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0화
제150화
콰앙!
“물러나라! 물러나!”
“미친 마교 새끼들! 저놈들은 밤낮도 없나.”
“어떻게 잠도 안 자고 매일같이 쳐들어오냐고!”
불야성(不夜城).
등불이 휘황찬란하기 짝이 없어 밤에도 대낮처럼 밝은 대도시를 두고 보통 불야성이라고 표현하지만.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은 다른 의미로 불야성이었다.
하루를 멀다 하고 온 마을이 불타고 잿더미로 화하는 것은 물론이요, 살육의 현장이 잇달아서 그리 부를 수밖에 없었다.
“응애-! 응애-!”
“제, 제발 아이만큼은! 아이만큼은 살려 주……!”
“크아아아악!”
푸욱!
칼에 찔린 아이와 어미는 더 이상 무어라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비명을 지르던 아비는 자신의 나약함에 치를 떨며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고, 그렇게 일가족이 몰살되었다.
서걱! 서걱!
무정(無情)한 검은 사정없이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람들을 족족 베어 넘겼고,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이들은 뛰어들어 막았다.
“……너희도 사람 새끼라면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
“어떻게 갓 태어난 아이마저 베어 버린단 말이냐.”
“으아아아아아! 됐어! 저 새끼들 죄다 귀 닫고 움직이는 놈들뿐이라고! 그냥 죽여!”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으니까!”
정파인들은 이를 악물고 눈앞에 보이는 마교도들과 전투를 벌였다.
갑작스러운 기습, 들이닥친 검은 물결.
산발적으로 발생하던 전투는 중원 무림 전체로 번지면서 ‘정마대전’으로 이어졌다.
그것이 불과 1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리고 바로 그 중심에 천마(天魔)이자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자타공인 무신(武神)이자 마신(魔神)인 천무린이 있었다.
“마도일통(魔道一統)! 모두 쓸어버려라! 중원 무림에게 보여 주어라. 천마신교가 어떤 존재인지를.”
천지를 진동하는 천무린의 음성은 담담했지만, 마교도들은 그 이야기 한마디에 광신도적인 기세로 정파인들을 모조리 베어 넘겼다.
마교도들의 검 끝에 자비란 없었다.
그저 베고 또 벤다. 살육의 기계처럼 감정을 배제하고 모조리 베어 넘기는 그 모습을 보고 맞상대를 하던 정파인들의 모골은 송연해졌다.
“구파일방은 언제 오는 거냐!”
“오, 오대세가는! 오대세가는 왜 안 와!”
“으아아아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의와 협을 논하며 수많은 양민들과 정파 세력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이들은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코빼기도 보이질 않는다.
“크하하하하.”
“허울뿐인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믿었더냐!”
“차라리 개돼지를 믿어라!”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검을 빼 든 이들.
물러날 곳이 없어 도망도 못 가는 이들은 결사항전의 자세로 검을 빼 들었다.
가족.
제자.
그리고 자신들이 쌓아 온 추억들이 함께하던 문파까지.
믿었던 명문 정파들의 지원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고, 오로지 독기와 악으로 버텨 내면서 결국 장렬히 산화하고 말았다.
그렇게 군소 방파와 중소 문파들을 앞세워 희생시키던 명문 정파와 오대세가는 뒤늦게 등장하였다.
협과 의를 기치로 내세우며 등장한 이들을 보고 군소 방파와 중소 문파들은 이를 갈아붙였지만, 더럽고 거지같아도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손을 빌려야만 했다.
이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정말로 자신들은 먼지처럼 사라져 버릴 테니까.
하지만 한번 승기를 잡은 천마신교의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야말로 파죽지세(破竹之勢).
“입으로만 떠드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장들 모가지를 모두 내 앞으로 갖고 와라.”
천무린의 단호한 말.
“충! 천마(天魔)의 명을 받듭니다.”
쿠웅! 쿵! 쿵!
만마의 종주 앞에 수천 명의 마교도인들이 땅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찧고, 또 찧어 깨진 이마에서 피가 흘렀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들에게 천무린은 곧 신이었으니까.
신의 명에 절대 복종하는 것은 신도들의 당연한 의무였으니까.
무림일통, 마도일통.
천무린의 말 한마디에 중원 무림에는 온통 피비린내가 나기 시작했다.
세상이 온통 붉게 변했고, 사방이 피비린내로 진동했다. 활활 타는 전각과 건물들. 마을에도 불길이 치솟는다.
시산혈해(屍山血海).
말 그대로 시체가 산처럼 쌓였고, 피가 바다처럼 흘렀다. 검은 물결이 지나간 곳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다.
「 안 돼! 그마아아안! 」
천무린을 향해 누군가가 소리친다. 하지만 들리지 않는지 천무린은 다시금 핏빛 길을 마다하지 않고 걷는다.
오로지 마도일통이라는 목적 하나로.
「 그, 그만해……! 」
제에발.
번쩍.
* * *
번쩍!
두 눈을 번쩍 뜬 천무린의 등으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허억, 허억.”
코끝에 피비린내가 풍기는 것 같았다. 눈앞에 핏빛 강이 아른거린다.
자신이 명했고, 자신의 목적으로 인해 평화롭던 세상이 깨진 유리창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숨이 턱 하고 막힌다.
내가.
이 내가 모든 것을 저질렀다.
천무린의 두 눈이 질끈 감겼다.
어찌하여 이런 꿈을.
만약 저승사자가 도래하여 자신을 막지 않았더라면 정말 전 무림이 자신의 발아래 있었겠지만, 아마도 지금보다 더한 아비규환이 되었겠지.
꾸우욱.
두 주먹이 불끈 쥐었다.
‘이것이냐? 내게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 진정으로 내게 보여 주려 했던 것이 이것이냐.’
천무린의 두 눈에 형형한 안광이 터져 나오며, 눈에 보이지 않는 저승사자를 바라본다. 마음이 심란했고, 어지러웠다.
「 ……. 」
하지만 저승사자는 답이 없었다.
돌아오는 대답 없이 그저 천무린을 말없이 응시하는 것 같았다.
천무린이 뼈아픈 회한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워지려는 찰나,
“쿠울, 쿠울.”
“흠냐, 흠냐. 나, 난 더 먹을 수 있는데……!”
“서, 설 소저……. 내 마음을 받아 주…….”
천무린의 이부자리 곁에 수많은 생도들이 지쳐 쓰러진 채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다.
널브러진 이들은 하나같이 천무린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었다.
지쳐 쓰러져 잠꼬대를 하는 녀석들과,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잠들어 있는 녀석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천무린의 후회로 일그러진 감정이 아주 천천히 누그러진다.
피이-!
일그러졌던 얼굴에 미소가 절로 새어 나왔다. 천무린 역시 전위와의 격전으로 온몸이 끔찍할 정도의 격통이 느껴졌다.
어느 곳 하나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그는 다시 눕지 않았다.
아니, 다시 눕지 못했다.
녀석들이 허리춤에 있는 검갑을 빼 들고 쥐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천무린에게 해가 가해지지 않도록 지독히도 방어적인 모습.
그 모습이 기꺼워 눈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보다 보니, 전위와의 격전 이후에 쓰러져 죽어가던 천무린에게 소리치던 생도들의 목소리가 생생히 떠오른다.
목청이 터져라 부르짖던 생도들의 목소리가.
죽지 말라고.
죽으면 안 된다고.
아마 그 목소리가 없었다면 천무린의 생명력은 진작에 꺼졌을지 모른다. 그 음성이, 그 목소리가 저승의 문턱에 가 있던 천무린을 구원해 준 것이다.
“빌어먹을 녀석들 같으니라고.”
그리 말하지만, 천무린의 입가가 말려 올라간다. 고작 절정에도 도달하지 못한 것들이 그 살벌한 전장 속에서 천무린의 쓰러진 모습을 보고 지체하지 않고 달려들다니.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천무린을 훑고 지나갔다.
……그래, 그렇구나.
인정하자.
전생의 천무린은 다시없을 마신이었고, 전 중원에 크나큰 파멸을 불러오는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파멸로 인해 생겨난 무관의 생도다.
천무린은 그 생도로서, 나아가 정파의 일원으로서 살아간다.
무너졌던 중원 무림에 이번에는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 그럴 수 있는 천무린이니까.
천마가 아닌, 멸마로서.
전생의 천무린이 아닌, 현생의 천무린으로서.
다시금 천무린이 천장을 바라보며,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쳐다본다.
‘이것이오? 나를 이곳에 보낸 이유가.’
「 절로 깨달았다니 다행이군. 천마 천무린, 앞으로 그대의 행보를 더 눈여겨볼 수 있겠어. 」
그리 대답하는 것만 같았다. 빌어먹을 저승사자 새끼.
오냐, 내 반드시 그리 만들어 주마.
힐끗.
새근새근.
고른 숨을 토하며 잠을 자는 생도들을 힐끗 쳐다본 천무린의 입가에 다시금 미소가 걸렸다.
‘저 애새끼들을 데리고 보란 듯이 만들어 줄 것이오.’
어느 때보다 나은 세상을.
악의보다 정의로 점철된 강호 무림을.
천무린에게 다시금 피로감이 엄습했다.
생명력이나 다름없던 선천지기를 남발하듯 써 버린 후폭풍의 대가는 너무도 컸다. 제아무리 무신의 천무린이었다고 하더라도 이토록 선천지기를 홀라당 써 버린 적은 없었기에 아마 수십 일은 아무것도 못 할 터.
벌러덩.
절로 눈이 감겼다.
‘나약해 빠졌네.’
그러면서도 천무린은 애써 몸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과거 천마라는 자리에 오르기 위해 오로지 살검(殺劍)만으로 세상을 대하던 천무린이 아닌, 어느 한 무관의 생도가 된 천무린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 채 말이다.
무던히도 치열하게 살아왔던 천무린이 처음으로 편안한 표정으로 잠을 청했다.
* * *
- 멸마신군(滅魔神君), 거산도(巨山刀) 전위를 꺾다.
- 녹림의 차기 군주가 고작 무관의 생도에게 무너지다?
- 녹림칠십이채 호량채의 몰락.
- 쌍용검 파평, 거산도 전위, 그다음은 벽력왕!?
호사가들의 수많은 이야기가 중원 무림에 파다하게 퍼졌다.
후퇴하는 호량채, 쓰러진 전위를 업고 패잔병처럼 녹림으로 물러가는 녹림도들을 수많은 이들이 목격했고, 그 이야기는 중원 무림에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동시에 사천무관의 승전보가 중원 무림 전체에 퍼졌고, 정파 무림인들은 들끓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용을 써야 했다.
대체 얼마 만인가.
정파가 이토록 이름을 빛내 본 것이.
그리고 이 소식에 이를 악문 세 사람이 있었다.
“벽력왕! 고작 그 애송이 하나를 잡지 못한 것이오!”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 아니오. 녹림의 호걸이라 하여 믿고 일을 맡겼거늘 아주 실망이 크외다!”
“어떡할 것이오! 더 이상 돈은 줄 수 없소! 그리고 다시는 녹림과 일을 함께하는 일도 없을 것이오.”
편도림, 고색 그리고 명일석.
사천에서 벗어났던 세 생도의 아버지인 세 사람은 눈가에 핏발을 세운 채 흥분해 소리쳤다.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벗어나 오로지 복수를 위해 녹림을 찾아왔다.
제 자식의 망가진 모습에 피눈물을 흘리던 세 사람은 오로지 복수만을 꿈꿨고, 다른 누구도 아닌 사천무관의 어느 생도 하나를 지목했다.
그런데, 믿고 맡겼더니 그 결과가 고작.
“돈을 돌려주시오! 벽력왕!”
편도림의 검지가 마주 바라보던 이를 향한다. 그 손가락 끝에 있던 한 사내.
거친 사자의 갈기처럼 정돈되지 않은 머릿결.
각이 진 얼굴과 짙은 눈썹 사이로 서릿발 같은 눈빛.
그리고 어지간한 성인 남성의 허리둘레는 될 법한 큼지막한 팔과 다리.
그는 녹림칠십이채의 두목이자 왕이라 불리는 벽력왕(霹靂王) 금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