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1화
제141화
“……제갈세가에 다녀오너라.”
섬서무관과 본격적으로 비무를 치르기 전에 악교운에게 들은 한마디였다.
본디 천무린이 이곳까지 발걸음을 하려 했던 이유가 바로 제갈세가 때문이었다. 아마 제갈벽이 사라진 뒤 가장 어수선한 문파를 꼽으라면 당연히 제갈세가이기에.
또한, 가장 의심스러울 만했다.
그래서.
보통 천무린이었다면.
“제가 왜요! 아오, 여기까지 오는 것도 귀찮았는데 그냥 아무나 보내요. 내가 또 그런 쓸데없는 걸음까지 왜 해야 되냐고요!”
하고 한바탕 난리를 쳐 댔겠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낙양의 쥐소굴에서 연통 하나가 없다. 섬서에 내가 왔다는 것쯤은 이미 녀석들의 정보력이라면 진즉에 파악하고 연락이 왔어야 할 것을.’
그들이 작심하고 천무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이상, 무언가 일이 생겼다는 것을 뜻할 터였다.
‘녀석들에게 내렸던 명령은 제갈세가의 제갈벽, 그 주변을 샅샅이 탐색하라고 한 것과 정파 무림에 숨겨진 마교의 간자를 찾으라는 것이었거늘.’
만약 단서를 찾다가 그들에게 발각된 거라면?
마교라면 쥐소굴 정도는 하루아침에 중원 무림에서 감쪽같이 지워 버릴 수 있을 터.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일 터였다.
그리하여 천무린은 곧바로 제갈세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그 뒤를 따르는 소화진으로서는 죽을 맛이겠지만.
* * *
아무튼.
그렇게 시작된 여정이 금세 멈춰 버렸다.
“허억, 허억. 뭐 하는 건데?”
구슬땀을 흘리면서 그저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버거워하는 소화진 앞에서 천무린은 계속해서 기감을 퍼뜨렸다.
“이것들 봐라. 꽤 오랜 시간 준비를 했나 보네.”
웃음기를 쫙 뺀 천무린의 미간이 점점 좁혀졌다. 숫자가 제법 많았다.
“열, 스물, 오십…… 백여 명. 환영 인사치고는 제법 성대한걸?”
“당최 무슨 소릴 하는 게냐?”
“무슨 소리긴. 지금 우리 포위됐어.”
……포위라고.
그럴 리가 있나.
그리고 그런 얘기를 뭐 그리 담담하게 하는 건데.
숨을 헐떡이느라 정신을 못 차리던 소화진이 천무린의 나직한 말에 숙였던 허리를 폈다.
그 역시 절정의 고수답게 호흡을 금세 가다듬고 내력을 끌어올렸다.
파아아악!
소화진의 기운이 사방으로 퍼지면서 기감을 퍼뜨렸지만.
……걸리는 게 없었다.
힐끔.
긴 시간을 함께하지 않았더라도 천무린이 이만큼 진지한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봤기에 소화진은 다시금 기감을 퍼뜨리는 일에 집중했다.
그러나.
걸리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무슨 포위…….”
천무린에게 한소리를 하려는 찰나,
피잇.
기감에 걸리는 미약한 기운.
소화진의 표정이 굳어지며 다시 한번 기감을 퍼뜨리면서 집중하자, 그제야 느껴진다.
다가오고 있는 수많은 기운이.
스으읏. 스슷.
그것도 살기충천(殺氣衝天)한 기운으로 가득한 이들로 주변을 둘러싼 채 아주 느릿하게, 천무린의 말이 아니었다면 전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숨죽인 채 다가오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못해도…… 거리가 오백 장은 족히 될 터인데.”
이렇게나 수많은 인원이 자신들을 향해 오고 있다고는 하지만, 저 먼 거리에서 다가오는 기운을 이렇게나 빨리 읽어 낸다고?
“……도, 도대체 넌?”
어떻게 된 놈이기에 소화진이 기감을 퍼뜨려도 당최 잡히지 않던 것을 천무린은 진작부터 느꼈단 말인가.
“정신 차려라. 그따위 일에 감탄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냐. 작심한 놈들이다.”
퍼뜩.
그 말에 소화진은 정신을 차렸다. 그러다가 기감에 걸리는 인원을 생각하니 절로 손아귀가 꽉 쥐어지고 뒷목이 뻣뻣하게 굳었다.
“아니, 협객행을 몇 번이나 했다는 인간이 뭐 고작 이따위로 놀라서 몸이 굳어?”
한심하다는 얼굴로 내뱉는 천무린의 말에 소화진의 미간이 좁아졌다.
“협객행이랑 지금이랑 같으냐. 최소 일류급으로 수십 명 그리고…….”
소화진이 뻣뻣하게 굳을 수밖에 없는 이유.
“나와 맞수 혹은 나보다 고수인 인물이 최소 열.”
이만큼이나 강력한 전력을 갖고 있는 단체는 중원 무림에서도 얼마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단 두 사람을 위해 이만한 전력을 파견할 수 있는 단체가 없었다.
그만큼 단체에 잉여 인력이 많다는 뜻이거나, 원체 강한 문파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니까.
정파로 따지자면, 구파일방은 되어야 할 정도.
그런데 그런 전력이.
“정말 우리를 노리고 온 것이냐?”
쯔쯧.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서서히 조여 오겠냐? 대가리에 든 것도 없는 거 같은데, 그냥 깨부숴 버릴까 보다. 딱 봐도 우리가 나오기만을 기다렸구먼. 푸휴, 선배란 녀석이 그것도 몰라.”
살벌한 말을 저리하면서도 혀를 차는 천무린의 태평한 모습에 소화진은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분명 자신보다 먼저 이 사실을 알아챘다면서 저렇게 태연자약할 수 있다니.
“뭔가 수가 있는 것이냐?”
그렇지 않고서야 저리 여유 만만할 수가 없을 터.
그러나.
“뭔 소리야?”
되레 무슨 소리냐는 듯 백치 같은 표정을 짓는 천무린을 보고는 절로 고개를 떨구는 소화진이었다.
항시 기대는 벗어나기 마련이다.
그렇구나.
소화진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냥 아무 생각이 없는 거였어.
저벅, 저벅.
소화진이 혼자 구시렁거리고 있을 즈음, 천무린의 날카로운 시선이 사방 곳곳을 훑었다.
천라지망? 제법 많은 고수이긴 하다만, 어설프다.
이미 수십 년을 살면서 전장에서 홀로서기를 했던 천무린이 아니던가.
천마신교의 교주이자 천마이자 무신이기 이전에 수많은 전장에서 수도 없이 전투를 치렀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감각적으로 돌파구를 찾는 일은 천무린의 독보적인 능력이었다.
다만.
‘혼자 올 걸 그랬나.’
옆에 걸림돌이 있다.
전생에는 제법 잘 따르는 자들은 있었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무위에 반해 광신도처럼 달라붙는 놈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멍청하지만 도망이라는 선택지는 없다는 듯 돌파구를 찾으려는 다급한 표정을 짓는 녀석이 있다.
‘나도 다 됐군. 이 녀석을 어떻게든 살려 나가겠다고 마음먹고 있는 거 보니.’
아이고, 저승사자야.
네놈 말대로 내가 회개라도 하나 보다!
아니면, 소림의 무공을 익혀서 부처의 자비심이라도 가지게 된 건가.
그 무엇보다 작금의 이 사태는 천무린에게도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혼자라면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는다.
하지만…….
“걱정 마라. 네 녀석의 짐이 되진 않을 거다.”
응? 이 녀석이 뭘 안다고.
“우리가 어떻게 인연을 쌓아 왔건 그게 악연이든 우연이든 중요치 않다. 지금은 사천무관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이 자리에 있다는 게 중요하지.”
처억.
“혹여 내가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놓고 가거라. 이래 봬도 네 선배로 후배의 앞길에 장애물이 될 생각일랑 없으니 나를 버리고…….”
빠각!
소화진의 뒤통수에 작렬하는 매서운 손길.
“염병하네. 원래 그런 인간 아니면서 괜히 멋있는 척은.”
휘청이는 소화진에게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라며 일축시킨 천무린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감돌았다가 사라졌다.
“잔말 말고 잘 따라와.”
* * *
호량채의 1인자이자 채주 자리에 있는 전위, 그다음 자리인 막광야는 부채주로 지금 이 상황이 당최 이해가 되질 않았다.
고작 두 명이란다. 그것도 무관의 새파랗게 어린 꼬맹이 두 명.
호량채의 부채주이지만, 중원 무림에서는 혈대부(血大斧)라고 불리며 사해에 명성이 드높은 막광야였다. 물론 멸마신군이라는 뛰어난 후기지수가 있다고 듣긴 했지만, 그래 봐야 무관의 애송이일 뿐.
그런 두 명을 잡겠다고 호량채의 전력이 투입된다는 게 터무니없다고 느껴질 따름이었다.
산중호걸(山中豪傑).
늠름한 기상과 기백으로 산중의 왕이라고 떳떳이 밝히는 녹림채가 아닌가.
그 녹림채 중에서도 호량채라고 하면 중원 무림의 양민들은 두려워 오금이 저릴 터였다. 그만큼 악명이 자자했기 때문에 감히 저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이름이었다.
막광야의 그런 생각처럼 백여 명에 가까운 산적들 역시 표정이 좋지 않았다. 개방은 거지가 근본이라면, 녹림은 산적이 근본이다. 즉, 약탈과 납치, 협박을 밥 먹듯이 하고 살았지만, 그래도 창피함은 알고 있었다.
차라리 구파일방이랑 시원하게 맞짱이라도 뜬다면.
혹 싸움에 무참히 패배하더라도 이렇게 창피하진 않을 텐데.
그런 호량채의 산적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위는 천천히 나아갈 뿐이었다. 그런 전위에게 여태 불평 한 번 하지 않았던 막광야가 입을 오물거리며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 찰나.
“정지.”
전위의 발걸음이 뚝 멈추며 손을 들었다. 상당히 신중해 보이는 표정에서 막광야는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찡그렸다.
“아니, 채주. 애새끼 둘 잡는데 뭐 그리 신중하쇼. 그냥 잡으면 될 일이지. 나 어디 가서 쪽팔려 말도 못 하겄네.”
그 말에 전위가 나직이 말한다.
“……녀석들은 이미 우리가 온 것을 알고 있다.”
“예? 그게 무슨 헛소리…….”
도망가지 못하게 아주 서서히, 정말 서서히 좁혀 왔기에 녀석들은 눈치채지도 못했을 터였다. 게다가 지금 거리는 무려 오백 장 넘게 떨어져 있다.
오백 장. 사실 오백 장이면 제법 먼 거리다. 그 거리에서 추격자의 기운을 읽는다고.
“오히려 이쪽으로 오는군. 후후, 멸마신군이라는 명성이 허언이 아닌 모양이야.”
전위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이미 들킨 이상, 이 이상의 포위망은 의미가 없다고 여겼는지 전위는 광소를 이어 갔다.
“흐하하하하하하! 오너라!”
천지를 떨어 울리는 광소가 터져 나오며 산적들의 고막을 때렸다.
“으, 으아아!”
“귀, 귀 막아! 귀를!”
“고막이, 고막이 터져 나갈 거 같아.”
사해를 떨어 울리는 전위의 웃음은 절정의 고수가 된 지 한참 지난 막광야마저 움찔거리게 만들 정도였다.
그리고.
이토록 유쾌하게, 또 미친 듯이 광소를 터뜨리는 전위의 모습을 보는 것은 아주 오래간만이었다.
‘대체 왜?’
다가오는 녀석들이 뭐길래 전위가 저리 호승심을 불태운단 말인가.
그 의문은 금방 해소되었다.
처억, 척.
전위와 막광야 그리고 호량채 산적들이 즐비한 한복판에 등장한 단 두 사람. 경신법을 멈춘 두 사람의 표정은 상반되었다.
“허억, 허억. 미, 미친놈이. 정말로 적진 한복판에 들어온다고? 도망가도 모자란 지경에?”
“뭐야, 쫄았어? 아오, 뭐 아까는 후배한테 쪽팔리지 않겠다고 염병을 떨더니.”
“그, 그거야 상황이 그렇게 된다고 하면……!”
“됐다. 됐어. 에휴, 내가 뭘 바라냐?”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의 반응에 막광야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대체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