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5화
제155화
“젠장! 젠장!”
뾰로통하게 입이 댓 발 나와 있는 한 사람을 보며 태강이 혀를 찼다.
“쯧, 쯧.”
“왜? 무슨 일인데?”
혀를 차는 사람과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는 조합을 보노라면 누구나 호기심이 생길 터였다.
“저놈 저거, 이번에도 별호 못 얻었다고 저렇게 궁상맞게 앉아 있잖아.”
“아……. 혁건이?”
혀를 차는 소릴 들었는지 휙 하고 고갤 돌려 노려보는 사람은 다름 아닌 신혁건이었다.
“뭐! 왜!”
“그렇게 한숨을 쉰다고 뭐가 달라지냐! 별호 생긴다고 돈이 떨어지냐! 밥이 생기냐!”
“지독한 새끼, 누가 상인 집안 아니랄까 봐! 강호에서 명성이 얼마나 중요한데!”
그렇게 소리치는 신혁건의 두 눈에는 우울감이 가득했다.
여태껏 얼마나 열심히 창을 휘둘러 왔던가.
물론 오직 명성만을 위해서 휘둘러 온 건 아니라고 하지만.
찌릿.
신혁건의 시선에 닿은 이들이 움찔거렸다.
먼저 송무.
“흥! 추풍검 좋아하네! 가을바람 받으면서 칼춤이라도 췄냐!”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혁건아?”
“흥!”
그리고 돌아본 두 형제.
“저, 저, 저! 아주 얼굴만 번지르르하게 생겨 가지고! 매화쌍저얼? 허! 참!”
“불만이냐?”
“얼굴 잘생긴 게 불만이냐.”
“저, 저! 중저음으로 불. 만. 이. 냐? 그래! 이 새꺄! 불만이다! 맨날 지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더니 이젠 쌍으로 염병이네!”
“그럼 너도 기권패 하지 말고 덤비지 그랬냐.”
“아니면 대진표 운이라도 좋던가.”
“…….”
백리무영과 백리후의 말에 신혁건이 콧김을 내뿜다 말고 다시금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빌어먹을 세상!
그러다가 신혁건을 향해 토닥이는 손길.
“괜찮소. 언젠가 그대에게도 해 뜰 날이 오지 않겠소, 신 소협?”
아, 그래. 이 새끼도 있었지.
“적화객? 적화개애액? 네놈이 남해에서나 통하지 중원 무림에서 통할 것 같으냐! 이 금수저 놈아!”
“금수저? 그건 칭찬 아니오, 신 소협? 하하하! 역시 천성은 착하시구려!”
남사익이 웃음을 터뜨리며 신혁건의 등짝을 두들기더니 사라졌다.
신혁건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시비를 걸면서 난동을 피우자, 송무와 태강이 입을 떡 벌리고 서 있었다.
이게 무슨.
황망한 눈길로 이곳저곳을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쉴 수밖에 없는 것이.
“황태, 이놈은 어디 갔어? 양아치 근본 어디 안 간다더니! 또 누굴 괴롭히러 간 거야?!”
……네가 지금 사람들을 제일 괴롭히고 있잖아.
그러다가도 막상.
“뭐요! 불만 있어요?”
“……아니.”
설화린의 뾰족한 외침에는 아무 말도 못 하다가.
“이 근육 덩어리 새끼! 인마! 몸 좀 그만 키워! 곰이랑 맞짱이라도 뜨려고?!”
“우흐하하하! 곰?! 그 정도는 되어야 사내답지!”
“이 뇌까지 근육으로 된 놈 같으니라고.”
근력 키우기에 여념 없는 명진에게 시비를 걸고는 고갤 돌려 휙휙 둘러본다.
흡사 먹잇감을 노리는 독사처럼 안광을 빛내면서.
“어떤 놈을 이번엔……. 으응?”
송무와 태강이 이제 그만하라며 말리려는 찰나, 조용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인영.
익숙하지만, 낯설다.
낯이 익지만, 묘한 기시감을 느낄 정도로 색다르다.
“뭐, 뭐야?”
“뭐긴, 뭐야? 이 새끼가 사람을 면전에다 두고 뭐냐고 소리치고 있네. 처맞으려고!”
뻐엉!
“꺄울!”
걷어차인 신혁건은 언제 시비를 털고 다녔냐는 듯 순한 양이 되어 입을 싹 다물었다. 그 모습에 송무와 태강은 절로 감탄했다.
“역시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더니 순식간에 해결되어 버렸어.”
“그러게 말이다. 그나저나…….”
두 사람이 묘한 눈길로 익숙하게 말을 내뱉고, 발길질을 한 인영을 바라본다.
“……정말 누구야?”
“누구긴. 저렇게 말할 놈이 또 있어?”
“그래서 하는 말이야……. 내가 아는 그 무린이가 맞나?”
“…….”
태강도 차마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한없이 불량스런 말투도.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행동거지도.
무엇 하나 달라진 것이 없다.
그런데 왜 못 알아보느냐고.
“허, 헌앙해졌다고 해야 하나.”
아니, 이렇게 말하는 건 좀 그렇지만.
살을 기하급수적으로 뺀 뒤부터 천무린의 외모는 빼어나다 못해 뭇 여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할 정도였다.
다만, 워낙 익살스럽게 구는 데다 외모로 보고 혹해야 할 무관의 여생도들은 정작.
“얼굴 때문에 혹했다가…… 졸지에 골로 갈 뻔했어.”
“훈련받다가 어제 졸도했어. 저 새끼 때문에……!”
“으드득.”
치를 떨면서 더 이상 천무린을 남자로 보지 않았다.
남자는 무슨.
되레.
“괜찮아요?”
“아오! 괜찮다니까! 그만 좀 들러붙어!”
“들러붙다니요! 누가요!”
“너! 바로 너! 젠장!”
훈련 때 그렇게 구르고도 바짝 따라붙는 설화린의 모습에 그저 감탄할 따름이었다.
하긴.
허구한 날 무관 생도들을 대상으로 매일같이 굴리고 훈련을 시키고 툭하면 밥 안 주고 거지꼴로 만들어 놓으니, 제아무리 미남이라도 눈에 들어올 리가 있겠는가.
설화린이 그저 특이한 취향이라는 생각만 들 뿐이다.
그런데.
“뭘 봐, 이것들아?”
저렇게 이야기하는데도 여생도들은 전혀 불쾌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몽롱해졌다고 할까.
백리무영과 백리후도 훤칠하게 잘생겼지만, 지금 이 두 사람의 외모는 천무린과 전혀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저벅, 저벅.
응?
으응?
휙, 휙.
다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얼어서는 멍해 있었다. 천무린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생도들의 얼굴을 쭉 훑었기에 알 수 있었다.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해 있다는 것을.
“사람 얼굴 처음 보냐? 다들 왜 그래?”
“너……! 너어……!”
태강이 손가락으로 천무린을 가리키며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러다가 말고 천무린에게 다가가서는.
투욱.
천무린의 볼을 검지로 스윽 문질렀다.
“분이라도 바른 줄 알았는데, 아니잖아?”
“뭐야, 이 새끼! 누굴 광대인 줄 아나!”
뻐엉!
신혁건과 마찬가지로 태강 역시 저 멀리 날아가 처박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벌떡 일어나서 천무린을 바라봤다.
“……무린아, 너 이것 좀 봐.”
어디서 면경(面鏡)을 가지고 온 송무가 천무린의 정면에 들이밀었다. 손바닥만 한 면경이 얼굴을 비췄는데, 거기에 비친 천무린은 자신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준미한 눈썹은 한 올, 한 올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하였고, 쭉 뻗은 콧날과 어울리는 갸름한 턱선은 북해에서나 볼 법한 한빙(寒氷)의 조각 그대로였다.
깨끗하고 투명한 피부에다 흑룡 여의주를 넣은 듯한 칠흑 같은 동공, 찰랑이는 검은 머리칼은 누구라도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조합이었다.
말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오물거리는 입술은 빨갛게 물들어 있어 여인처럼 화장을 한 듯 보였다.
수많은 전투로 인해 생겨났던 자잘한 상처와 흉터는 온데간데없어졌고, 늘 짜증스런 표정 때문에 일그러져 있던 눈썹이 일자로 쭉 뻗어 있었다.
늘 차갑기만 하던 인상이 이제는 어째 자비로워 보일 정도로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짜증을 내려고 표정을 찡그려도 예전 같지가 않았다.
“이, 이거 왜 이래! 누군데!”
퍼석!
천무린 역시 깜짝 놀라서 송무가 쥔 면경을 잡고 부숴 버렸다. 웬 생소한 인간이 이렇게 앞에 서 있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무슨 일이라…….”
있긴 있었지.
쩝 하고 혀를 차며 주변을 둘러보던 천무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빌어먹을 역근세수경.’
누가 부처의 무공 아니랄까 봐.
몸속에 휘몰아치는 거력(巨力)은 물론이거니와, 자잘한 상처와 부상들도 모조리 회복되었다. 어디 그뿐이랴. 몇 개월 요양을 해야 될 몸 상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태가 되었고, 단전이라는 그릇도 평상시보다 몇 배는 더 커졌다.
이른바 깨달음과 공청석유, 그리고 흡성대법까지 융화되어 천무린의 몸에 드러난 부처의 현신(現身)이었다.
“제X랄!”
어디선가 자신을 향해 웃은 녀석이 생각난다.
「 껄껄껄! 천 시주! 그대가 천마가 아니라 멸마인 것도 놀랄 노 자이거늘 지금은 아주우 자알생긴 부처가 되셨습니다! 」
전생의 천무린과 한때 격전을 치른, 소림이 낳은 무학의 1인자였던 천각대사의 웃음이 귓가에 들릴 정도였다.
저벅, 저벅.
“어라라. 우리 생도들이 한바탕 일 치르고 나더니 나태해졌나요? 왜 다들 얼이 빠진 채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죠?”
“하하. 배 교관님, 아이들이 고생하였으니 하루 정도는 더 편히 쉬게 둡시다.”
“……안 될 말이지. 빨리 처리하고 사천으로 돌아간다.”
“예, 알겠습니다. 교관님!”
걸어오는 네 사람은 배단아와 담진, 악교운과 소화진이었다.
“으응? 그런데 다들 왜 저 녀석을 쳐다보고 있는…….”
차례로 걸어오는 그들을 대표하여 소화진이 천무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어라? 어쩐지 분위기가 묘한 게…….”
“죽다 살아나면 달라지긴 한다던데.”
“다, 다르긴 하죠? 근데 왜 다들 저렇게나……?”
휙.
배단아가 후다닥 걸어와 천무린의 얼굴을 보자마자 입을 틀어막는다.
“헙! 어머나?”
“뭐, 뭐가 어머나, 입니까.”
그러면서 다가간 담진 역시 입을 양손으로 가렸다.
“멸마신군이 아니라 옥면신군(玉面神君)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습니다. 하하.”
“아오! 그러지 좀 마요!”
천무린은 주변의 분위기에 낯이 뜨거워져 그만 소리를 쳤다.
이 정도 외모야 뭐! 전생에서도 그랬어!
하여간 이놈의 외모지상주의 같으니라고!
그런데.
「 정말? 」
“…….”
하늘에서 들려오는 물음에 슬그머니 고갤 돌렸다. 그러다가 악교운과 시선을 마주쳤다.
“제법 좋은 결과를 얻었나 보군.”
“덕분에요.”
“다시 만난다면?”
거산도 전위를 두고 하는 악교운의 말에 천무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젓는다.
“그놈이 아니라 그놈의 할아비가 와도 절 못 이길 걸요?”
“후후, 당장이라도 붙어 본 것처럼 말하는구나.”
“감이죠, 감.”
“그보다 일은요?”
“일?”
“빨리 마무리하고 돌아가자면서요.”
“……낙양이 먼저로구나.”
낙양이라는 말에 천무린의 표정이 굳어졌다. 낙양이라니.
쥐소굴 때문에라도 낙양에 갈 생각이었지만, 우선순위는 아니었다.
그런데 낙양이 먼저 언급되다니.
“갑자기 낙양은 왜?”
악교운의 표정에 그늘이 졌다.
“제갈세가의 소가주가 죽었다더구나. 낙양에서.”
“에? 그게 무슨?”
“거기다.”
착 가라앉은 악교운의 음성이 나지막하게 울린다.
“마교의 흔적까지 발견되었다고 하는구나.”
삽시간에 천무린의 표정이 마치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마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