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3화
제153화
악교운과 헤어진 천무린은 한적하고 적당한 곳을 찾았다.
「 내가 몸을 살피라고 한 이유는 비단 너의 선천지기의 소모 때문만은 아니다. 」
혜공과 청강을 만나러 가기 전, 그가 남긴 의뭉스러운 말에 천무린은 자신이 기절한 동안 뭔가 일이 있었음을 직감했다.
아마.
“비정상적인 회복력 때문이려나.”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힐끗.
내려다본 그의 손아귀는 아주 깨끗했다. 수천 번, 수만 번 검을 쥐고 휘둘러서 생긴 굳은살을 제외하고는 말끔한 손아귀였다.
남들이 봤다면 뭐가 문제냐고 하겠지만.
“쓰러지기 전만 해도 손아귀가 찢어졌었는데 말이야.”
분명 전위와의 격전 중에 양 손아귀는 마치 걸레짝처럼 쭉쭉 찢어져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거산도라는 초절정 고수가 펼치는 도격에 내부가 진탕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온몸이 너덜너덜해 정도로 난자를 당했다.
오죽하면.
「 어쩌자고 생도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어 온 것이오! 이 정도면 생사가 불명할 정도로……. 」
처음에 천무린을 둘러메고 온 악교운에게 소리를 치던 섬서무관의 의료 교관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천무린에게 수많은 대침을 놓으면서도 긴가민가했다.
과연 살아날 수 있을까.
차마 입에 담을 순 없었지만, 제아무리 뛰어난 의원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이자의 목숨을 장담하지 못할 거라고 판단한 의료 교관이었다.
그런데.
불과 며칠이 지났다고.
「 대, 대체 어떻게 돼먹은 몸인지. 」
그렇게 소리치며 의료 교관은 자신을 바라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었다.
「 여, 연구를 해야 할 몸이오! 도, 도대체 어떤 몸이기에! 처, 천룡지체(天龍肢體)라도 된다는 말인가! 」
전설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신체를 타고나지 않고서야 도저히 믿기 힘든 불가해(不可解)한 회복 속도를 보고, 의료 교관은 천무린의 몸을 요모조모 뜯어보고자 했다.
담진과 배단아가 뜯어말리지 않았다면, 천무린의 온몸은 아마 실험체로 이용당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천무린의 두 눈이 가늘어진다.
어느 정도의 뻐근함은 남아 있었지만, 자신이 소모했던 과도한 선천지기를 생각하면 이 정도의 후폭풍은 충분히 감내할 수 있다.
‘그 정도의 선천지기를 쓰며 적어도 몇 개월 정양은 각오했었거늘.’
어떻게 된 것인지.
털썩.
‘그것은 직접 살펴보면 될 일이지.’
천무린은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똬리를 틀고 앉은 단전 속이 한참 쪼그라들어 있었다.
‘젠장.’
한 줌밖에 남지 않았던 선천지기를 생각하면 그나마 비할 바 없이 나아진 상황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전위와의 전투를 통해 깨달은 바를 조금이나마 녹여 내려면 최상의 몸 상태가 되어도 부족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낯설면서도 묘하게 익숙한 기운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것이 느껴진다. 단전 속엔 자신의 근간인 역근세수경의 기운을 제외하고는 딱히 없으련만.
이 기운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천무린은 기운을 톡톡 건드려 봤지만, 반응이 없었다.
역근세수경만큼 청유하고도 심유한 기운은 아니었지만, 맑고도 단단한 기운이다. 천무린이 가진 기운과 비교해도 그 양이 적지 않았다.
‘이 기운 덕분에 빠르게 회복을 한 건가. 그렇다면 내 몸을 극약 처방으로 치유한 게 이해는 되지만…….’
짐작이 가는 바는 악교운이었다.
자신이 쓰러져 죽어가고 있을 때, 악교운이 자신의 혈맥을 통해 내부 이곳저곳을 살피며 치유를 진행했다고 들었다.
보통 내상을 입은 무인에게 어지간한 고수라도 그렇게 격체전력을 할 순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두 사람 모두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져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될 테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 기운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이런 경우도 전생의 천무린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사실 본 적이 있다.
심지어 천무린은 아주 잘 알고 있다.
‘……흡성대법(吸星大法).’
다른 이의 기를 흡수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무공으로 채양보음(採陽補陰), 채음보양(採陰補陽)과 더불어 삼대 금기 무공으로 손꼽히는 것이다.
무학에 대한 열의와 호기심이 일반인의 범주를 훌쩍 넘어선 천무린이 닥치는 대로 무공을 보고 익히던 시절, 흡성대법을 펼친 바가 있었다.
그러나.
‘흡성대법 때문에 전생에서 죽을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
다른 이의 내력을 흡수하는 사특한 무공인 만큼 이를 펼치는 데에는 까다로운 조건이 붙었다.
사실 그게 아니라면 개나 소나 흡성대법으로 절세의 고수가 되었을 테니까.
단전 속에 있는 모든 내력이 빈 상자처럼 비워져야 한다는 것이 첫 번째 조건이었다. 하지만 어지간한 무인의 단전 속에 내력이 텅텅 비는 경우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단전의 내력이 텅텅 비게 된다면,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중력의 법칙처럼 상대방의 피부에 닿는 순간 내력을 흡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두 번째 조건이 필요했다.
상대방의 내력을 받아들이는 순간, 충돌이 일어나기 쉽다. 그렇기에 외부의 기운에 순응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순수한 내공심법을 익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두 번째 조건이었다.
역근세수경은 더할 나위 없이 순수한 데다 외부의 기운에도 자비롭기 짝이 없는 절세의 내공심법이다. 천하를 뒤져도 역근세수경보다 더 외유내강(外柔內剛)의 묘리를 담고 있는 기운은 없다.
그런데 그 모든 조건이 딱 맞아떨어지는 때가 바로 천무린이 죽음을 코앞에 둔 순간이었고, 악교운이 자진하여 자신의 내력을 밀어 넣었으니.
무의식적으로 흡성대법의 구결을 알고 있던 몸에서는 얼씨구나, 하면서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주인을 살려야 했으니 말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천무린은 씨익 입가를 말아 올렸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킨다.
“이봐, 저승사자. 당신도 이런 건 예상 못 했겠지? 흡성대법은 금기 무공이긴 하지만, 마공으로 취급하긴 애매하지? 후후, 마기(魔氣)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지.”
저승사자가 이 몸에 금지령을 각인시킨 것은 금살(禁殺)과 금마(禁魔)다.
사람을 해할 수 없고 마공을 익힐 수 없는 최악의 각인이었지만, 천무린에겐 이보다 더 큰 빛줄기가 없었다.
“답답했는데, 어찌나 반가운지.”
과거의 흔적.
비록 마공은 아닐지라도 옛 흔적을 맞이한다는 것은 반갑고 기쁜 일이었다.
조금이나마 전생의 무위를 회복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흡수 못 할 이유가 없지.’
어디 내력 쪼가리 주제에 앙칼지게 굴어?
천무린은 단전에 잠들어 있던 자신의 기운을 끌어올려 악교운으로부터 흡수한 기운을 향해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다.
그러면서 단숨에 기운을 잡아먹는다. 이빨을 드러내며.
와그작, 와그작.
그놈, 참 맛나네!
흡성대법으로 끌어온 악교운의 기운을 일부이지만 역근세수경으로 쌓은 기운이 어르고 달래 가며 흡수했다.
흡수된 기운은 하나도 빠짐없이 쪽쪽 빨려서 천무린의 단전 속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금세 충만해지는 기운이 더없이 만족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면서 단전에서 휘감기는 기운, 즉 선천지기는 회복되려면 멀었지만 내력이라도 원상 복구를 하겠다는 것이 천무린의 의지였다.
전위.
거산도 전위는 전생에 동일한 수준에서 격전을 치렀어도 상당한 실력자였다.
전 중원을 통틀어서 초절정을 넘어선 극마, 혹은 화경의 경지에 이른 무인들이 아니라면 전위 정도의 무인은 결코 꺾기 어려울 터.
삼대 무관의 무관주인 당백진, 혜공과 청강, 그리고 남궁도가 화경의 경지인 것을 감안한다면, 그 바로 아래쯤 되는 수준이다.
빠득.
그러나 전생의 천무린이었으면 무엇이 두려웠으랴.
화경이라는 경지에 도달한 그 무인 넷과 함께 휘몰아치는 격전을 치렀어도 밀리지 않았던 천무린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빠득.
열 받네. 생각하면 할수록.
고작 초절정의 녀석에게 발목이 잡혀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자신의 신세가 한탄스러울 정도였다.
그래서 더더욱.
‘다스리자.’
천무린은 악교운으로부터 받은 목함을 꺼내 입안에 털어 넣는다.
또옥.
혀끝에 녹아든 한 방울의 기운은 몸속에 잠재된 기운을 모조리 끌어올리기 시작한다. 흥분을 참지 못한 채 한바탕 난리를 치기 시작하는 기운.
그것은 다름 아닌.
강호에서 수백 년을 들여도 얻기 어려운 단 한 방울의 영약.
공청석유(空靑石油).
오랜 세월 동안 쌓인 대자연의 기운이 얽혀서 단 한 방울로 농축되고 또 농축된 산물. 이는 천무린조차 전생에서 단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한 최고의 영약이자 천고의 산물이었다.
「 와, 이 양반 장난 아니네? 어떻게 이런 보물을? 」
「 이래 봬도 오랜 역사를 함께했던 명문 중의 명문, 산동악가 출신이다. 보물 중 그거 하나만 겨우 건져 나왔지. 」
「 근데 이걸 나한테 줘도 돼요? 이걸 왜? 굳이 나한테? 」
「 나 역시 무인이다. 당연히 욕심은 나지. 허나. 」
악교운의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고, 이내 천무린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 제 주인을 찾아가는 게 보물이 아니더냐. 난 이미 늙어 버렸지. 보물에 욕심을 내기에는. 그저 미련이 있어 어느 누구에게도 전해 주지 못했을 뿐. 」
공청석유라는 영약이자 보물은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살 수가 없다. 그런데 그것을 이렇게 넘겨주다니.
이 양반이 대체 날 얼마나 이용해 먹으려고!
어휴! 하여간 이 여우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천무린의 표정엔 기분 나쁜 반응이 전혀 없었다. 그저 천무린은 제 역할을 위해 최선을 다할 뿐.
‘기왕 받은 거 어떡하겠어. 먹고 힘내서 나쁜 놈들(?) 모조리 처리해야지.’
천무린의 전신을 금빛 휘광이 감싸기 시작했다. 잠재되어 있는 천무린의 굳건한 기운과 악교운의 청명한 기운, 그리고 입안을 통해 들어오는 공청석유의 대하(大河) 같은 기운이 노도처럼 천무린의 혈맥 전체를 파고들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격전을 통해 얻은 천무린의 깨달음이 융화되기 시작하면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의 전신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난해하기 그지없는 기운과,
절세의 역근세수경이라는 신공 속에.
희대의 기린아라고 불리는 천무린의 깨달음까지.
파도처럼 밀려들고, 밀려든다.
전생의 쓰라린 기억도.
현생의 나아갈 방향도.
오로지 단 하나로 집약되어 천무린의 단전 속으로 몰려든다.
화아아아아악!
가부좌를 튼 천무린의 신형이 느릿하게, 아주 느릿하게 바닥에서 거리를 띄운다. 그런 천무린의 머리 위로 흐릿한 형상이 생긴다.
부우웅.
세 송이의 꽃이 머리 위에 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꽃들이 점차 다섯 가지 기운으로 화하면서 머리 위에 다섯 개의 고리를 이루기 시작한다.
……삼화취정(三華聚頂).
그리고 오기조원(五氣朝元)까지.
무아지경으로 빠져든 천무린은 알 수 없었다. 자신의 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