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0화
제140화
“이게 정녕…….”
악교운은 더 이상 자신이 크게 놀랄 일은 없을 줄 알았다.
산동악가라는 명문 세가의 자제로 태어나 지독히도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살면서 온갖 산전수전 다 겪은 악교운인 데다 사천무관 교관으로 있으면서 중원 무림을 유랑하며 갈고닦은 지혜와 경험, 그리고 가진 지식을 바탕으로 수많은 후보생들과 생도를 가르쳐 왔다.
특히 천무린이라는 희대의 기린아이자 미친놈을 옆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 녀석을 제외하고 더 이상 크게 놀랄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원래 사람이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중원의 젖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장강 같은 대하(大河)를 본 사람이 흐르는 계곡 물줄기를 보고 놀라지는 않는 법이다.
악교운 역시 그랬다.
「 섬서무관 새끼들, 턱 빠진 거 더 봐야 하는데. 아쉽네요. 누구 때문에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인생. 으르르르! 」
그래서 녀석이 임무를 수행하러 나가며 던진 한마디에 크게 개의치 않고 있었다.
오히려 상황을 복잡스럽게 만들 천무린을 빨리 내보내는 것이 악교운으로서는 더 편했다. 혹여 이 비무가 잘못되더라도 문제가 생기지 않게끔 조율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으니까.
꽈앙!
푸드더더덕!
벌써 몇 명째인가.
신혁건이 각원을 꺾고 돌아온 뒤에도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남사익, 낭소소, 설화린, 송무, 태강, 백리후와 백리무영, 당지운까지 천천히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그것도 단 한 명도 지지 않고.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그런데.
각원에 이어 섬서무관 8기수 중 가장 강한 검수로 꼽히는 종리삭이 걸어 나왔다.
으득.
종리삭은 차마 주변에 보이는 참혹한 광경을 눈에 담을 수 없었다.
그저.
“무량수불. 종리삭이라 하오. 지난번에는 부끄럽게도 천 생도를 만나 본 실력을 보여 준 적이 없었으나 이번에야말로 사천무관의 생도들과 검을 겨룰 수 있게 되었구려. 부디 좋은 시합을 벌일 수 있도록…….”
차분하게 나서서 더 이상의 모욕을 당하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데.
“거, 쫑알쫑알 되게 시끄럽네. 거긴 뭐 입으로 싸우나 보지?”
껄렁이는 표정으로 검을 쥐고 자신을 향해 겨누고 있는 한 사람.
나른하고도 귀찮다는 표정으로 검 끝을 까딱이는 저 모습은 어떠한 예의도, 검수로서의 태도도 담겨 있지 않았다.
빠직.
……종리삭의 이마에 절로 핏대가 섰다.
그러다가 문득.
그의 머릿속에 지난날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삼대 무관 비무대회에서 그동안의 성취를 보여 주어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해 주겠다던 포부.
제일가는 검수들을 배출해 낸 무당파의 기재인 자신이 왜 중원 남쪽의 패자이자 남무당이라고 부르는지 몸소 입증하겠다고 그 얼마나 고대했던가.
그러나.
첫 출전.
첫 격돌.
첫 대전.
올라선 비무대회에서 눈앞에 보이는 저 녀석처럼 껄렁이는 표정과 자신을 무시하는 눈빛을 짓던 녀석이 불현듯 머릿속에 떠올랐다.
‘……왜 저이에게서 천무린의 모습이 보인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었다. 천무린은 천무린이다. 다른 이가 천무린과 같을 수는 없는 법.
“후우. 진정하자, 종리삭.”
스스로에게 중얼거리며 검을 바로잡는 그 순간!
꽈앙!
“허업!”
마치 빛처럼 빠르게 달려들어 종리삭의 검면을 거칠게 후려치는 황태의 검격이 펼쳐졌다.
끼기기긱!
검과 검이 부딪쳐 서로 힘겨루기가 펼쳐지는 순간, 황태의 입가가 비틀렸다.
“……그래도 넌 한가락 하는 놈이네?”
……나, 나를 한가락 한다고 표현한다고?
종리삭은 눈앞에 있는 이 생도의 이름도 처음 들었다. 황태라고 했던가.
별호도 없는 무명 생도인 녀석. 그나마 신혁건은 최후의 10인에라도 들었고, 기권패라는 전무후무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기억할 뿐 본래라면 기억하지도 못했을 터였다.
‘……질 수 없다. 나까지 진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종리삭마저 진다면.
섬서무관 8기수는 10전 10패.
이미 9전 9패라는 사실마저 수치스러워 견딜 수 없었지만, 종리삭은 자신 있었다.
분명 그랬건만.
끼긱 소리를 내는 두 검날이 부들거리면서 힘겨루기를 하는 와중에 종리삭은 생각을 고쳐먹을 수밖에 없었다.
방금까지 뒷골목 파락호나 보여 줄 법한 자세는 온데간데없고 거칠면서도 야성적인 검격을 펼친다.
분명 거기까지였으면 종리삭도 그의 강함을 인정하고 온전하게 집중했을 테지만.
“근데, 이게 무당의 검이냐? 별 볼 일 없구먼.”
그 말에 종리삭의 인내심은 단숨에 바닥을 보였다.
“그토록 보고 싶다면 무당의 검이 어떤 것인지 내 보여 주지.”
무당의 검은 유능제강(柔能制剛).
부드러움으로 굳세고 강인한 것을 능히 이겨 내는 것이다.
특히 저토록 거칠기 짝이 없는 검격에서 무당의 검이 가진 원리는 무엇보다 우세했다.
“무당의 무학을 견식하게 되는 그대는 정말로 운이 좋다고 볼 수…….”
“송무보다 더 설명충이었네. 쥐어패고 싶게. 왜 천무린 새끼가 다짜고짜 두들겨 패는지 이제 알겠네. 미안한데, 나 인내심이 그리 강하지 않아.”
까가강!
황태의 패도적인 검결이 빛살처럼 종리삭의 눈앞에 수놓아지기 시작했다. 그 검결은 짙은 야수성을 드러낸 맹수의 울부짖음이나 다름없었다.
콰득! 콰득!
당장이라도 검 끝에서 맹수의 이빨이 보이는 것 같은 검술에 종리삭은 아랫입술이 피나도록 깨물었다.
‘이, 이토록 거칠고도 흉폭한 검결이 정녕 정파의 검이라고!’
정신없이 뒤로 물러나며 그 황태의 검결을 흘려 내기 위해서 용을 써야만 했다.
어느새, 등이 축축하게 젖어 몇 걸음이나 물러났는지 모른다.
“무당이 어쩌고, 부드러움이 어쩌고 염병 좀 하지 말라고 그래. 그 새끼가 그러더라고. 강한 놈이 장땡이라고.”
황태의 두 눈에 불꽃이 튀었다. 안 그래도 그의 머리칼이 쭈뼛 서 있는 것이 흡사 사자의 갈기처럼 늠름해 보였다. 황태는 검 손잡이를 양손으로 바로잡으며.
파악!
바닥을 박찼고, 그의 검이 순간적으로 역수로 쥐어지더니.
콰지직!
종리삭의 옆구리를 비스듬히 그어 갔다. 분명 검으로 베었을 텐데, 흡사 맹수의 이빨이 물어뜯은 흔적이 종리삭의 옆구리에 고스란히 남았다.
풀썩.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인지 종리삭은 거친 호흡을 터뜨리며 창백한 안색으로 자신의 옆구리를 훑었다.
다행히 핏물은 배어 나왔으나 치명상은 아니었다.
“……어, 어째서?”
슬며시 고갤 들어 황태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종리삭이었다.
“왜, 왜 손속에 자비를 둔 것이오. 지금 날 능멸하는 것이오?”
“X랄하네. 지금 이게 생사결이야? 그리고 미안한데, 생사결이었으면 넌 이미 뒈졌어.”
그 말에 종리삭은 우물쭈물하다가 그저 고개를 떨굴 뿐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사천무관 8기수들이 모두 흐뭇하게 웃었다.
“나…… 만 소름 돋은 거 아니지? 무, 무린이랑 말투가 똑같은데.”
“요, 요 근래 무린이가 황태를 유독 괴롭힌다 싶었는데, 아예 그냥 제2의 무린이를 만든 것 같은데.”
“……하하, 미치겠네.”
“그나저나 저 새X, 왜 저리 멋있는 척을 하는 건데.”
그 모습을 바라보던 송무가 문득 고갤 들며 생도들의 얼굴을 쭉 훑었다.
“그, 근데 우리가 10전 10승을 한 거야, 그럼? 섬서무관한테?”
으응?
그의 말에 설화린과 태강이 황급히 고갤 돌아본다. 정면으로 시선을 옮긴 태강의 시야에 입을 벌린 채 경악하고 있는 섬서무관의 생도들이 보였다.
“……그, 그러네. 아무 생각 없이 비무를 하다 보니 잊고 있었네.”
“으음. 여, 열 번을 싸워 열 번을 모두 이긴다라.”
이게 대체 무슨.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듯 생도들은 하나같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근데.”
태강의 말에 생도들이 집중한다.
“솔직히 섬서무관이고 나발이고 너무 쉬운 것 같던데.”
아마 누구라도 그 말을 들었다면 대번에 허세 떨지 말라며 한소리를 했을 테지만.
지금 어느 누구도 태강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되레 그 말에 공감한다는 듯 모두가 고갤 끄덕인다.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백리후가 머리를 긁적이며 백리무영과 생도들을 쭉 돌아보더니 한마디를 덧붙였다.
“천무린 놈의 주먹질이나 발길질에 비하면…….”
끄덕, 끄덕.
“그놈 속도를 생각하면 얘네들은…….”
끄덕, 끄덕.
“가끔 마, 맞다가 죽기 직전까지 가 본 터라 아까 몇 대 맞아도 별 감흥이…….”
끄덕, 끄덕.
하나같이 모두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이고 있었다.
대, 대체 그놈은 우리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제야 여태껏 자신들이 거쳐 온 수련 과정(?)을 떠올리는 생도들이었다.
틈만 나면 두들겨 패는 것은 물론이요, 밥도 주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훈련을 시키질 않나.
어디 이동할 때면 개인용 의자가 되어 천근의 무게로 찍어 누르는 천근추를 버텨 내야 했고.
내력 없이 이역만리를 뛰어다니며 체력을 길러야 했으며.
잠도 재우지 않고 검을 휘두르라고 소리치던 지난날의 기억이었다.
……저, 정말 그런 것들이 이만큼이나 효과가 있다고?
생도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던 악교운 역시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 이젠 슬슬 밥값 할 때 되었을 테니까 본보기로 자신들이 어느 정도로 강해졌는지 알 때도 되었죠. 」
그렇게 말하고 사라진 천무린이 문득 떠오른다.
대체 얼마나 괴물들로 만들어 놓은 거냐. 네 녀석은.
* * *
“쿨럭, 쿨럭. 쿨럭!”
“아오! 약해 빠져 가지고! 무공도 드럽게 약하면서 신법도 못 따라오냐?”
그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5기수이자 소검귀로 불리는 소화진이었다.
현존하는 청성파는 청운적하검과 최심장, 둘 모두를 일절로 취급하지만, 경신법 역시 뛰어나다고 평가한다.
살수 문파의 성향을 지녔던 청성파답게 세류표라는 일절의 경신법은 날랜 몸놀림으로 오랜 시간 동안 경공을 펼쳐도 부담이 덜하고 쓰면 쓸수록 속도를 더해 간다.
그렇다 보니 소화진 역시 경신법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허억, 허억.”
한 번을 따라잡질 못했다. 소화진은 절정의 고수다. 그런 그가 무공도 아닌 경신법으로도 천무린의 발끝을 따라가기 힘들다는 건 도무지 납득하기 힘들었다.
“조, 조금만 천, 천천히!”
“아오, 소검귀 좋아하네. 그냥 오늘부터 소 새끼라고 해!”
열 받은 천무린이 자리에서 멈추자,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겨우 내쉬는 소화진이었다.
“후욱, 후욱!”
“됐지? 다시 간다.”
“자, 잠깐만!”
몇 초 쉬었다고 그새 어떻게 달린다는 건지.
당혹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는 소화진은 신경질적으로 입을 열고 있는 천무린을 바라봐야 했다.
그 누구도 멸마신군, 아니 천무린을 더는 후기지수로 바라보지 않는다.
삼대 무관 비무대회야 응당 후기지수들끼리의 각축전이라 볼 수 있겠지만, 쌍용검 파평을 꺾었다는 것은 그 의미가 남달랐다.
절정의 고수를 실력으로 찍어 눌렀다는 사실.
그리고 소검귀라 불리던 소화진을 이겼다는 결과까지.
비로소 소화진은 느낄 수 있었다. 천무린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모든 무관 생도들의 명성이 빛바랠 것이라는 사실을.
소화진 역시 생도들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섬서와 산동의 생도들과 비교했을 때 수위를 다툴 것이라고 판단될 정도니까.
그런 자신만만하던 소화진을 단숨에 제압한 천무린이 아니던가.
“대, 대체 네 녀석은…….”
얼떨떨해하고 있는 소화진의 앞에서 천무린이 어깨를 으쓱이다 말고.
휙. 휙.
게슴츠레 눈을 뜬 채 주변을 황급히 훑는 천무린이었다.
“……뭐 하는 거냐?”
“쉿.”
묻는 소화진의 말을 일축하고 천무린은 기감을 사방으로 퍼뜨렸다.
“천라지망(天羅地網). 제법이네. 기세를 잘 숨길 줄도 알고.”
응? 천라지망(天羅地網)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