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5화
제145화
소화진은 한쪽 눈만 겨우 뜬 채 입을 뻐끔거렸다. 눈앞에 악교운도 아닌 담진이 야억을 상대로 종횡무진 휩쓸고 있었다.
카가가강! 카강!
핏빛 검기와 부딪치는 담진의 검기는 비 온 뒤 청명한 하늘을 빼다 박은 듯 푸르게 넘실거렸다.
그 모습에서 소화진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넘실거리는 검기로 무수히 뿌려지는 검영은 야억의 두 자루의 낫을 어지러이 만들면서 속절없이 물러나게 했다.
‘다, 담진 교관님?’
담진이 보여 주는 무위가 자신이 알던 모습과는 너무도 달랐다.
담진 검술 교관.
어떤 연유로 사천무관에서 교관으로 있는지 모르겠지만, 담진보다 강한 교관들은 제법 많았다.
악교운을 비롯한 상당히 많은 교관들이 절정의 고수였고, 뛰어난 무위를 자랑하는 이들도 많았다.
검술 교관은 사실 교관들 중 핵심 자리이기에 사천무관의 검술 교관이라는 직책은 누구라도 탐낼 만했다
그런데 검술 교관인 담진에게 특별한 점이라곤.
펼치는 검술에 군더더기가 없고, 생도들과 후보생들에게 가르치기에 기본기가 아주 탄탄하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무관 생도들은 가끔 담진을 보고 하는 말이 있었다.
‘틀에 박혀서 벗어나지 못하는 교관.’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는 잔소리꾼.’
‘고지식하고 심심한 검술만 펼칠 줄 아는 교관.’
무관 내에서 그런 담진을 뛰어넘는다고 평가받을 생도들이 무수히 많이 배출되었다. 담진에게 더 이상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소화진 역시 담진에게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여기고, 3학년 이후부터는 홀로 검을 수련해 왔다.
그 편이 정진하는 속도가 더 빨랐기에.
“그런데…… 거, 검귀라고.”
소화진의 음성을 들었는지 배단아가 은은한 미소를 띠운다.
“잘 봐 둬. 검이라는 병장기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들 중 하나로 손꼽힌 이유가 뭔지. 괜히 검의 귀신이라는 별호가 붙었을까. 어라? 어쩜! 화진이 너도 검귀구나? 소검귀. 오호호! 이게 무슨 우연이라니!”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연신 웃는 배단아의 두 눈에 절정 고수 야억의 무위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배단아의 말마따나 담진의 검은 정직하고 올곧아 변칙적이고 화려한 잔혈겸의 움직임에 현혹되지 않았다.
중심.
그리고 집중.
검수가 가져야 할 검의 중심을 잡고, 검에 대한 집중력을 최고조로 높인다.
카가가강!
흔들리지 마라.
담진이 검술을 가르치면서 늘 했던 말이다.
현혹되지 마라.
수많은 낫의 잔영이 담진의 사방을 감싼다.
단숨에 담진의 온몸을 난자하여 육편으로 만들 것 같은 붉은 기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진은 자리 잡은 곳에서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검과 하나가 될 뿐.
그리고 그 모습에서 소화진이 바라 마지않던 ‘신검합일’의 경지가 언뜻언뜻 보였다.
검이 곧 내가 되고.
내가 곧 검이 된다.
그리고 그 경지를 보여 준 담진의 무위는.
“저, 절정 고수를 저리 쉽게……?”
소화진 역시 절정의 반열에 들었다. 하지만 자신의 몸 상태가 최상이라 하더라도 야억을 저리 쉽게는 이기지 못했을 터.
서걱!
야억의 오른쪽 어깻죽지가 잘려 나갔다.
푸콰하악!
잘려 나간 어깻죽지에서 핏줄기가 울컥하고 쏟아나왔지만, 그를 마주한 담진에게는 결코 자비가 없었다.
그저.
“끄으아아아아! 내, 내 파아아알!”
“제자들이 뛰어나 스승을 뛰어넘는 것은 더없이 기꺼운 일이지. 허나.”
담진의 검 끝이 야억의 목젖에 닿았다. 검을 든 담진의 표정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아직은 아니다. 내 제자가 다치면 그 누구라도 쫓아가 베어 버릴 터.”
무자비하고.
단호하기 짝이 없는.
비명을 내지르던 야억의 동공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더니 입을 오물거렸다.
“사, 살려……!”
서걱.
툭.
떼구르르르.
야억의 표정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그 누구도 그 표정을 보고 비웃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살기 위해 발버둥친다.
죽고 싶지 않은 마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법.
야억이 보여 주는 생존을 위한 그 어떤 모습도 인간이기에 용납되었다.
하지만,
투두둑.
담진의 검은 더욱 매서웠고 강했다. 야억을 베고서 묻은 피를 허공에 털어 내더니 검집에 도로 넣는다.
그러곤 소화진을 바라본다.
“놈들은 어디에 있느냐?”
중원을 한때 풍미했던 검귀, 담진의 두 눈에 귀화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 * *
은은했던 향기가 점차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한다. 꽃봉오리가 만개하여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면서 소담스러운 매화가 허공을 수놓기 시작했다.
만개한 매화는 아름답지만, 그 향을 따라가다 보면.
서걱, 서걱, 서걱.
“크아아아아!”
“모, 모두 피해!”
“막아라! 막아! 매, 매화에 현혹되지 마!”
뭔가 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곳저곳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서거거걱!
산적들의 몸에 닿는 매화의 꽃잎 하나하나가 검기가 되어 그들의 몸을 마구 난도질한다.
각자 병장기를 들고서 하나둘 영롱한 매화의 꽃잎에 맞서지만.
카가가강!
아름다움과 상반되는 검기의 날카로움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전위의 신형이 천무린을 향해 나아갔다.
콰직!
한 번 휘두르는 대도의 매서운 도기에 매화의 꽃잎들이 나부끼며 그대로 소멸되었다.
그럼에다 불구하고 천무린에게 다가가는 찰나의 순간에,
콰콰카카카!
매화의 꽃잎들이 돌풍이 되어 전위의 앞길을 막아 냈다.
“지금 나를 우롱하는 것이냐?”
“푸흐흐.”
전위의 물음에 천무린이 괴소로 화답했다.
전위의 두 눈이 자신들의 수하들에게로 향한다. 천무린이 보여 주는 무위는 말도 안 되게 놀랍지만,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 것은.
“으그그……. 도, 도망쳐.”
“사, 살고 싶다……!”
“채, 채주우!”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산적들을 훑고 지나간 매화의 검기가 그들에게 끔찍한 공포를 안겨 주었다는 점이다.
“어째서 죽이지 않는 것이냐?”
어째서.
충분히 죽일 수 있으면서도 단 한 명도 살생하지 않는다.
“하늘이 내게 천벌을 내렸거든. 아무도 죽이지 말라고.”
하늘 위를 가리키며 천연덕스럽게 웃는 천무린이었다. 웃는 와중에 그의 입가는 핏물이 고여 그 모습이 기괴하기 짝이 없었지만.
전위는 그 어떤 말과 행동 대신 대도를 들어 올렸다.
우드드득.
전완근의 힘줄이 터져 나올 듯 꿈틀거리더니 여태껏 대도에 담겼던 거력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강한 기운이 뭉치기 시작했다.
어라. 저건 좀 위험한데.
매화만리향의 초식에 나부끼는 꽃잎.
그 꽃잎의 폭풍 속에 갇힌 전위의 온몸이 난도질당하기 시작했다.
서거걱! 서걱!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전위의 대도에 휩싸인 끔찍한 기운.
녹빛의 도강이었다. 초절정 고수만이 낼 수 있는 도강의 기운은 닿는 모든 것을 소멸시킬 듯 그 맹렬한 기세를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금 다가오는 매화의 폭풍 앞에 도강으로 휩싸인 대도를 수직으로 내리쳤다.
퍼석. 퍼석.
산산조각이 나 힘없이 사라지는 매화의 꽃잎들.
그리고 그 충격과 반탄력으로 뒤로 튕겨 나가는 천무린이었다.
타다닥.
“도강이라니, 초절정인 거 티 내냐? 쿨럭, 쿨럭.”
철커덕! 처억.
동시에 천무린의 신형이 중심을 잃고 쓰러지려다가 말고 허리춤에서 풀린 검갑이 땅에 박히며 그의 몸을 지탱하였다.
한계였다. 육체적인 한계. 더 이상 몸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더 이상 끌어낼 내력도 없다.
더없이 절망적인 상황이다.
제아무리 강인한 무신의 정신력을 지녔을지라도, 미약하기 짝이 없는 육신과 뒷받침되지 않는 내력은 천무린에게도 버겁게 느껴졌다.
저벅, 저벅.
고갤 들어 다가오는 전위는 여전히 무덤덤해 보인다.
“후후후.”
천무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머금어진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전위 역시 희미하게 웃었다.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겠지. 더 이상은 쏟아 낼 기력도, 내력도 없을 터.”
“푸흐흐, 어째 나보다도 내 몸 상태를 더 잘 알아?”
“그 정도면 충분했다. 내 너의 이름을 기억해 주마.”
전위는 진심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몇 번이나 소름이 돋았던 자신이 내린 판단에 후회가 없었다.
무관의 생도 하나를 잡기 위해 호량채의 전력을 투입한다?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었다. 전위 역시 전면에 나설 생각일랑 없었다.
그저 의뢰자들에게 산 채로 던져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천무린의 기백과 기질, 마지막으로 그 눈빛을 본 순간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놈은.
절대 살려 둬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판단은 골백번을 생각해도 적절하다고 여겼다. 추후 세상 사람들이 녹림에 손가락질을 한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자신이 하지 않으면……!
그런 상념을 깨우는 천무린의 음성.
“푸흐흐, 하나만 묻자. 대체 날 잡으라고 시킨 놈이 누구냐?”
“당장 죽을 놈이 궁금한 것도 많구나.”
“죽을 놈한테 그 정도도 해 주기 어렵냐. 덩치는 산만 해 가지고 마음은 아주 밴댕이 소갈머리네. 후후후.”
대체.
대체 이 녀석은.
절레절레.
전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깊어지는 생각을 떨쳐 냈다.
그리고 나직이 이야길 꺼낸다.
“편도림, 고색, 명일석. 아마 네놈 때문에 자식들이 불구가 되었다지.”
그 말에 천무린의 두 눈이 커졌다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푸흐흐하하하, 쿨럭, 쿨럭. 그 녀석들의 아비들이라고?”
“그렇다. 제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이란 게 그런 것이지.”
“후후후, 자식도 자식 나름이어야 말이지. 그런 개XX들은 나라면 안 키워. 아, 아니지. 아마 말을 들을 때까지 쥐어패려나. 쿨럭, 쿨럭.”
말 한마디 꺼낼 때마다 울컥하고 나오는 핏덩어리.
그 모습에 전위의 대도가 바로 세워졌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나. 괴롭지 않게 보내 주마.”
“후후후. 괴롭지 않게라고? 이미 너무 괴로운데.”
천무린의 두 눈에 귀기가 흐른다. 그러면서도 줄기차게 뻗어 나오는 녹빛의 도강에 시선을 떼지 못한다.
“조급하구나. 조급해.”
천무린의 시선이 전위의 대도로 향한다.
검이 닿으면 대번에 부러질 터. 제아무리 내력을 끌어모아도 저 도강에는 대항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강이라니. 푸흐흐.”
천무린의 시선은 대도에 고정된 채 미소를 머금는다.
이내 뻗어 오는 전위의 파괴적인 위력이 담긴 도강. 그리고 그 도강이 대번에 천무린의 코앞까지 당도했다.
이번에야말로.
이놈을 두 동강 내어 모든 후환의 씨앗을 삭초제근을 하리라.
그러나.
씨익.
빙긋 웃은 천무린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콰가가강!
대도가 내려찍은 곳의 삼장에 달하는 주변 반경이 박살이 났다. 뿌연 연기와 먼지바람이 온 사방을 가득 채웠으나, 전위의 손아귀에 걸리는 것은 없었다.
“네놈, 두 걸음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그러려고 했는데, 안 되겠더라고. 아휴.”
천무린이 숙인 허리를 꼿꼿이 펴면서 피를 질질 흘려 대는 입가로 미소를 지었다.
“난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거든. 젊잖아. 패기만으로 안 되면 응용을 해야겠지.”
히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