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1화
제151화
“벽력……!”
콰앙.
무어라 소리치려던 편도림의 몸이 마치 포탄을 맞은 것처럼 뒤로 튕겨 나서 벽에 처박혔다. 그 모습에 고색과 명일석은 단숨에 몸이 굳어졌다.
“다시 한번 지껄여 봐라!”
무시무시한 일갈.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우렁찬 목소리에 고색과 명일석은 굳어 버린 채 고개만 꺾어 편도림을 바라봤다.
움직이지 않는다. 미동도 없었다.
“……편 형.”
“펴, 편 형!”
애타게 불렀지만, 편도림은 더 이상 이승의 사람이 아니었다.
목이 꺾인 채 그대로 절명한 편도림은 대답하고 싶어도 대답할 수가 없었다. 너무 놀라 몸이 굳어 버릴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이었다.
당연히 강자에게 덤비면 그만한 각오는 해야 한다. 벽력왕이라는 별호를 생각하면 편도림을 제압 못 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그들이 얼어 버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금태도의 몸은 한 치도 움직임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저.
“어, 어떻게…….”
“으아, 아아아아…….”
덜덜덜.
부들거리는 두 사람의 시선이 금태도의 솥뚜껑 같은 손가락을 바라본다.
‘소, 손가락을 튕겨서 펴, 편 형이 절명을……?’
‘마, 말도 안 돼…….’
편도림은 상인에 불과했지만, 그렇다고 한들 거친 강호를 살아가는 일원으로 칼밥을 먹은 이였다. 그런 그가 단지 손가락을 튕긴 것만으로 절명을 하다니.
압도적인 무력을 경험한 그 순간, 두 사람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편도림을 따라 자식의 복수를 하기 위해 그동안 피땀 흘려 일군 삶의 터전을 버리고 왔더니.
졸지에 죽음을 맞이하게 생겼다.
“다시 한번 지껄여 봐라.”
천지를 진동시키는 내력이 느껴졌다. 그 내력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에 절로 숨이 턱 하고 막힌 두 사람은 갑갑해진 가슴을 부여잡으며 버둥거렸다.
당장이라도 그들의 심장을 터뜨려 죽여 버리겠다는 분노.
벽력왕의 진노가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닿자, 두 사람의 눈이 공포로 물들어 갔다.
‘주, 죽는…….’
‘여기서 죽을 수는 없……!’
혼미해져 가는 정신줄을 억지로 부여잡던 그들에게 벽력왕이 콧김을 뿜어내더니 고갯짓을 했다.
털썩.
“허억, 허억.”
“켁, 케엑, 콜록, 콜록.”
두 사람은 무릎을 꺾은 채 주저앉아 마른침을 뱉어 내며 갑갑했던 숨을 몰아쉬었다. 고갯짓 한 번으로 기운을 단숨에 거둬들였다.
“더 할 말이 있는가, 이 버러지들아.”
무엇 때문에 기운을 거둬들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벽력왕의 태도에 두 사람의 대답은 하나로 일관될 수밖에 없었다.
“어, 없습니다! 벽력왕이시여!”
“사, 살려……. 아니, 자비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큰 목소리로 지불했던 대금을 돌려 달라고 소리치던 두 사람은 온데간데없었다. 그저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이들밖에 없었다.
그 모습에 벽력왕이 손을 휘휘 내젓는다.
명백한 축객령(逐客令)이었다. 벽력왕 금태도를 보좌하던 거한들이 벽력왕을 향해 절을 한다.
“군주의 명을 받듭니다!”
거한들의 체구로 쉽사리 할 수 있을 자세일까 싶을 정도로 큰 절을 공손히 한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두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직여 거한들과 같이 벽력왕 금태도에게 예를 갖춘다.
더없이 공손하고 예를 갖춘 모습.
그러나 벽력왕은 대꾸조차 하지 않고 그저 나른해 보이는 눈짓만을 보일 뿐이었다.
벽력왕 금태도의 대꾸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거한들은 일제히 일어나 절명한 편도림의 시체를 거적때기를 들 듯 들고서 두 사람을 이끌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 태도는 경건하기 짝이 없어 혹자가 본다면 어느 신교의 집단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군주이시여, 어찌하여 저놈들을 그냥 살려 보내신 것입니까?”
벽력왕의 심사가 뒤틀려 있음을 느낀 군사(軍師) 녹두귀효(綠頭鬼梟) 면귀랑의 물음에 벽력왕은 나른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본다.
“……괜스레 불필요한 소문이 날 수도 있습니다.”
“불필요한 소문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
쿵, 쿵, 쿵!
전신을 호피 가죽으로 둘러 위압감을 표출하던 벽력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기자, 사방으로 터져 나오는 기운은 배가되었다. 굳이 갈무리하여 기운을 정리하려 하지 않는다. 거친 기운을 폭사시키고 자신의 위엄을 있는 대로 표출하던 벽력왕이 한쪽 구석에 틀어박혀 있는 보따리를 손에 쥔다.
“불필요한 소문, 불명예스러운 순간, 녹림이라는 이름에 대한 먹칠. 모두 중요하다. 허나, 내가 이 자리에 선 순간부터 무엇을 강조했느냐, 군사?”
보따리를 열어젖히자 눈이 부실 정도로 가득한 금괴와 금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배고프지 말자고 했습니다.”
“모든 양민들의 지아비라 불리는 왕은 치세(治世)를 잘해야 한다. 명예는 그 뒤에 누려도 결코 늦지 않지.”
그 말에 면귀랑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녹림의 아이들이 제 배를 굶주려 제 가족의 등에 칼을 꽂는 불상사가 더는 없어야 되지 않겠느냐.”
벽력왕 금태도.
그가 녹림의 주인이 된 이후부터 녹림칠십이채는 하나가 되었다. 그 전까지 녹림은 하나이되, 하나가 될 수 없던 존재였다.
녹림이라 표현하면 칠십이채라고 표현하나 작고 소수의 산채까지 포함하면 이백여 채가 넘어간다. 그런 이들이 먹고살 길은 양민들을 약탈하는 것밖에 없는데, 같은 영역에 있는 산채들은 어찌하겠는가.
같은 녹림이라는 이름으로 양보를 한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먹고살기 위해서, 영역을 확장하고 제 입에 풀칠하기 위해서 산채들 사이에서는 무수히 많은 전투가 벌어졌다.
그런 녹림을 금태도는.
“군주께서 녹림을 일통하였지 않습니까.”
녹림의 수백 개 산채를 하나로 통일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사내이자 왕이었다. 면귀랑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던 금태도는 그 보따리를 면귀랑에게 던졌다.
“아이들에게 나눠 주어라.”
“……알겠습니다.”
“호량의 아이들에게는 더욱 많이 나눠 주도록 하고.”
벽력왕 금태도는 폭군이다. 중원 무림에는 무시무시한 폭군으로 알려져 있지만, 면귀랑에겐 더없는 성군(聖君)이었다.
녹림의 벽력왕은 더없이 녹림을 아끼고 사랑했기에.
하지만 면귀랑은 그런 벽력왕에게 유일하게 간언(諫言)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게 바로 녹림의 왕을 보좌하는 유일무이한 군사의 역할이었으니까.
“허나, 군주이시여. 호량의 아이들은 녹림의 이름을 더럽힌……!”
후우웅! 쾅!
거친 풍압이 산채 전체를 뒤흔들더니 면귀랑의 가슴팍에 적중하였고, 그의 몸이 그대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쿨럭!”
한 모금의 피를 토해 낸 면귀랑의 귀로 파고드는 벽력왕의 한마디.
“고생한 아이에게 떡 하나 더 주는 것이 인간의 도리다. 당연한 이치를 왜 모르느냐?”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어지간한 음공(音功)보다 치명적인 중후한 내력이 파고들며 면귀랑의 전신을 뒤흔들었다.
“상처를 제법 입었다고 하니, 다른 것보다 우선 보신할 것을 챙겨 주면 좋겠구나.”
“쿨럭, 쿨럭. 구, 군주의 명을 받듭니다.”
“요즘 들어 군사는 너무 정이 없어지는 듯하이.”
“……죄송합니다.”
피가래가 끓는 목소리로 주섬주섬 옷매무새를 정돈하더니 한쪽 무릎을 꿇는 면귀랑의 모습에 벽력왕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있다. 그간 군사의 노고를 생각하면 나 역시 손속이 과했지. 일어나라.”
그 말에 면귀랑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조아린다.
“아이들을 보살피는 것이 먼저.”
몸을 젖혀 산채 내 범의 생가죽을 벗겨 치장된 의자 위에 터벅터벅 걸어가는 벽력왕이었다. 그리고 면귀랑이 고개를 조아린 채 뒷걸음으로 산채를 벗어난 모습을 보고 나서야 벽력왕의 말이 그 뒤를 잇는다.
“그다음에 아이들의 시시비비를 가려 해한 이들에게 죗값을 받아 내야겠지.”
녹림에게는 더없는 성군(聖君), 녹림을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는 더없는 폭군(暴君).
벽력왕의 두 눈에서 무시무시한 안광이 터져 나왔다.
* * *
“어, 어라? 몸이 왜 가뿐하지.”
“그러게. 뭐지? 왜……?”
폴짝폴짝 뛰며 제 몸의 상태를 점검하던 생도들이 하나둘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녹림의 호량채와 맞서면서 수없이 생긴 상처와 격전으로 인해 피로감이 가득했다. 분명 하루를 꼬박 자도 전혀 나아질 것 같지 않던 피로감이었건만.
“아직 영단의 기운이 남아 있었을 테니까. 모두 내력이 되면 좋겠지만 한계는 있는 법이지. 그리고 대신에 몸을 치유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고.”
그렇게 대답한 천무린은 피식 웃으며 생도들을 쭉 훑었다. 그 역시 하룻밤을 더 잤다고 조금 더 개운해진 느낌이었다.
적독단과 귀구의 알을 통해 얻은 영단의 효력이 생각 이상으로 좋은 모양이다.
그걸 생각하니 천무린의 뱃속이 절로 근질거렸다.
이렇게나 좋고 효율적인 방안을 알려 주었는데, 고작 나한테 준 게 한 알?
하아아안아아알?
당백진, 이 개X끼.
생각해 보니 빡치네.
내가 밖에서 얼마나 개고생을 하는지 모르고!
절로 이가 갈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생도들이 할 말을 잃고 슬그머니 뒤로 물러난다.
“……야야! 저 새끼, 눈깔 돌아갔어.”
“왜, 왜 저래? 누가 저렇게 만들었냐?”
“누가 만들긴! 아오, 그러니까 구하지 말자니까!”
“미친놈아! 네가 눈물을 질질 흘리면서 ‘무린아아!’ 하고 염병을 떨었잖아!”
“누가 그랬다고……!”
한차례 치고받던 생도들이 묘한 위화감에 말문을 서서히 닫는다. 그리고 자신들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
“다시 한번 말해 볼래?”
“……어?”
“뭐, 뭘?”
움찔거린 생도들에게로 천무린이 빙긋 웃으며 한 걸음 내딛는다.
“구하지 말자고 한 새끼 나와.”
“…….”
“허허, 뭐야. 없어?”
“…….”
천무린이 흐뭇하게 웃었다.
하하, 녀석들도 참.
“며칠 안 팼다고 내 성격을 잊은 모양이네. 뭐, 그렇게 사이에 숨어서 안 나오면 내가 그냥 넘어갈 줄 아나 보지?”
손가락을 꺾는 그 모습에 신혁건이 천천히 걸어 나온다.
“오! 자진 납세?”
그래, 그러면 봐줘야지.
저렇게 솔직담백하게 말하는데, 어떻게 때리겠…….
“솔직히 말해 봐. 너, 아직 다 낫지도 않았잖아. 악 교관님 말씀을 들어 보니까 치료가 다 되려면 한참 남았다던데.”
그러면서 신혁건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다. 그 반응에 용기백배한 생도들이 함께 걸어 나서며 조용히 목검을 꺼내 든다.
“그런 거였어? 허세였단 말이지?”
“이 기회에 무린이 저 새끼 기세 좀 꺾어 주자고.”
“근데 이렇게 하면 반칙 아니야?”
“X랄! 반칙이 어딨어! 저 새끼가 누누이 말했잖아. 싸움에 이기면 장땡! 반칙이 어딨냐고!”
눈에 불을 켜고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한 자세를 취하는 녀석들.
하하, 정말 기똥차게 잘 키웠네. 기똥차게도.
근데 말이다, 이것들아.
나 내력 안 써도 너희들은 조질 수 있다?
왜냐고?
나, 무신 출신이거든.
빠득, 빠득.
그리고 천무린은 양 떼 속 한 마리의 늑대가 되어 생도들 사이를 마구 누볐다고 한다.
“다 뒈져! 뒈져! 이것들아아아아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