더냐?”
“후후후, 대형. 우리 적랑오객입니다. 어지간한 녀석들은 이미 꼬랑지를 내리고 있습니다. 같잖은 녀석들이 우리에게 뭘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적랑오객 중 막내인 전욱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걱정일랑 말라고 고개를 젓는다.
“그렇다고 한들, 아직 우리는 굴러 들어온 돌에 불과하다. 박힌 돌들을 모조리 빼내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하니 너무 경거망동하지 마라.”
구소엽의 말에 전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구소엽이 대형이 된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었다.
결코 경거망동하지 않고 차분하게 상황을 바라보는 눈이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적랑오객의 대형 자리에 올라설 수 있는 자격이었다.
“알겠습니다, 대형. 그러나 너무 신중한 것도 안 좋은 거 아닙니까. 조만간 싹 다 정리하고 우리 대형이 운남을 접수하는 것도 얼마 안 남았습니다! 푸흐흐.”
“후후, 알겠다. 욘 녀석아.”
“거기다가.”
스윽.
전욱이 주변을 돌아보며 듣는 귀가 없는지 확인하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광인 놈 때문에 일이 수월해지지 않았습니까.”
“쉬잇! 입 조심해라. 그 이야기는 우리밖에 몰라야 한다는 것을 모르느냐.”
그 말에 아차 싶었는지, 전욱은 입을 조개처럼 꾹 다물었다.
“죄, 죄송합니다!”
날카롭게 전욱을 야단친 구소엽은 침묵하며, 그가 말한 광인이라는 작자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다음 목표는 어디로 정했느냐?”
“예. 음, 대현문이라고 있는데, 거기 놈들이 가끔 우리 구역으로 와서 설치는 중입니다. 그쪽부터 정리하면 될 것 같습니다, 대형.”
대현문이라.
구소엽이 운남에 자리 잡기 전부터 있던, 꽤 규모 있는 방파 중 하나로 적랑오객과 적랑문의 모든 문도를 합쳐도 대현문과의 결전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대현검 안벽이 있기 때문이겠지.”
“……맞습니다. 그놈 때문에 피를 본 게 대체 얼맙니까?”
“알겠다. 대현문까지 잘 이끌어 데려가고 상황이 끝나는 대로 정리한 후 복귀하도록 해라. 특히 아이들에게 말해서 주변에 보는 눈과 귀가 없도록 사전에 몇 번이고 점검해야 한다.”
“걱정 마십시오! 대형!”
씩씩하게 대답한 전욱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고, 구소엽은 팔짱을 낀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광인(狂人).
어느 날 찾아와서 그는 구소엽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로.
「 내 요구를 들어준다면, 기꺼이 내가 대신 피를 뒤집어써 주마. 어떠냐. 내 손을 잡겠느냐? 」
뜬금없는 이야기에 구소엽은 헛소리하지 말라며 거절하려 했으나.
「 머저리들 사이에서 그나마 네 녀석이 가장 똑똑해 보여 선택했는데, 너 역시 그릇이 부족한 것이냐. 」
묘한 위화감, 경종을 울리는 본능.
이 두 가지로 인해 구소엽은 그 광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 그렇다고 한들, 내가 당신의 무엇을 믿고 당신과 손을 잡겠소? 그러니 벽강문을 제거해 준다면 내 당신을 믿고 원하는 대로 해 드리리다. 」
그렇게 광인과의 협상 후 구소엽은 적랑문에 당장 해가 되는 벽강문을 지목했다.
문도의 수가 최소 칠십이 넘는 문파다. 대현문과 비교해도 결코 밀리지 않을 문파가 바로 벽강문이었다.
그런데.
구소엽의 말 한마디에,
「 오냐, 내 들어주마. 대신 뒤처리는 너희들이 하도록. 」
광인은 벽강문을 향해 홀로 움직였다.
사라진 그의 뒷모습을 보고 구소엽은 무시하려 했으나, 그 후 황급히 뛰어 들어온 전욱의 한마디에 그만 몸이 굳고 말았다.
“대형! 벽강문이 와, 와해되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