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9화
제159화
“담진에게 그렇게 훈련을 맡겨 놨다고?”
“내가 없는데 어째요. 훈련을 안 시키고 냅 두면 나중에 언제 칼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 약한 녀석들인데.”
그 말에 악교운이 절로 혀를 찼다. 생도란 놈이 검술 교관에게 애들한테 훈련 지도 방법을 가르치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만 눈앞에 있는 천무린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보다.
“약하다니…….”
현 사천무관 8기 생도들을 약하다고 표현하는 사람은 눈앞에 있는 이 녀석밖에 없을 것이다. 같은 또래의 섬서무관 8기 생도들을 모조리 때려눕히고 호량채 산적들과 맞서 싸워도 죽은 이 하나 없었다.
천무린의 활약 때문에 묻혀서 그렇지, 이미 생도 1학년이라고 보기에는 기하급수적인 빠른 성장 속도를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사천무관 8기 생도들이었다.
“약하죠. 병아리 새끼들인데.”
“……네 성에 차지 않는 게냐.”
그 말에 천무린이 코웃음을 치면서 악교운을 한심하게 바라봤다.
뭐, 왜.
이 녀석에게 괜히 그 귀한 걸 줬나.
지난 일을 후회하며 악교운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려는 찰나.
“같은 생도들 범주 안에 넣지 마요. 나이로 싸울 거예요? 그리고 이번엔 소화진 선배나 교관님들 없었으면 적어도 몇 명은 죽었어요. 알잖아요.”
그 말에 악교운은 차마 아니라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강호에 나선 순간부터 자신의 몸은 오롯이 스스로 지켜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무력이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봐주는 일이 없는 강호라면 더더욱.
“네 말이 맞다. 나이에 국한하는 것은 더없이 바보 같은 짓이지.”
“그래서 말인데요.”
씨익.
천무린이 빙그레 웃었다.
보통 누군가 웃으면 기분 좋아 웃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악교운은 온몸에 엄습하는 불길함을 견뎌 내야 했다.
“뭐, 뭐냐?”
“제가 애들 손 좀 봐주려고요.”
천무린의 안광이 형형하게 빛나는 것이 무언가 작심한 듯 보였다.
“……말린다고 안 할 거 아니지 않느냐.”
“당연한 말을 왜 해요? 낄낄낄낄.”
손목까지 뚜둑 소리를 내며 광소(狂笑)를 터뜨리는 천무린이었다.
언뜻 광기(狂氣)까지 엿보이는 천무린의 모습에 그만 할 말을 잃었지만, 악교운은 뒤에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에 말을 더 이어 가야 했다.
“그런데 낙양을 이리도 급하게 가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냐?”
“……마교의 발호라면서요. 정파인의 도리로서 마땅히 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렇긴 한데, 어쩐지 네 녀석이 이리 급하게 움직이는 것이…….”
커흐흠.
거 보기보다 눈치가 더럽게 빠르시네.
속으로 헛기침을 하고 있는 와중에 악교운은 뒤를 힐끗 쳐다봤다.
“그보다 설 생도는 왜 데리고 가는 것이냐?”
“……어.”
낄낄거리던 천무린의 표정이 삽시간에 그늘이 졌다.
그러다가 뒤를 힐끗거린다.
경공을 펼쳐 따라오는 설화린이다. 어떻게 해서든 따라가겠다는 의지를 보인 그녀에게 천무린은 짐만 된다며 한사코 떼어 놓고 가려 했지만.
“또 두고 간다고요? 어디 또 두고 가 봐요! 맨날 곡주 숨겨 놓고! 꿍쳐 놓고! 몰래 마시는 거 다 알고 있거든요. 다 말해요?”
……이 녀석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된 녀석이.
그렇게 혀를 내두르며 마지못해 데려가려고 하는데.
“나도 간다!”
“에?”
……넌 또 왜?
당지운이었다. 잘 차려입은 무복에다 등 뒤에 봇짐까지 챙겨 와서는 준비를 다 한 모양새로 말이다.
갑자기 당지운이 왜애!
“그러면 교관님은 쟤 왜 못 두고 가는데요? 대체 왜!”
“…….”
악교운이 우물쭈물하다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한다. 그 모습에 천무린의 두 눈이 게슴츠레 변했다.
“아~, 당백진 그 양반의 손자라고 함부로 못 하는 거예요? 하여간.”
권력 앞에 협사 없다더니!
맨날 바른 척, 고고한 척은 다 하더니 정작 무관주의 손자가 간다고 하니까 뜯어말리지도 못하고!
어휴!
앓느니 죽지! 앓느니 죽어!
그러는 와중에,
“호호호!”
“하하핫!”
두 녀석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헤죽헤죽 웃고 있었다.
아이고.
내 팔자야.
* * *
“……그자의 정보를 넘겨주면 저희의 목숨은 살려 주시는 겁니까?”
얼굴이 시퍼렇게 사색이 된 공야찬이었다.
당장이라도 자신의 목젖에 검 끝이 무자비하게 파고들 것만 같았다.
공야찬은 암흑가의 수장이면서도 정보로 먹고사는 인물이다. 눈치가 빠르고 두뇌가 잘 돌아가는 만큼 눈앞에 있는 이검이란 인물에 대해서도 대번에 파악했다.
‘무형노괴는 말이 통하질 않았을지언정 이자는 말이 통한다.’
단적인 예로 무형노괴를 설득하여 시간을 벌었다. 그렇다는 것은 이검은 무형노괴를 모시는 보좌 역할.
무턱대고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원하는 바를 얻어 무형노괴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려는 자의 모습이다.
“후후, 내가 우습게 보였나.”
푸욱!
검 끝이 공야찬의 왼쪽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한 치만 더 들어가면 단전이다.”
“끄륵, 끄르륵.”
피가래가 끓는 소리를 내뱉으며 공야찬이 부들거리는 몸으로 겨우겨우 말문을 열었다.
“……끄, 끄르륵.”
“살고 싶지 않나?”
“쿨럭, 쿨럭. ……사, 살고 싶어 이러는 것이오. 허억, 허억. 단물이 쫙 빨리고 나면 하오문과 같이 우리도 모두 죽여 버리겠지. 아니오?”
“……말해도 죽고 말하지 않아도 죽는다. 단, 말하면 편히 보내 주겠지.”
이검의 무감정한 눈길에 그들을 살려 준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천마신교의 일원들이 이곳에 왔다는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기 위해서.
이들을 살려 두면 반드시 꼬리표가 되어 문제가 될 테니까.
“……정보가 필요하다면 조금만 기다려 주시오.”
“쥐새끼가 또 머릴 굴리는군.”
처억.
공야찬의 온몸을 난도질할 듯 검 끝이 세워진다. 이검이 가장 싫어하는 부류 중 하나로 이토록 두뇌 회전이 빠른 이들일수록 반드시 자신에게 해가 될 것임을 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죽여야 하건만.
“무, 무형노괴께서 헛걸음하시길 원하시오!”
움찔.
공야찬에게 쇄도하던 검 끝이 바로 한 치 앞에서 딱 멈췄다. 멈칫거린 이검을 보는 순간, 공야찬은 있는 힘을 모두 끌어내어 목소리에 힘을 줬다.
“……사, 살려 주시면 반드시 필요한 정보를 가져와 보이겠습니다. 허, 헛걸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도박이다.
만일 통하지 않으면 공야찬은 더 이상 살 수 없을 터.
꾸국.
“머리를 제법 잘 굴리는구나.”
푸슉!
공야찬의 오른쪽 옆구리에 크게 상흔이 남길 정도로 벤다.
“끄아아아악!”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공야찬의 비명에도 이검은 그저 무심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꿈틀거리는 공야찬과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해 비척거리는 조수강.
“나를 농락하여 필시 죽음으로 대가를 치러야 했으나, 내가 모시는 분으로 하여금 살아났으니 운이 좋구나.”
“……끄, 끄으윽.”
“하루 말미를 주겠다. 만일 허튼짓을 하거나 제대로 된 정보가 없다면…….”
이검의 검 끝에 소름이 끼치는 기운이 뭉클뭉클 피어나 검 전체를 감쌌다. 무섭도록 불길하기 그지없는 기운이 피어났다.
“영원히 살지도, 죽지도 못하게 해 주겠다.”
분노가 담긴 목소리보다 더없이 담담한 목소리가 공야찬과 조수강의 심장을 더욱 옥죄었다.
이자가 보여 주는 힘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으나.
천마신교의 인물이고, 무려 장로를 혼자서 보필한다는 점이 심상치 않았기에 공야찬과 조수강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렇게 몸을 돌려 사라지는 이검을 보고 두 사람은 땅바닥에 볼품없이 쓰러졌다.
“끄, 끄으윽.”
“……괘, 괜찮은가.”
무형노괴와 이검에게 당한 검상으로 상처가 깊었다. 그들이 흘린 핏물이 두 사람의 집무실을 가득 채울 정도였으니.
조수강은 바닥에 몸을 기듯 겨우겨우 가서 금고 안으로 손을 쑥 하고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단환 두 개를 빼서 공야찬의 앞으로 겨우 휘적대며 굴렸다.
“……주, 죽기 전에 먹음세. 요, 요상단(療傷丹)일세.”
“언제 이런 걸 또…….”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그 멸마신군 때문에 얼마나 두들겨 맞을지 몰라서…….”
“크륵, 크, 큭큭.”
피가래가 끓었지만, 상황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만 웃어 버린 두 사람은 요상단을 씹어 먹으며 지혈을 하였다.
“정말…… 기구하구먼.”
“후후, 너무 그러지 말게나. 호랑이굴에 들어가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였네. 강호 무림에서 살면서 이런 일이 없으리라 여긴 것이 우리들의 오만이니.”
“……그런가. 그렇다고 한들 한 가지는 확실하네.”
“받은 것은 반드시 갚아 준다는 것 말인가.”
“크후훗.”
한 사람은 더없이 육중한 덩치로 겨우 몸을 뉘고, 다른 한 사람은 비쩍 마른 몸뚱어리로 비적거리며 그 덩치 위에 살포시 기댔다.
그러면서 조수강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멸마신군에게 연통을 넣으세.”
“다른 방법이 없겠는가?”
“우리가 살려면 어쩔 수가 없으이. 이번에 듣지 않았는가. 거산도 전위를 꺾었다고.”
“거산도 전위라니. 허허, 정말 말도 안 되는 인간일세.”
나이를 무색하게 만드는 인물이 있다면 그건 천무린 단 하나일 뿐일 터였다.
“거기다 제갈세가에 대한 모든 정보를 추적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올 명분은 충분함세.”
“우리가 여태 정보를 안 보냈다고 길길이 날뛸 텐데.”
“어쩌겠는가. 우리도 먹고살아야 했으니 말일세.”
“후우……. 늑대를 내쫓으려다 호랑이를 들이는 꼴이 되지 않을지.”
“후후, 호랑이를 등에 업은 여우가 되면 되지 않겠는가.”
두 사람은 쓰게 웃으면서 멸마신군 천무린을 떠올렸다.
그로 인해 얻는 것보다 잃을 것이 많을 테지만, 그들이 가진 선택지는 그것밖에 없었다.
“하루 만에 올 수 있겠는가.”
“거산도 전위와의 격전이 섬서무관 근처라고 들었으니 아마 금세 올 수 있지 않겠는가.”
“그도 그렇군.”
공야찬과 조수강은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다고 여기며, 천무린에게 연통을 넣을 방법을 강구하였다.
아니, 강구하려고 있는 와중에.
콰앙!
“아오! 이 새끼들은 왜 연락이 없……!”
멀쩡히 있는 문은 이미 박살 나서 그냥 들어오면 될 텐데, 굳이 집무실 벽을 부수면서 들어온 인영.
더없이 익숙하고도 친숙한 목소리가 두 사람의 귀에 들려오면서 얼굴을 비춘다.
“……너네 뭐 하냐? 사이좋게 짝짜꿍이라도 하고 있었어? 빠져 줘?”
그 말에 두 사람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한결같은 모습에다 정말 한결같은 등장이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