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2화
제142화
지금 누구의 앞이라고 이렇게 잡담을 나누고 있단 말인가.
막광야는 이보다 더 황당한 경우를 겪어 본 적이 없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들이 지금 누구 앞에서 쫑알쫑알 떠들고 있나?
그런데.
“아, 열 받네. 그러니까 산적 새끼들이 지금 나한테 천라지망……. 아니, 어설프게 포위를 한 거야? 나 하나 조져 보려고?”
짜증 난다는 듯 신경질을 내는 무관 생도의 모습에 기가 막혀 할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막광야뿐 아니라 다른 산적들도 공통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너무 무서워서 정신이 어떻게 된 것은 아닐까.
하지만 한 사람만은 달리 생각한 듯하다.
“후흐흐하하하, 정말 대단하이. 대단해. 과연 타고났구나. 타고났어.”
전위만은 천무린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그 모든 행동이 기꺼운 듯 광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그는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며 태평스러운 천무린의 행동에 미소를 띨 뿐이었다.
대체 왜.
무슨 연유로.
저렇게 버릇없이 구는 꼬맹이들을 좋게 봐준단 말인가.
막광야의 속에서 천불이 날 때, 천무린은 한 걸음 나서며 입을 열었다.
“저 양반 때문에 쉽게는 못 가겠는걸.”
전위를 바라보는 천무린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 모습에 소화진이 크게 당황한다.
“무, 무슨 소리냐? 아까 뭔가 수가 있다고 하지 않았더냐?”
“만나기 전까지는 수가 있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보통이 아니네.”
태연자약. 누가 봐도 천하태평인 천무린이지만, 전위를 바라보고는 처음으로 마음을 내려놨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인정했다.
“저기, 산적 두목.”
전위를 바라보며 입을 여는 천무린의 모습에 전위가 광소를 멈추고 마주 바라봤다.
“어차피 목표는 나인 거 같은데, 얘는 보내지.”
그 말에 막광야는 순간 움찔거렸다. 이 정도면 도를 넘어섰다.
분명 그렇다고 여겼다. 자신이 아는 전위라면 일말의 자비도 없는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 앞에서 저렇게 천연덕스럽게 이야기를 하다니.
아마 곱게는 죽지 못할…….
“후흐흐하하! 내가 왜 그래야 되느냐. 둘 다 죽이면 그만인 것을. 나는 의뢰를 받았느니라. 또한, 군주께서 너를 잡아 오라고 하셨느니라.”
“의뢰라, 산적들이 의뢰를 받았나. 나 참, 창피하지도 않나 봐. 그리고 왜 그래야 되냐고? 안 그럼 내가 제대로 안 놀아 줄 테니까. 딱 봐도 심심해 죽겠다는 표정인데.”
차, 창피?
노, 놀아 줘? 누가?
떠억.
전위와 천무린, 단 두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이가 놀라 턱이 빠진 듯 입이 절로 벌어졌다.
뭐, 뭔데? 이 상황 대체 뭐냐고?
이런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동네 아저씨와 아들 친구의 대화라고 여겼을 터.
그 말에 막광야와 소화진이 막 뭐라고 소리치려는 찰나.
“크하하하하하핫!”
천지를 진동하는 앙천광소가 터져 나왔다. 전위가 갖고 있는 내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천무린은 어깨를 으쓱하며 기다렸다. 전위의 대답을.
“오냐. 보내 주마.”
그 말에 막광야가 화들짝 놀라며 크게 소리쳤다.
“채주!”
“보내 주도록 해라.”
전위가 웃음기를 머금고 한마디 꺼냈다. 그런데도 막광야와 산적들은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미적거리자, 전위의 전신에서 소름 돋는 기운이 폭사하였다.
콰콰콰콰콰아아아!
광폭한 기운이 사방을 짓누르기 시작하며 당장이라도 전신을 난도질할 것 같은 거친 기운이 사방으로 터져 나왔다. 질주하는 그 기운의 영향권 안에 있는 소화진 역시 전신전력으로 내력을 끌어올려 대항하는 것만이 당장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커, 커억. 무슨 기우, 운이.”
막광야 역시 자신을 향해 뻗어 오는 기운에 두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리며 몇 걸음이나 물러나야 했다.
“분명 보내 주라 했거늘 내 말에 토를 다는 것이냐, 광야야.”
귀를 파고드는 음성이 묵직하다 못해 온몸을 마구 헤집는 듯했다. 그리고 그 결과,
“쿠, 쿨럭. 아, 아닙니다. 채주우…….”
입가를 타고 흐르는 핏물. 막광야는 저도 모르게 허리가 숙어지려는 것을 겨우겨우 버텼다. 막광야가 그럴진대 주변에 있던 산적들은 어떠할까.
대번에 사방에서 피를 토하며 그 기운에 속절없이 하나둘씩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채, 채주!”
“우, 우릴 모두 죽이실 셈입니까아.”
“채주우우!”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전위의 분노는 쉽사리 누그러들지 않았다. 그 압력이 점차 강해지자, 소화진을 향한 기운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화진 역시 내부가 진탕됨을 느끼며 현기증까지 일어났다.
그리고 그때.
저벅, 저벅.
한 인영이 소화진의 앞에 서자, 오금을 저리게 만들던 기운이 언제 그랬냐는 듯 대번에 사라졌다. 내부를 진탕시키던 기운이 일시에 해소되었다.
“거기 애들 그만 괴롭히고 적당히 하고 보내지? 재미 들린 것 같은데.”
그 말에 요동치던 기운이 연기가 바람에 날리듯 깨끗하게 사라진다.
모골을 송연하게 만든 그 기운이 일시에 사라진 것도 사라진 것이지만, 광폭한 기운 앞에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는 천무린을 보면서 그곳에 자리한 산적들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차 바쁜 건 마찬가지니까. 어차피 한바탕해야 하잖아. 몸풀기도 그만하면 충분하고.”
전위의 표정이 마치 서리가 내려앉은 듯 차갑게 굳어졌다.
“내 너를 높이 평가하노라.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허나, 그렇다고 한들 그 끝을 모르는 방자함은 고쳐 줄 필요가 있구나.”
“고쳐? 뭘? 어디 남의 귀한 아들을 두고 고친다 만다 하는 거야. 내 부모님도 못 고친 걸 어떻게 처음 본 양반이 고치겠다는 거야!”
히죽 웃는 천무린이 양손을 펼치면서 턱도 안 되는 소리라는 둥 손사래를 친다.
도가 지나치네. 나 참.
그런 말에 전위는 더 이상 웃음을 머금지 않았다.
“아해는 보내라.”
“에, 안 그래도 보낼 거였어. 어이, 선배.”
걱정하지 말라고 전위를 바라보던 천무린이 고갤 돌려 소화진을 바라봤다. 그 모습이 너무도 태평스러워 현 상황이 다소 비현실처럼 느껴졌지만.
바들바들.
소화진의 오금과 양팔이 그 끝을 모르고 몹시 떨리고 있었다.
방금까지 사방을 짓누르던 전위의 기운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눈앞의 이 녀석은 자신에게 혼자 두고 떠나라고 한다. 아니, 도망가라고.
“아, 아니. 나는…….”
“됐어. 어차피 별 도움도 안 돼. 얼른 가.”
“……이미 약조하지 않았더냐? 내가 남아서…….”
말을 하다가 소화진은 더 이상 이어 갈 수가 없었다.
더없이 무력했다.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자신도 안다. 그러나 눈앞에서 천무린이 던진 한마디가 가슴에 비수로 꽂혔다.
그가 무슨 의도로 꺼낸 이야기건 지금의 소화진은 여기 있어 봐야 그저 개죽음만 당할 뿐이다.
“후후, 여기서 도움이 안 된다고 한 것이지 이후에도 도움이 되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선배, 지금 할 수 있는 걸 해. 그거면 된 거야.”
아주 잠깐이지만, 침묵한 소화진이었다. 천무린의 미소는 더없이 밝았고, 그 어느 때보다 빛나고 있었다.
그랬기에 소화진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
여기에서 녀석의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니고, 할 일은 따로 있었다.
“알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마.”
허리를 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산적들이 어느새 포위망을 좁혀 빠져나갈 구멍 따윈 결코 없다는 듯 위협적인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작별 인사는 끝냈는가?”
“빨리 보내기나 하자고. 혹여 꽁무니 붙일 생각은 하지도 말고. 내 기감을 속이기 쉽지 않거든.”
누가 봐도 명백히 불리한 상황. 그런데 되레 협박을 한다.
대체 이 기백과 자신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위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턱짓으로 막광야에게 지시했다.
질끈.
아랫입술을 짓씹던 막광야는 소화진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산적들에게 손짓했다.
“보내 줘라!”
스스슥.
못마땅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어쩌겠는가. 무려 호량채의 채주인 전위의 명령이었다. 그리고 한 번 더 항명했다가는 더 이상 이승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산적들도 본능적으로 느꼈다.
저벅, 저벅.
대하(大河)가 쩍 하고 갈라지듯 산적들의 무리가 길을 터 주자, 그사이를 소화진이 걸었다. 제아무리 길이 열렸다고 한들 살기까지 감추진 못하는 법.
저릿, 저릿.
온몸을 파고드는 살기 속에 소화진은 굳어 가는 두 다리를 어떻게 해서든 움직여야 했다.
저벅, 저벅.
뜨겁고, 강렬하며, 호흡을 자꾸만 흐트러지게 만드는 살기의 향연에 아득해져만 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아야만 했다.
‘이 걸음을 멈추면……. 나는 죽는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거리가 마지막에 자리 잡고 있던 산적들에게서 벗어나자, 산적들은 다시금 포위망을 형성했다. 오롯이 천무린이라는 단 한 사람을 위해.
그리고 그 사이에 보이는 천무린의 두 눈과 마주친 소화진.
미소를 띤 천무린의 표정을 본 소화진은 저도 모르게 울컥하는 마음이 일어나며 뒤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터질 만큼, 아니 심장이 터져도 상관없다는 듯 내력을 끌어올려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저 아해가 지원군을 끌고 와 줄 것 같으냐?”
“뭐, 그래 주면 고맙고.”
“아서라. 그런 희망적인 생각을 품지 말아라.”
전위의 말에 천무린이 그저 웃을 따름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거물급을 만나 버렸네.”
사파, 그것도 녹림칠십이채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산채의 채주임은 보지 않아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쌍용검 파평?
혈마공을 익힌 제갈벽?
소검귀 소화진?
모두를 갖다 놓아도 눈앞에 있는 이자 앞에서는 상대가 되지 않을 터였다.
성큼성큼.
천무린보다 최소 일 척은 더 크다.
쿠궁, 쿠궁.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약동하는 두 팔과 전신의 근육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걸음으로 천무린을 향해 뻗어 오는 기운이 숨 막힐 듯 천무린을 옥죄었다.
“네놈이 원하는 대로 해 주었다. 이제 원 없이 놀아 보자꾸나. 원한다면 선공을 양보하도록 하지.”
확실하다.
이 산채의 채주는 지금의 천무린보다 적어도 반수는 위였다.
절정급 고수보다 한 단계 높다는, 초절정이자 화경에 근접한 경지.
그 경지에 도달한 전위의 기세는 천무린의 몸을 저릿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말이야.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천무린의 입가에 슬며시 피어나는 미소. 그것은 분명 즐거운 웃음이었다.
“난 항상 편하게 살고 싶었거든. 근데 세상이 도와주질 않더라고.”
전생에 이와 같은 순간을 어디 한두 번 겪어 봤겠는가.
아니.
허구한 날 혼자 동떨어져 수십, 수백 명을 도륙하면서 자신의 생사를 염려해야 했던 순간이 양 손가락을 다 써도 모자랄 정도로 많았다.
“근데, 묘하게 반가워.”
뭐가 반갑냐고?
지금 이 순간이.
그리고 그 순간, 호량채의 채주이자 거산도 쪼갠다는 도객으로 이름을 널리 알렸던 거산도(巨山刀) 전위의 대도가 내리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