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4화
제144화
서걱!
“허억! 허억!”
두방망이질치는 심장이 당장이라도 목구멍에서 튀어나올 것 같았음에도 불구하고 소화진은 전력으로 경신법을 펼쳤다.
서걱!
청성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세류표를 극성으로 펼치면서도 그의 검 끝이 가는 방향에 있는 나무마다 표시를 새겨 두었다.
소화진의 표정에는 오로지 다급함만이 있을 뿐이었다.
여전히 아른거린다.
천무린의 미소가.
그 녀석의 눈빛이.
그것은 결코 괜찮다는 눈빛이 아니었다. 살려고 발버둥 치는 자의 눈빛은 더더욱 아니었다.
단순한 자신감, 여유로움에 기반한 것 역시 아니다.
그저, 그저.
자신을 불사르겠다는 눈빛과 미소였을 뿐.
그렇기에 더욱 위험하다.
평소보다 두어 배는 더 빨리 순환하는 혈류에 소화진의 눈가에 있는 실핏줄이 툭, 툭 터져 나왔다.
자신의 몸을 전혀 돌보지 않고 내달리고 있었기에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내력이 바닥을 보여 더 이상 끌어올릴 힘이 없어서 전심잠력까지 끌어다 쓸 때쯤.
저 멀리 섬서무관의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돼, 됐……!’
“푸흐흐, 내 이럴 줄 알았지.”
“그것 봐라. 내가 분명 이리될 줄 알았다고 하지 않았느냐!”
“낄낄, 저놈의 눈동자 봐라. 아주 여기까지 달려오느라 힘을 다 썼구먼! 아주 말라비틀어져서는.”
맥이 탁 풀리게 만드는 목소리.
다름 아닌 호량채의 일원이자 잔혈겸이라 불리는, 턱이 길고 멀대 같이 큰 키를 자랑하는 야억과 산적들이었다.
“쥐새끼, 부채주가 똑똑하긴 하구나. 길목이나 지키고 있으라기에 자존심이 좀 상했는데 말이야. 무관에서 나올 애송이들이나 처리하려고 기다렸더니 이게 웬 떡이냐. 낄낄낄.”
괴소를 흘리는 야억과 산적들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소화진을 바라보며 연신 웃음을 흘렸다.
“큭큭큭.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다만, 같잖은 희망 따윈 버리도록 하여라. 애송아.”
“……으득.”
소화진은 눈앞에 뻔히 섬서무관을 보고도 구원의 손길을 요청하지 못하는 상황에 크나큰 분노가 일었다. 온몸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를 정도로 가열차게 몸을 움직였다가 서서히 멈춘 소화진의 몸 군데군데에서는 끔찍한 통증이 밀려왔다.
모든 것을 뒤로하고 오직 섬서무관에 도움을 요청하려고 미친 듯이 달려왔거늘.
“비켜라……!”
본래라면 눈앞에 있는 잔혈겸과 손속을 나누어 볼 만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시간을 뺏길 순 없는 노릇.
“푸흐흐흐, 지금 저놈이 내게 뭐라는 것이냐.”
“저놈이 아주 돌아 버린 것 같습니다!”
“제가 놈의 목을 따 오겠습니다!”
야억과 산적들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연신 웃고 있었다.
지쳐 보이는 사천무관의 애송이. 온몸이 땀에 절어 마치 물에 젖은 생쥐 꼴 같은 데다 단내가 날 만큼 숨을 헐떡이는 녀석의 모습은 산적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여유와 즐거움을 안겨 주었다.
“허허, 괜찮다. 괜찮아. 한 놈이긴 하지만, 애송이들보단 나아 보이는 것이 첫 시작치곤 나쁘지 않을 게야.”
“에이! 야억 님께서 어찌 직접 손을 쓰시려 하십니까!”
“맞습니다.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것만큼 낭비는 없지요.”
양쪽에서 떠드는 아부에 기분이 좋은지 히죽 웃는 야억이었다. 이 맛이다. 호량채에 들어선 뒤부터 쉬이 만끽할 수 없었던 기분.
“오냐, 내 너희들에게 기회를 주마. 살려서 데려가야 하니 팔다리 하나씩만 자르도록!”
“예!”
“옙!”
그 말과 함께 산적 서넛이 히죽 웃으며 소화진을 바라봤다.
“아프지 않게 해 줄 테니 반항일랑 말거라.”
“크흐흐.”
한 걸음씩 좁혀 오는 산적들의 두 눈에 긴장 따윈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서걱.
그들의 패착이었다.
푸콰하아아아!
어느새, 뽑혀 나온 소화진의 검 끝에서 희미하게나마 묵빛의 검기가 어렸다.
검에는 자비가 없었고, 청성제일의 기재인 소화진의 검은 산적들 중 한 명의 머리통을 그대로 베어 냈다.
떼구르르르.
구르는 산적의 머리통에는 여전히 여유롭던 표정이 가득했다. 자신이 어떻게 해서 죽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표정.
털썩.
뒤이어 쓰러지는 목 없는 산적의 몸뚱어리가 기우뚱하며 바닥에 엎어졌다.
“어, 어……?”
“이, 이게 무슨.”
순간적으로 굳어 버린 산적들은 제대로 된 말 한마디도 꺼내질 못했다.
그리고 다가오는 소화진의 검 끝을 따라 눈동자를 굴리는 것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동작이었다.
서걱! 서걱!
떼구르르르.
“비키라고 했을 텐데.”
그러면서 소화진의 눈앞이 순간 핑 하고 돌았다. 무리하게 끌어다 쓴 내력으로 청운적하검을 8성 이상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절대 그럴 수 없었다.
‘……나, 나는 구하러 가야…….’
휘청.
휘청대는 두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며 버티는 소화진의 앞에 드리운 그림자.
“제법이구나. 정말로 의외야. 고작 무관의 애송이가 그렇게 자비 없이 검을 휘두르다니.”
야억의 여유롭던 표정은 어느새 긴장감 어린 표정으로 바뀐 채 두 손에 두 자루의 낫을 들고 있었다.
“허나, 나는 다를 것이다.”
처억.
“내가 바로 잔혈겸 야억이니라.”
소화진은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정신을 바로잡았다.
“……비켜라.”
후웅!
세류표를 펼쳐 야억의 바로 코앞까지 당도한 소화진의 묵빛 검기가 그대로 내찔러졌다.
단숨에 숨통을 끊어 놓고 섬서무관에 당도하리라!
그런데.
채앵!
소화진의 검을 한 자루의 낫으로 내리치면서 다른 한 자루로 그대로 그의 가슴팍을 베었다.
그 모습에 황급히 몸을 비틀었으나,
피잇!
핏방울이 낫 끝에 걸려 허공을 수놓았다.
“나를 두고 다른 생각을 하다니. 후후후.”
야억은 소화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보인다는 듯 묘한 미소를 띠었다.
“그놈을 구하러 가고 싶은가 보구나. 하지만 이를 어쩔 테냐. 너는 그놈을 구할 수도, 여기서 살아 나갈 수도 없다.”
잔혈겸 야억의 한 쌍의 낫에 핏빛 검기가 뿜어지며 스멀스멀 불길한 기운을 내뿜었다.
“희망 따윈 아예 갖지 말거라.”
‘저, 절정급의 고수!’
소화진은 그 모습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고민은 짧고, 행동은 빠르게.
‘팔을 하나 내주더라도 섬서무관을 향해 나아간다.’
한시가 급한 소화진이었다.
그리고 땅을 박차며 야억에게 청운적하검을 있는 힘껏 끌어올려 부딪치려는 순간.
콰앙!
“커허윽!”
고통 어린 비명과 동시에 야억이 뒤로 튕겨 날아갔다.
“이 녀석아, 졸업도 안 한 놈이 동귀어진을 하려고 들다니. 어디서 그런 못된 짓을 배운 게냐!”
소화진의 눈앞에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후아아……. 나 따라오다가 죽을 뻔했어요. 담진 교관님! 아, 아니지. 밖에선 담진 교관님이 아니라…….”
배단아가 거친 숨을 몰아쉬다가 뭔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검귀(劍鬼), 담진 대협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 * *
“닿기까지 다섯 걸음. 후후후.”
천무린의 말에 전위의 두 눈이 물러난 그의 걸음을 센다.
한 걸음씩 좁혀 온다.
그리고 먼저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한 점의 빛이 되어 전위를 향해 쏘아 왔다.
흡사 노련한 궁사가 쏜 각궁의 매섭기 짝이 없는 화살처럼.
피이잉!
섬전처럼 날아든 천무린의 검 끝이 찬란하게 빛났고, 전위는 천무린을 향해 그대로 대도를 올려 쳤다.
후우웅! 콰아앙!
점창의 사일검법, 후예사일의 초식으로 한 점의 빛줄기가 되었던 천무린의 신형이 피를 흩뿌리며 뒤로 물러났다.
투다다닷, 투닥.
물러난 그의 걸음은 고작 다섯 걸음이었다.
그 모습에 전위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
‘……분명 같은 힘을 주었다. 그런데 어찌……!’
“네 걸음 남았어. 네 걸음.”
전위의 복잡해진 머릿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무린이 왈칵 코피를 쏟으며 씨익 웃었다.
“무섭지?”
그 모습에 전위의 가슴속에서는 처음으로 뜨거운 분노가 용암처럼 치솟았다.
“그럴 리가 없다! 싸우면서 성장한다고!”
그렇다. 녀석은 나를 두고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다.
감히.
감히이!
“이 나를 두고 네 녀석이 성장을 해 간다고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수가 없어!”
전위의 표정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대도의 손잡이를 부서져라 꽉 잡았다.
그리고.
전위가 땅거죽을 터뜨리며 비틀거리는 천무린을 향해 쇄도했다.
처억.
대도로 올려 치면 대번에 그를 한 줌의 먼지로 만들 수 있을 터.
그 모습에 천무린이 씨익 웃더니.
“후우우…….”
중단세를 취한 채 검 끝을 내리며 바라본다.
천하삼십육검(天河三十六劍).
천하도도(天河濤濤).
만천하를 아우르는 모든 방위를 검 한 자루로 나의 것으로 만든다.
콰가가가강!
전위의 올려 치는 대도의 힘을 일격에 막아 낼 순 없었다.
막아 낼 리 없었다. 단 일격으로는.
콰앙!
이격. 검 끝이 휘어질듯 비틀렸다.
콰앙!
삼격. 대도의 속도가 아주 미세하게 느려진다.
콰가강!
사격.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 대도의 양면을 후려친다.
그렇게 서른다섯 번의 검격이 대도를 후려쳤다.
따다다다당!
그리고 마지막 삼십육격.
대도에 담긴 도기가 미약하게나마 희미해졌다.
콰앙!
그 삼십육격을 끝으로, 마주한 천무린은 여전히 남아 있는 힘을 분산시키지 못한 채 네 걸음을 물러나야만 했다.
“쿨럭, 쿨럭. 푸화아아.”
넝마가 된 옷과 사방에 흩뿌려진 피로 인해 숨을 헐떡이며 서 있는 천무린의 모습은 그야말로 기괴하다 못해 무서울 지경이었다.
“키키킥. 쿨럭, 쿨럭.”
연신 피가래를 내뱉는 천무린을 바라본 막광야는 자신의 두 눈을 몇 번이나 의심해야 했다.
저게 정녕 가능한 일인가.
쓰러질듯 쓰러지지 않는다.
다른 누구도 아닌 거산도 전위를 마주하여 저렇게 손속을 나누면서도 말이다.
“도, 도대체……!”
“이제 세 걸음.”
고작 천무린이 물러난 걸음은 네 걸음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세 걸음이란다.
막광야는 일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제야 왜 전위가 천무린을 마주 보며 그렇게 흥분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렇다. 놈은…… 놈은! 여기서 반드시 죽여야만 한다.’
혹여 전위가 막더라도 후환을 반드시 제거하리라 마음먹는 막광야였다.
“자꾸 안 오면 내가 먼저 간다?”
산적들의 주춤하는 기색이 있든 말든 천무린은 시종일관 같은 태도였다.
처억.
검 끝이 천천히 올라가며 그 끝에서부터 은은한 향이 주변을 감쌌다.
그리고 불그스름하고 영롱한 기운이 천무린의 검에 감돌았다.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
매화만리향(梅花萬里香).
사방을 감싸는 매화의 향이 코끝을 간질이다 못해 점차 꽃잎이 피어오른다.
“세 걸음이야. 세 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