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9화
제139화
속전속결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그리고 괜히 우려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섬서무관은 사천무관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마치 고민할 가치도 없다는 듯.
제갈벽 후임으로 총교관에 임명된 우칠은 종남파의 일대제자다. 청렴하고 공명정대하기로 소문이 난 우칠은 생도들을 이끄는 데 차별이 없었고, 수련과 훈련 이외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단, 그 역시 사천무관이 오는 순간 묵은 감정을 풀어야겠다고 판단한 것인지 악교운의 제안을 관주님들에게 전하고 그들과 열띤 토론 및 오랜 설득을 한 끝에 바로 비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섬서무관 8기수 대력권 각원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노골적인 살기에 움찔거렸다.
“……나무아미타불. 어쩌다가 이리도 마구니들이 낀 것인지.”
“마구니? 마구니 좋아하네. 이 새끼야, 덤벼!”
각원은 이래 봬도 소림에서 잘나가는 기재 중 기재다. 7기수 각신보다 뛰어나다고 정평이 나 있는 각원이었기에 이렇게 그에게 달려드는 생도들은 아마 이들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남사익과 낭소소보다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놈이 있었으니.
까딱, 까딱.
“덤벼, 이 새꺄. 너 잡고 폭풍창이 될 거니까.”
“……시주.”
폭풍창. 뭔 놈의 폭풍창인지.
“무릇 별호란 절로 따라오는 것. 시주께서 덕을 높이고 의와 협을 행한다면 별호는 금방 생길 것…….”
“아오, 개소리하지 말고 어서 덤벼.”
그 말과 함께 신혁건의 낭창거리는 창끝이 뱀의 혀처럼 요사스레 각원을 향해 파고들었다.
슈우우욱!
“……!”
각원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황급히 소매에 내력을 모아 앞으로 후려쳤다.
꽈앙!
창끝을 향해 후려친 나한권에 창끝이 낭창거리며 창날이 맞부딪쳤음에도 불구하고.
타다닥.
몇 걸음이나 물러난 것은 다름 아닌 각원이었다.
‘……신혁건이라고.’
삼대 무관 비무대회에서 본 신혁건은 천무린과의 비무가 두려워 기권을 한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의 무공이라고 여길 수 없을 만큼 강력한 내력과 변칙적인 창술이었다.
각원이 무언가 이상하다고 여긴 것인지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오른손의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아미타불. 아무리 급하게 나한권을 펼쳤다고는 하나.’
경쾌하게 뛰어오른 신혁건의 움직임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자세를 바로잡은 각원 역시 단전을 약동시키며 조금씩 끌어올렸다.
만만히 보아서는 안 되겠다고 여기는 순간.
“내가 저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어서 나오도록 하라! 혁건! 내 열양장으로 저 땡중의 머리털을……. 아, 없구나.”
각원의 정신 수양이 무색해질 만큼 중심이 휘청거렸다. 남사익이 던진 말 한마디가 그의 마음을 대번에 크게 흔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머리털을 논한 건 심했다.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어.”
“지금 안 보이냐. 남사익이랑 낭소소, 둘 다 눈 돌아갔어. 신혁건한테 차례 빼앗겼다고.”
“원래 내 차례였다고! 으으으.”
이를 바득바득 가는 낭소소와 분한 표정을 짓는 남사익을 뒤로한 채 신혁건이 광기 어린 미소를 보였다.
그 모습에 각원의 표정이 절로 일그러졌다. 그러나 아무래도 좋다고 여겼다.
집중력이 잠시 흐트러졌을 뿐, 오로지 자신의 상대는 멸마신군 천무린밖에 없다고 여겼다.
이미 비무대회로 증명되지 않았던가.
비록 천무린에게는 졌지만, 그 외의 생도들은 각원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근데 말이야.”
주먹을 꾹 말아 쥐는 각원을 바라보던 신혁건이 뚱한 표정을 지었다.
“너 원래 이 정도밖에 안 됐어?”
그 말에 각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섬서무관의 다른 생도들의 표정도 일순 구겨졌다.
비록 경쟁 상대지만, 각원은 그래도 섬서무관 8기수 중 가장 뛰어난 생도다. 실력으로 보나, 인성으로 보나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을 정도로.
그런데.
‘이 정도밖에, 라고?’
‘비무대회에서 기권한 주제에!’
낭창거리는 표정과 등이 근질거리는지 창대로 등을 긁고 있는 저 작태는 대체 무엇인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비무대회에서 신혁건이 기권을 하며 나려타곤까지 펼치면서 도망간 모습을.
“……시주께서는 자신감이 과한 것 같소.”
신혁건을 노려보는 각원의 두 눈은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제아무리 소림에서 정평이 난 인재라지만, 그 역시 호승심이 있는 무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비무대회로부터 시간이 그리 많이 흐르지도 않았는데, 자신을 무시하는 모습은 각원의 자존심을 긁기에 충분했다.
“아니, 뭐. 대력권? 별호 달린 녀석이 섬서무관 8기수 중에 너뿐이잖아. 근데 뭐…… 그리 대단하지 않은데?”
그 말에 송무와 태강이 입을 떡하니 벌렸다. 그 옆에 선 설화린도 고갤 젓고 있었다.
“어쩌다가 전부 그 인간처럼 변해 가고 있는 걸까요?”
“…….”
“……조, 좋은 게 좋은 거지. 어, 어찌 됐든 이기는 게 중요한 거 아닐까.”
그 말에 세 명의 생도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마지못해 고갤 들어 시합을 관전했다.
“부디 실망시키지 마시길 바라오. 내 주먹에는 자비가 없으니. 아미타불.”
“아미타불은 개뿔. 도로 아미타불이다. 말이 왜 이렇게 많아?”
그 말에 각원은 머릿속 이성의 끈이 뚜둑 하고 끊기는 느낌을 받았다.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각원은 심호흡을 하고는 한 손은 주먹을, 다른 한 손은 반장을 한 채 신혁건과 마주했다.
“……대력금강권이라는 무공이오.”
그러자 금빛 서기가 휘황찬란하게 뿜어 나와 사방으로 퍼졌다. 당장이라도 부처가 현신(現身)할 듯 절로 숙연하게 만드는 기운이었다.
현현(玄玄)하기 짝이 없는 그 모습에 신혁건이 창대를 천천히 잡았다.
‘……!’
진중한 표정을 짓는 신혁건의 모습에서는 아까 보인 경박스러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단 한 명의 창수(槍手)만이 각원을 마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경박스럽고 경멸스러울 정도로 가벼운 입을 가진 사내였으나, 본격적으로 창대를 잡는 신혁건의 기세는 각원조차 함부로 여길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인물이 어째서…….’
그때 기권패를 했던 것인가.
그만큼 천무린이 뛰어나단 소린가. 이 사내가 기권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을 정도로.
‘……잡념을 지워라.’
가벼이 숨을 토해낸 각원이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잡고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털어 냈다.
지금 이 순간, 유일무이하게 자신에게 패배를 안겼던 천무린이 아닌 이 창수를 최대의 적수로 여겨야 한다.
그렇게 마음먹은 순간!
푸화아아아악!
금빛 서기가 영롱하게 빛나더니 신혁건을 뒤덮을 정도로 쾌속한 권영이 뻗어 왔다. 금빛 서기에 둘러싼 수많은 권영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넋을 잃게 만들었다.
그 모습에 섬서무관의 생도들은 절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저 버릇없는 사천무관의 생도를 처참히 짓밟기엔 차고 넘치는 기운과 권격이 아닌가!
비무대회에서 기권이나 하던 녀석이 저 권력을 받아 낼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
“하앗!”
창대를 돌개바람처럼 유연하게 회전시켜 창끝으로 접근해 오는 권영들을 향해 내뻗었다.
“무, 무슨!”
섬서무관의 종리삭은 두 눈을 부릅뜨며 경악했다. 당장이라도 창대가 부러질 듯 휘어지는 것을 보고 순식간에 신혁건이 박살이 날 것 같았기에 그 무모한 모습에 절로 고함이 터져 나온 것이다.
각원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고, 종리삭은 대번에 섬서무관이 승리하리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타다다닥!
타닥!
돌개바람처럼 회전하기 시작한 창끝은 그 끝을 모르고 속도를 더욱 높였고, 무수한 권영(拳影)들을 하나하나 쳐 내기 시작했다.
간결하게 움직이는 창끝은 별다른 힘을 들이지 않고 유연하고도 변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이들이 도무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창이 가볍게 나풀거렸다.
저 묵직한 권격을, 저리 가벼운 창으로 쳐 낸다고?
섬서무관 생도들의 얼굴이 점차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변해 갔다. 지금 시합을 벌이고 있는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각원이었다.
“미안한데, 이 정도 권격은 무수하게 맞아 봐서 알아. 넌 그 녀석의 발끝에도 못 따라가.”
신혁건이 엷은 미소를 띠며 창대를 유연하게 쳐 내다가도 원심력으로 힘을 역이용하여 창끝에 힘을 담았다.
그 끝에 보이는 것은 미약하지만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푸른 기운. 청명한 그 기운은 다름 아닌 창풍 속에 어렴풋이 담긴 창기(槍氣)였다.
“……창, 창기!”
푸슉! 슉슉슉!
청명한 기운과 대비되는 창끝의 공세는 그 끝을 모르고 각원의 눈앞을 뒤덮었다.
“이익!”
충격에서 벗어나 이를 악물고 대력금강권을 전력으로 펼치는 각원의 온몸에서 금빛 서기가 뿜어 나왔으나 그 기운은 아까만 못했다.
“왜 흔들리고 그래? 고작 이거 가지고.”
꽈가가강!
대력금강권의 권영들이 신혁건의 창영과 허공에서 격돌하며 거친 파공음을 만들어 냈으나.
타다다닥.
“쿨럭.”
속절없이 밀려나는 것은 다름 아닌 각원이었다.
‘내, 내가 패한다니. 그, 그럴 리가 없…… 다. 지금이라도 내가…….’
신속하다 못해 어안이 벙벙해질 만큼 쾌속한 속도의 창끝이 각원의 무복을 대번에 넝마로 만들어 버렸다.
주르륵.
“……이, 이럴 수가.”
각원은 뼈를 깎는 수련을 해 왔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해 왔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반드시 천무린을 따라잡겠다고 이를 악물었던 그였건만.
신혁건이 눈앞에서 씨익 웃으며 전의를 상실한 각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놀라고 그래? 온실 속 화초처럼 있던 새끼가 발전이 빠를 리가 없지. 안 그래? 운 좋은 줄 알라고. 나 아니고 다른 놈들이었으면 이미 넌 기절했을 테니까.”
그 말을 남기고 신혁건이 빙긋 웃으며 복귀했다.
저벅, 저벅.
천천히 걸어오는 그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눈빛.
그것은 선망…….
“염병하지 말고 빨리 튀어와.”
“……내가 했어야 하는 건데, 저 개새X.”
……아니, 원망이었다.
낭소소와 남사익은 이를 뿌득뿌득 갈았지만, 이미 순서는 지나갔으니 어쩌랴.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천무린만 히죽 웃고 있을 뿐이었다.
섬서무관과의 비무.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남달랐다. 그동안 녀석들이 얼마나 고생했고,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명확히 할 수 있는 순간이 바로 지금이기 때문이다.
섬서무관 8기수 생도들 중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각원을 단숨에 제압한 신혁건. 그리고 항상 꼴찌에 머무르던 사천무관의 생도들이 제각기 껍질을 깨고 그간 얼마나 피나는 수련을 했는지 명확히 알 수 있는 순간인 셈이다.
“후후, 이제 시작인 셈이지만 적당한 자신감을 채워 주는 것도 중요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