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4화
제154화
“……악교운 총교관.”
생도들에게만큼은 온화하기 그지없는 악교운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굳은 표정으로 고갤 들었다.
“아미타불.”
“……무량수불.”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그의 표정을 읽는 눈앞의 두 사람은 짤막한 불호와 도호를 욀 수밖에 없었다.
다름 아닌 섬서무관의 책임자인 혜공과 청강이었다.
“섬서에서는 손님에 대한 대우도, 친우에 대한 대우도 별로더군요.”
무미건조한 일갈. 그 반응에 청강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교관도 알다시피 현 섬서무관에는 크게 여력이 없다는 것은…….”
“두 분의 엉덩이가 그리 무거워서야 어찌 생도들이 두 분을 믿고 따르겠습니까.”
“악 교관!”
“소리 지르지 마십시오. 제가 아니라 당백진 관주님이었어도 그리 대하셨을 것입니까?”
“…….”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단순히 교관의 입장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당 관주님께 전권을 위임받았으며, 섬. 서. 무. 관. 의 요청으로 지원을 온 입장이란 말입니다.”
터무니없는 변명에 악교운은 매섭게 질타했다. 그 질타에 청강은 무어라 반박하려 했으나, 그 전에 혜공의 불호가 먼저 터져 나왔다.
“아미타불. 악 교관의 노여움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 내가 먼저 사과를 드리겠소이다.”
“관주!”
먼저 고개를 숙이는 혜공의 모습에 청강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무리 그래도 한 무관의 관주가 고작 교관에게 고개를 숙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개의치 않고 혜공이 말을 이어 나갔다.
“개방을 통해 먼저 전달받은 바가 있었소이다. 걸개들이 알려 준 바로는 우리가 먼저 자리를 비우면 섬서무관 주변의 기산을 기점으로 녹림도들이 언제든 섬서무관을 넘어오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고 하더이다. 무주공산이 된 무관을 악적에게 내어줄 순 없었소이다. 악 시주.”
혜공의 나지막한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청강은 끙하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구태여 그런 이야기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는 반응이었지만, 혜공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갈벽 총교관이 사라진 후부터 어수선한 섬서무관 내에서 녹림도들을 맞이했다면 아마 아비규환(阿鼻叫喚)이 되었을 테지요.”
“…….”
그 말에 악교운의 두 눈이 침잠하듯 가라앉았다.
혜공이 한 이야기에 관주실 안은 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떠드는 이만 있고 답하는 이가 없으니, 더없이 어색한 정적이 내려앉은 순간이었다.
악교운의 투명한 눈길이 닿은 청강의 입술이 마지못해 오물거렸다.
“녹림이라는 악적(惡敵)을 상대로 맞선 사천의 생도들과 교관들의 모습에 경탄을 금치 못하겠소이다. 무량수불.”
“…….”
“호량채는 녹림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무리이건만.”
“……후후.”
무거운 정적을 없애기 위해 입을 연 청강의 귓가로 악교운의 자조적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크지도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웃음소리였건만, 혜공과 청강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소리이기도 했다.
“정마대전, 그 지옥도를 보고 직접 진두지휘까지 하셨던 두 분께서 하시는 변명치고는 몹시 구차합니다. 후후후.”
“……변명? 지금 변명이라 하였소?”
청강의 눈썹이 역팔자로 꺾이며 서릿발 같은 기세가 악교운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무위는 정파 무림을 통틀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강인한 청강이지만, 그를 아는 이들은 혀를 내두를 만큼 성격이 급하기로 유명했다.
오죽하면 무당파에서조차 문파 내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무관주로 추천까지 해 내보내겠는가.
아마 무당이 아니라 다른 문파의 문도로 검을 잡았다면 천하제일인이 되었을 것이라는 풍문이 나돌았을 정도라 하니 그 급한 성격을 알 법했다.
청강은 몹시 급진적이고 조급했다. 그래서 눈앞에 악교운이 조금이라도 선을 넘으려 들면 바로 그 성격이 드러났다.
콰아악.
당백진의 날카롭고도 잘 벼린 칼날 같은 기운과 달리 서서히 조여 오는 압박감은 심해 속에 갇힌 듯 폐부를 갑갑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예. 변명이지요.”
악교운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귀도(餓鬼道)를 보고 삼대 무관이 만들어졌거늘, 그 삼대 무관의 책임자들은 정작 눈앞에 벌어지는 아이들의 위기에도 전혀 모른 척하시다니.”
“누가 모른 척을 했단 말인가! 뚫린 입이라고 마구 지껄이려 드느냐! 어디까지나 섬서를 위하여……!”
“그렇다면 아니란 말입니까. 정마대전 때도 그랬지요. 나약한 이들을 고기 방패 삼아 내세우고 뒤에서 실리만 취하던 명문 정파란 작자들이 한 행동 말입니다! 이번에도 그렇습니다. 호량채를 맞이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면서! 사천에서 먼저 소식을 갖고 와 알렸음에도! 우리 아이들이 맞서고자 나서려 했을 때에도! 외면했던 것이 사실이지 않습니까!”
터져 나오는 악교운의 기운이 내리누르는 청강의 기운에 대항하며 노호를 터뜨렸다.
지난날의 후회는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지난날의 과오는 모두 깨끗이 지워 버린 것인가.
“같은 역사를 반복하지 않고자 세운 삼대 무관임을 모르지 않으실 텐데 어찌하여 두 분은……!”
분노를 터뜨리는 악교운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그런 당신들을 믿고 뛰어든 제 아비 생각이 납니다. 후후, 이런 바보 같은 작자.”
산동악가(山東岳家).
현 오대 세가 중에서도 수위에 든 산동악가는 정마대전이 일어나자마자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한 모든 가솔들을 이끌고 전투에 뛰어들었다.
「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여라! 단 한 명의 양민이라도 살려야 한다! 평생을 외쳐 온 의협을 보여 줄 때가 되었느니라! 」
산동악가의 소가주였던 악교운은 가주인 악비를 따라 의와 협을 위해 자신의 한 몸을 불태웠다. 당시 악교운에게 아버지이자 가주인 악비의 등은 더없이 넓고 듬직하여 절로 존경심이 일었다.
그는 존경받아 마땅한 인물이었다.
천마신교의 검은 물결에 휩쓸려서 온 세상이 공포에 물들어 갈 때도.
「 양민들이 모두 구출될 때까지 시간을 벌어라! 당당하게 무사로 목숨을 바쳐라! 」
악비는 최전방에서 검을 휘둘렀다.
제 한 몸을 불사르는 악비의 모습이 여전히 그의 눈에 선했다.
「 다른 구파와 오대세가의 협사들이 도우러 올 때까지 시간을 벌며 양민들을 지켜라! 금방 구하러 와 줄 것이다! 」
그런데.
“무서웠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는 게 두려웠고, 가족이 죽는 게 두려웠습니다. 그래도 버텼지요. 버티다 보면 반드시 구하러 와 줄 구파와 오대세가다. 그들이 오면 이 악적들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후후후.”
말하다 말고 악교운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참으로 바보 같았지요. 제 한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갔으면 지금도 오대세가의 자리에서 굳건히 가문의 명성을 떨어 울렸을 텐데 말입니다. 당신들과 같이.”
다혈적인 청강조차도 악교운이 내려놓은 듯한 차가운 어조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혜공조차도 말이다.
……당시의 소림과 무당의 장문인이었던 두 사람이니까.
“제 아비는 바보였지요. 멍청이였습니다. 미련했고, 아둔했습니다.”
그 전장에서 산동악가의 모든 가솔들은 먼지처럼 산화되어 갔다.
「 나를 넘어서지 않고는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이 마교 쓰레기 놈들아! 」
악비가 악교운의 뒷목을 쳐서 기절시키고 다른 양민들에게 그를 부탁하지 않았다면, 아마 산동악가의 마지막 후예마저 이슬처럼 사라졌을 터.
“그때를 후회합니다. 왜 아버지를 뜯어말리지 않았는지. 다시 돌아간다면 절대로 먼저 나서지 않도록 뜯어말리고 또 말리겠다고 다짐을 하고 또 다짐합니다.”
절로 이가 갈리던 악교운의 두 눈에 청강의 기운은 맥없이 풀렸다. 관주라는 권위로 찍어 누르기에는 악교운의 쌓인 한은 매섭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꾸욱.
악교운의 두 주먹이 쥐어진다.
“제가 가르치는 제자들이 그러더이다.”
담진과 소화진이 천무린을 구하러 간 사이, 배단아가 섬서무관에 뛰어 들어와 악교운을 찾았고 악교운은 지체 없이 움직이려 했다.
그때.
「 교관님! 저희도 데려가 주십시오! 」
「 불가. 너희가 가면 아군의 발목만 잡을 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도록. 」
「 그렇지 않습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싸울 테니 제발 데려가 주세요! 」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른들은 나 몰라라 하는데, 아이들이 먼저 나서려고 하다니.
다시 한번 불가라고 소리치려는 순간,
「 후보생 5년, 생도는 고작 반년도 되지 않았지만, 이것 하나는 압니다. 친우가 위험해졌다는데, 악적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는데 가만히 있는 것은 정파인으로서도, 무인으로서도, 그리고 무관의 생도로서도 더없이 창피한 일이란 걸요. 」
「 어엿한 무인이자 무사로 죽게 해 주세요. 교관님. 」
결연한 의지를 보이는 생도들에게 더 이상 불가하다는 말을 하지 못한 악교운이었고, 다행히도 누구 하나 죽지 않고 돌아왔다.
“정녕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매서운 눈동자가 이글거리는 화염처럼 뜨겁게 불타오른다. 그것과 마주한 혜공과 청강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
그러다가 악교운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일어난다.
“이제는 되었습니다.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돌아가겠습니다.”
“……악 시주.”
“두 관주님께서는 예의상 잡지 마십시오. 스스로의 부끄러움을 털어 내지 않고서는 사천과 마주하려 하지 마십시오.”
혜공의 부름에 짤막한 대답만을 남기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가 버린 악교운이었다. 얼핏 후련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뒤로 남겨지는 불호.
“……아미타불.”
* * *
공청석유와 흡성대법으로 흡수한 악교운의 기와, 천무린이 갈고닦은 역근세수경까지.
전신 혈맥과 세맥 사이사이를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상했던 혈맥을 공청석유의 기운이 감싸 안자 언제 그랬냐는 듯 급속도로 치유되기 시작했다.
간질거리는 혈맥과 꿈틀거리는 기운들, 자비로운 금빛 서광이 서릿발 같은 기세로 뿜어져 나오더니 두 눈을 감고 무아지경에 빠진 천무린의 신형을 허공에 띄웠다.
부우우웅.
서서히 떠오른 천무린의 전신이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기를 수십 번을 반복했다.
그 속도가 비록 느릿하다고는 하나, 팽배해지는 육체의 모습을 보면 기이하다고밖에 여길 수 없는 모습이었다.
선천지기는 생명력.
감히 쓰려고 엄두조차 내지 말아야 할 힘이자 기운이다.
그 기운을 함부로 쓴 대가는 참혹했으나, 대자연으로부터 수백 년간 쌓아 온 공청석유의 기운은 망가진 생명력을 회복하는 데 탁월함을 보였다.
마치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전위와의 격전.
압도적인 힘 앞에서 처절했던 순간이 하나둘씩 떠오르며 천무린의 몸 곳곳에 기운이 스며든다.
무(無).
그리고 암전(暗轉).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 작은 씨앗이 태동한다.
두근, 두근.
발아(發芽)하는 씨앗은 곧 음과 양이 되어 태극을 이루고, 맞물린 두 기운은 톱니바퀴처럼 회전하며 만물의 기본 요소인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의 다섯(五)으로 나뉘어 오행(五行)으로 변화한다.
세상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의 기운이 뿌리를 내려 아래로, 그리고 다시 솟구치듯 성장하는 가지들.
수없는 순환(循環)의 과정 속에서 천무린의 몸에 기이한 변화가 일어난다.
뚜둑. 뚜둑. 뚝. 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