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6화
제146화
후우웅!
바람결에 넘어가는 담진의 머릿결이었다.
“교, 교관님! 저도 달릴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오느라 모든 힘을 소진한 것을 안다. 조금이라도 체력을 아끼어라. 적들을 만나면 네 한 몸을 지킬 수 있을 최소한의 힘은 비축해 둬야지.”
소화진을 둘러업다시피 하며 담진은 경신법을 펼쳤다. 그를 업고 뛰는 데도 지친 기색이 하나도 없는 모습에 소화진은 다시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절정이라도 완숙한 경지의 절정은 다르구나. 내력을 다루는 능력도 나랑은 비교조차 할 수가 없을 만큼 뛰어나구나.’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대체 나는 무엇을 익히고 배웠더냐.’
자괴감에 빠져 소화진은 지난날 오만했던 자신을 반성했다. 생도들 사이에서 검의 일인자로 불리며 어지간한 협객행도 손쉽게 성공시켰던 소화진이었지만.
불과 칠 주야 사이에 천무린과 담진의 본모습을 본 것만으로 그동안 쌓아 왔던 자신의 모든 것이 송두리째 무너진 느낌이었다.
‘우물 안 개구리……. 딱 그 꼴이었구나.’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아랫입술을 꽉 깨무는 소화진의 반응에 담진은 그의 속마음을 눈치챘는지 피식 웃었다.
“중원은 넓다.”
“……예?”
“산은 두 손 두 발을 다 더해도 세지 못할 만큼 많고, 강과 바다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고 광활하지.”
“…….”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기에 이리도 장황하게 말하는지.
“그 사이에 속한 칼을 든 무인의 수 또한 모래알만큼 많다. 너무도 많아서 손으로 쥐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알보다 더 많을 정도지.”
경신법을 펼쳐 바람을 꿰뚫고 지나가는 와중에도 담담한 담진의 음성이 울려 퍼진다. 그리고 그 음성은 소화진의 귓가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손바닥에 남은 모래알들은 소수이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무인도 그 소수만 살아남는다. 수천, 수만 명의 무인들 사이에서 무인답게 살아갈 수 있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 소수라는 게…….”
“격전 속에서 얻어지는 경험, 그를 통해 깨우칠 수 있는 그릇. 이 두 가지를 갖고 있는 자만이 살아남지.”
소화진은 그제야 담진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깨달았다.
“스스로에게 관대해져라. 네 나이는 고작 약관을 지났다. 그리고 오늘과 같이 큰 경험을 얻었지. 그러면서 네가 갖고 있는 그릇 역시 더욱 크고 단단해질 게다.”
소화진은 절정의 반열에 들어섰다. 누구보다 피나는 노력을 했고, 그 노력을 끌어올려 줄 천부적인 재능까지 있었으니.
그러나 너무 빨리 그 반열에 들어섰기에 자만심과 오만함에 빠지기 쉬울 터.
담진은 그 점을 꼬집었다.
감정의 기복이 적고 차분한 담진이 새롭게 보이는 소화진이었다.
그런 그가 검을 들 때만큼은 다른 누구도 아닌 검의 귀신이 되어 휘두른다.
검귀와 소검귀라 불리는 두 사람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감사합니다.”
“하하, 알아들었으면 되었다. 그보다 누구더냐?”
“예?”
“누구이기에 네가 부리나케 달려와야 할 정도란 말이냐. 익히 봐 온 무린이라면…….”
천무린, 그가 보여 주는 무위가 나이를 아득히 뛰어넘어 말도 안 되는 수준이라는 것을 잘 아는 담진이었다.
그런 그가 말문이 막혔다.
‘아니다. 그래 봐야 여전히 1학년의 생도일 뿐.’
과하게 생각하면 과하게 여겨질 테고, 부족하게 여기면 부족하게 느껴질 뿐.
제아무리 무공이 뛰어난다 한들, 담진에겐 그저 아껴 줘야 할 제자에 불과했다.
“조금이나마 들은 바가 있으면 말하거라.”
“호량채라고만 들었습니다.”
“……!”
호량채라고.
담진은 하마터면 발을 헛디뎌 볼썽사납게 바닥을 구를 뻔했다.
호량채라니.
“설마 녹림의 호량채를 말하는 게냐?”
“예. 맞습니다만…….”
“……거산도 전위가 있는 건 아니겠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만, 채주라고 부르는 것은 들었습니다.”
그 말에 담진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거산도 전위라니.
악명도 악명이지만, 녹림칠십이채 중에서도 수위를 차지하는 호량채다.
벽력왕이 가장 신임하는 인물이자, 신임만큼이나 절대적인 충성을 보이는 녹림의 차기 군주.
그런 그와 천무린이 싸우고 있다니.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고 한들 너무 어려운 싸움이다. 너무나도.
“……얼른 가자.”
“기다리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악 교관님도 같이 가시면 좋을 텐데요.”
“배 교관이 가서 어련히 잘 끌고 오려고.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야 되지 않겠느냐.”
그 말이 옳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소화진과 달리 담진은 발끝에 내력을 깊이 담았다 터뜨리며 더욱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상황을 보고 도망쳐 나와야겠지만, 그것이 불가할 시엔.’
그리고 그의 눈빛엔 결연한 의지가 서리기 시작했다.
* * *
소림이 자랑하는 절기 중의 절기인 부동명왕보를 펼쳐 낸 천무린이 그 자리에서 히죽 웃었다.
설마 자신의 도격을 피해 낼 줄은 몰랐는지 전위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서 고갤 돌렸다.
“왜? 피해서 억울해? 기껏 내력을 죄다 끌어다가 도강까지 펼쳤는데 말이야. 많이 조급하지? 도강이 내력을 좀 잡아먹어야 말이지.”
“…….”
“근데 나 약속 안 어겼다?”
천무린은 자신이 딛고 있는 땅거죽을 가리켰다. 도강을 피하기 위해 펼친 단 두 걸음.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란 말도 있고, 삼십육계 줄행랑이라는 말도 있듯이.”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는 듯, 온 육체가 고작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바들거렸다.
“피하는 것 역시 싸움의 일환이란 말이야.”
“잔재주 따위!”
대도가 횡으로 휘둘러진다. 도강에 허공이 찢기며 짓쳐들어오자, 천무린의 상체가 기기묘묘하게 꺾이면서 아슬아슬하게 도강을 피해 냈다.
개방의 보법으로, 가히 일절이라 손꼽히는 취팔선보.
낭창낭창하게 꺾이는 허리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동작은 전위의 두 눈을 현혹시켰다.
그러나 대도에 담긴 풍압까지는 피해 내지 못한 듯, 천무린의 신형이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타닥.
“죽을 뻔했네.”
겨우 피해 낸 천무린의 옷자락은 단순한 풍압에도 넝마가 되어 나부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마디를 잊지 않는다.
“후후, 한 걸음.”
그렇다.
전위에게 닿는 순간까지 단 한 걸음 남았을 뿐.
그저 한 걸음이다. 천무린이 말한 그 순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좁혀졌다.
“…….”
분노가 극에 달하면 더 이상 표출되지 않는다. 표출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입 아프게 말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눈앞에 있는 천무린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쾌속하게 도를 뻗었다.
후우웅!
그러나.
타다닥!
천무린의 움직임은 더욱 빨랐다. 바로 코앞에서 전위의 무릎을 밟고 뛰어오르더니 다시 그의 어깨를 경쾌하게 밟고 허공에 떠오른다.
날다람쥐나 다름없는 걸음으로 뛰어오르며 허공을 걷어차는 기행을 선보인다.
그 모습에 전위가 고개를 꺾어 하늘 위를 바라본다.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했더냐?”
“하하,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도망갈 생각 없어.”
천무린의 두 눈이 심유하게 깊어진다. 떠오른 몸을 허공에서 빙글 회전하더니, 그대로 상체를 돌려 전위를 마주 본다.
“그 몸으로 나와 마주하겠다는 것이냐?”
“지겹잖아. 끝을 내야지.”
“허장성세라더니! 대번에 찢어발겨 주마!”
전위의 도강에 먹구름이라도 낀 듯, 녹빛의 강기가 스며들어 간다.
짙은 파멸의 기운을 담은 도강이 천무린을 향해 뻗어 가며 반월형의 강기를 뿜어냈다.
투콰아아아아앙!
그 모습을 바라보던 천무린의 전신에서 다시금 황금빛 휘광이 사방으로 터져 나온다.
모든 마를 멸하는 기운.
항마의 기운이자 파마의 기운.
그리고 이내 모든 사를 멸하는 멸사의 기백이 담긴 웅혼한 불광이 다시금 터져 나왔다.
역근세수경.
무상대능력.
대반야신공.
천무린은 자신의 선천지기 단 한 줌을 제외하고 모조리 끌어내어 소림의 삼대신공을 펼쳤다.
한 줌. 고작 생명력 한 줌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오른손 손바닥 아래 소림이 세워진 이래로 달마와 혜능의 모든 것을 담았다는 기운이 담긴다.
부처의 현신(現身).
천무린의 전신을 감싸는 불광과 황금빛 광휘가 터져 나온다.
그리고 그 모습에 전위의 두 눈은 경악으로 물들어 갔다.
“……!”
부처님의 손바닥.
여래신장.
천무린의 오른손에서 발출된 황금빛 장력이 터져 나오며, 사방을 온통 빛무리로 감쌌다.
그리고 당도한 전위의 반월형 강기와 그대로 충돌했다.
콰아아앙!
후두두둑.
두 기운이 부딪치고 사방으로 터져 나오는 충격파는 그 일대에 재해를 불러왔다.
콰지지직!
콰직!
“으아아아아!”
“사, 살려 줘어어!”
“뒤로 물러나라! 쿠와악!”
충격파로 인해 생긴 피해는 막대했다. 대부분의 산적들이 날아가 혼절했고, 막광야를 비롯한 완숙한 절정의 고수들이 아니고서는 그 찰나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조차 어려웠다.
“겨, 결과는 어떻게……!”
투콰아앙!
막광야와 산적들은 먼지바람이 흩어지고 나서 정면을 응시했고, 그때 눈에 들어온, 땅바닥에 처박힌 한 인영.
천무린이었다.
그 신형이 정확히 전위의 코앞에 떨어졌다.
“하하, 딱 여기에 떨어질 줄은 몰랐는데.”
빙긋 웃는 천무린의 말에 전위는 대답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저 자신의 전신을 강타한 여래신장의 충격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칠 뿐.
“쿠와아아악.”
전위가 처음으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맥없이 쓰러질 것만 같아서.
내력이 바닥나 생명력의 원천이라는 선천지기까지 끌어다 썼다.
호흡조차 가빠졌고, 순식간에 생명력이 꺼져 가는 느낌을 받았다.
흡사 바람이 나부끼는 곳에 놓인 촛불의 신세처럼.
그런 와중에, 천무린은 고개를 꺾었다.
“노, 놈은…….”
전위의 상태를 확인했다. 바로 옆에 있는 전위의 표정과 상태를 보기 위해 오장육부가 끊어질 듯한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쿨럭!”
육중한 덩치를 자랑하던 전위가 왈칵 솟구치는 핏덩어리를 수없이 뱉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몇 번을 쿨럭이다가 전위 역시 하릴없이 쓰러졌다.
쿠웅!
허허, 빌어먹을.
이기긴 했지만, 죽을 정돈 아니었나 보다. 전위가 죽었다면 천무린에게 엄습해 올 저승사자의 금살령이 대번에 떨어졌을 텐데.
아닌 걸 보니.
“더럽게 맷집이 강하네.”
그리고 저 멀리서 다가오는 막광야의 살심 가득한 눈빛이 보였다.
“푸흐흐, 진짜 여기까진가.”
아직 할 일이 많은데.
아직…… 할 게!
서서히 눈이 감기는 천무린의 귓가에 희미하게 들려오는 음성.
“천무리이이이인!”
“무린아아아아아!”
꺼져 가는 천무린의 생명이 다하기 직전에 들려오는 음성.
담진과 소화진이었다.
카가가강!
“비켜라! 이놈들아!”
“죽게 두지 않는다!”
두 사람은 허리춤에서 빼 든 검을 들고 쏜살같이 달려들어 산적들을 베어 넘겼다.
그 모습에 천무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나쁘지 않네.
그러나.
“……네놈!”
막광야가 천무린에게 먼저 당도하는 것을 막아 내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