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8화
제158화
공야찬의 굳어진 표정은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절망으로 물들어 버린 동공 속에 보이는 자는 차갑게 조소를 띠고 있는 이검이었다.
천마신교.
이름값만으로 겁박이 가능하고,
우는 아이도 그치게 만들 수 있었다.
중원 무림에서 만인 공통어로 ‘공포’를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간결하고 간단한 단어는 없었다.
게다가 그 이름을 듣는 이가 평범하게 살아가는 양민이 아닌 무림인이라면.
핏기가 전혀 없이 하얗게 질려 버린 공야찬은 주체할 수 없이 몸을 마구 떨기 시작했다.
“자, 장로……. 무형지기를 자유자재로 쓰는 천마신교의 장로…….”
삼두육비의 괴물이라도 본 것처럼 공야찬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단 한 명의 인물.
“무, 무형노괴!”
천마신교의 여섯 장로 중 하나.
육장로 무형노괴(無形老怪).
일반적으로 무인이 펼치는 기운은 일렁이고 색이 보이기 마련이다. 기질과 성향이 내력에도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형노괴의 기운에는 형체도, 색도 없는 무(無) 그 자체였다.
그런 무형의 기운을 펼쳐 내는 그의 잔인한 손속은 정마대전에서도 깊은 상흔을 새겨 놓았으니.
특히.
‘아미파가 멸문 직전까지 갔던가.’
정보에 따르면, 미친 듯이 여인을 밝히는 호색한인 무형노괴는 정마대전의 시작과 동시에 여인밖에 없는 아미파를 노렸다.
무형노괴와 그를 따르는 마교인들은 단숨에 아미파를 기습했고, 거의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안겨 주었다.
문제는.
‘수많은 아미파의 비구니들이 자결을 해 버렸다는 것이지.’
수많은 아미파의 문도들이 수치심을 이겨 내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래서 지금도 최소한의 활동을 제외하고는 무려 10여 년 가까이 봉문되어 있다.
그 최악의 사건을 일으킨 인물.
그런 사건을 떠올린 공야찬은 아까 전 노인이 무형노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살아 있음을 다행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어떻게 여길 찾아온 것이지? 정마대전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활동한 우리를 어떻게…….’
그들의 행보가 이상했다. 갑작스레 이곳에 방문하다니.
쥐소굴은 정마대전 이후에 공야찬과 조수강이 손을 잡고 암흑가에서 난다 긴다 하는 이들을 모아 시작한 곳이다. 제아무리 천마신교라고 할지언정 쥐소굴을 어떻게 알고 갑작스레 여기를 들이닥칠 수 있었을까.
그렇게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는 공야찬에게 이검이 차갑게 식어 버린 눈빛을 형형히 빛냈다.
“정보를 다루는 쥐새끼들 중에서는 확실히 낫구나. 정보를 다루는 시정잡배들이 괜스레 네놈들을 언급한 게 아니라는 건 확실하군.”
그 말에 공야찬은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으득.
어째서 눈앞의 천마신교 인물들이 쥐소굴에 들이닥치게 된 것인지 대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정보를 다루는 시정잡배.
정보에 관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하오문(下汚門)을 뜻한다.
사파의 하오문(下汚門).
가장 밑바닥에 위치한 이들이 모여 만든 집단.
강간.
방화.
살인.
절도.
무수한 범죄를 일으키고서 제 한 몸을 숨기기 위해 범죄자들이 모여서 만든 집단.
그뿐 아니라 사회적인 지위로 따지면 하층민에 불과한 점소이, 시비, 백정 등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자들로 구성된 문파.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라면 간과 쓸개 따위는 얼마든지 버릴 인간들이 모인 집단이다.
아마 하오문은 자신들이 살기 위해 낙양의 쥐소굴을 팔아넘겼으리라.
‘이런 육시X 놈들!’
빠득빠득, 이가 절로 갈렸다.
“분해하지 마라. 그럴 줄 알고 내가 네놈의 한을 풀어 주었으니.”
“…….”
서늘하기 그지없는 말에 공야찬은 설마 하는 표정으로 이검을 바라봤다
* * *
“또 뭔 소리예요? 하오문이 멸문했다고요? 지들 살기 위해서 뭐라도 하는 기생충 같은 놈들이 멸문하다니요?”
“……내 말을 대체 뭐로 들은 게냐. 멸문에 가까운 피해를 받았다고 했다.”
“그게 멸문이랑 비슷한 거지 뭐!”
정파도, 사파도 아닌 놈들이 이렇게 공격을 당한다고.
정말 마교인가.
천무린의 몸이 빛살처럼 가르기 시작했고, 그 뒤를 따라서 세 줄기가 함께했다.
* * *
“헉헉! 어, 어째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데!”
“미치겠네. 저 인간들은 쓰러질 생각을 안 해! 그놈이 없는데도!”
“……그, 그 새끼 때문이야! 그 새끼!”
생도들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하는 말과는 다르게 여느 때처럼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하루를 검을 휘두르고 근력을 단련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고강한 무공, 상승무공에 대한 열의는 무인이라면 당연히 가질 수밖에 없으나, 그보다 더욱 중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기본(基本)이다. 무학에서 기본은 가장 충실해야 할 근본이자 기초다.”
뾰로통하게 움직이던 생도들의 표정에 생기가 불어넣어진다.
기본(基本).
기본에 충실해라.
기본을 완벽히 해라.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다.
하루는 할 수 있다.
이틀도 가능할 것이다.
어쩌면 한 달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 년이 되고.
십 년이 되면.
모두가 하나둘 내려놓는다.
생각해 보라.
같은 동작을 몇십 년간 똑같이 한다는 것이 어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인가.
기본에 충실하더라도 뚜렷한 성과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니, 그런 기본을 수십 년간 지키기란 지루하기 짝이 없다.
기초를 닦으면 기초 위에 기둥을 세우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다.
기둥을 세우면 화려하게 꾸미고 싶은 것이 사람의 욕심이다.
하지만.
“이번에야 알았지.”
“기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기본을 충실히 따르면, 어떤 결과를 낳는지도 알았고.”
생도들의 눈에는 자신들을 앞에 두고 솔선수범하여 검 끝을 휘두르는 한 명의 사내가 보인다. 다름 아닌 자신들의 검술 교관인 담진이다.
“검귀(劍鬼)라니, 진짜 다시 봤어.”
“경천동지(驚天動地)할 광경이었지.”
생도들은 전위와 천무린의 격전은 볼 수 없었다. 호량채의 부채주인 막광야와 격전을 치르는 담진의 모습만 보았고,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을 뿐이었다.
막광야의 도끼질로 비산하는 기운에 적중한 생도들은 똑똑히 기억한다. 막광야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그리고 그런 막광야를 상대로 담진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맞섰고, 오히려 막광야를 몰아붙이기까지 하였다.
그런 담진이 기본을 계속 지키라고 한다고 어떨까.
그는 입으로만 떠드는 것이 아니라 결과로 증명해 주었다.
“……검의 귀신이라니 멋지긴 해.”
“으으. 나도 별호…….”
황태와 신혁건이 근력 훈련을 하면서 담진을 경외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런데 말이야.”
“응?”
“뭔가 훈련 강도가 좀 더 세진 것 같지 않아……?”
그 말에 생도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후들거리는 하체를 내려다본다.
……생각해 보니.
육중한 바위를 제각기 하나씩 등 뒤에 업고서 이를 악물고 있는 모습이라니.
이와 같은 훈련은 천무린이 아니면 시키질 않던 교관님들이 갑자기 왜…….
“이번에 알겠더구나. 무린이의 훈련법이 더없이 효율적이고 기본기가 충실하다는 것을.”
“…….”
담담한 담진의 음성에 웃음이 배며, 생도들의 얼굴을 천천히 훑는다. 그의 담담한 미소가 서서히 굳으면서 처연한 입가로 바뀌었다.
“기본을 중시하라고 하면서 너희에게 조금 안일했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꽈아악.
그러면서 그의 손아귀에 목검이 굳게 잡힌다. 그의 머릿속에는 불과 며칠 전에 있었던 호량채와의 격전이 스쳐 지나갔다.
녹림의 호량채.
담진이 검귀라는 별호로 뛰어난 활약을 펼치고 있을 당시에도 그들과 부딪힌 적은 없었지만, 그들의 악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정신없이 부딪치고 어찌어찌해서 잘 풀렸지만, 담진은 아직도 하늘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사실 모든 일이 잘 풀려서 죽은 이가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었지, 혹 떼죽음을 당해 이곳에서 모두 송장을 쳤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쐐기를 박는 천무린의 음성.
「 맨날 교관님은 기본에 충실하라고 하시며 애들한테 대충 검 휘두르게 하시잖아요. 」
그 말에 절대 아니라며 한사코 이야길 했지만, 호량채와의 격전 이후 후유증을 앓고 있는 생도들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느냐며 천무린이 마구 윽박질렀다.
「 다음에 향냄새 맡고 싶지 않으시면 제대로 훈련시키는 게 어때요? 지금보다 훈련 강도를 서너 배는 더 높여야죠. 」
천무린의 말에 담진은 깊은 고민을 했지만, 결론은 금방 나왔다.
그는 교관이지만, 한편으로는 무인이다.
교관은 직업이지만, 무인은 삶 자체다. 평생을 살아가며 무인의 길에서 절대 벗어나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무인은 곧 무력으로 자신을 입증해야 한다.
「 눈먼 칼에 안 맞도록 빡세게 훈련시키고 굴려야죠. 검귀(劍鬼)라는 명성에 걸맞게 아주 빡세게. 」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가 죽지 않도록 하려면, 모순적이게도 자신이 죽기 직전까지 굴려 줘야 한다는 말.
천무린에게 듣고서야 여태 자신이 안일했음을 깨닫는 담진이었다.
「 그렇다고 한들, 훈련은 어디까지나 훈련이지 않느냐. 그 한계는 명확하다. 」
담진의 말에 천무린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피식 웃는다.
「 뭘 걱정해요.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세요. 훈련이 훈련으로 끝나지 않게 될 건데요. 」
「 으응? 그게 무슨 말이냐? 」
「 보시면 알게 되겠죠. 」
아리송한 천무린의 말을 뒤로하고 담진은 섬서무관의 연무장에서 훈련을 진행했다. 그렇게 섬서무관의 연무장 한 곳을 떡하니 차지하는 담진과 생도들의 모습을 보고 심히 불쾌하게 여기는 이들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섬서무관의 생도들이었다.
“아니, 저 인간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거야?”
“어쩌겠냐. 위에서 이야기가 다 끝난 것 같던데.”
“이야기가 끝나긴 뭐가 끝나? 이번에 8기 놈들 전부 저 녀석들한테 밟힌 거 알지?”
“뭐? 언제!”
“언제긴 언제야! 오자마자 밟혔다고 하더구먼.”
“……씨X, 자존심 상하게! 어디 사천 나부랭이들한테 밟히고 지X이야.”
섬서무관 생도들은 이를 갈아붙이며 사천무관 생도들을 노려봤고, 그 따가운 시선을 느낀 황태가 고개를 모로 꺾었다.
뚜둑.
“아직도 저 새끼들이 정신을 못 차렸나.”
“……황태야, 저 새끼들이라니. 저래 봬도 6기수랑 7기수들인 것 같은데, 선배들이지.”
“X랄, 선배는 무슨 선배. 다른 무관에 있는 놈들이 선배는 무슨 선배야? 나한테 뭘 해 줬다고.”
송무가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황태는 눈빛으로 텃세를 부리는 섬서무관 생도들에게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리고 훈련을 하는 와중에도 하나둘 황태를 따라 으르렁거리기 시작하는 사천무관 생도들이었다.
“뭘 째려봐! 이 새끼들아!”
“나이를 똥꼬로 처먹었나! 선배를 보고도 인사 안 하냐!”
참지 못한 섬서무관 생도들이 소리를 쳤고, 사천무관 생도들도 마주 소리친다.
“염병들 하네! 먼저 째려본 건 너희들이잖아!”
“뒈지려고. 먼저 세상 떠나고 싶어서 아주 몸이 근질근질하지?”
“훈련 끝나고 뒤뜰로 나와! 이 새끼들아! 다 뒈졌어!”
화기애애한(?) 모습에 담진이 흐뭇하게 웃었다.
그랬구나, 그랬어.
“……이거였냐, 무린아?”
훈련이 훈련으로 끝나지 않게 된다는 말이.
다른 무관 생도들과 시비를 붙어 허구한 날 살기등등하게 싸우는 이곳은 다름 아닌 삼대 무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