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8화
제138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겠지만, 무관에 다니는 이들은 지학(志學, 열다섯)을 겨우 지나 약관(弱冠, 스물)이 채 되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한마디로 누구보다 혈기 왕성하다는 이야기다.
악교운과 천무린의 음모가 무색할 만큼 섬서무관 내부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어디 감히 섬서에 발을 들여? 근본도 없는 사천 놈들이.”
“기가 차고, 코가 차네.”
“멀쩡히 살아 돌아갈 생각일랑 말도록 해라.”
접객청에서 한 걸음이라도 나서면 보란 듯이 사천무관의 생도들을 훑으며 위협을 가하는 섬서무관 생도들 탓에 사천무관의 생도들 역시 분노로 이를 갈았다.
“저 육시랄 놈들이 자꾸 우릴 도발하는데?”
“뭐? 그런 도발을 듣고도 가만히 있었다고? 미친놈아, 당장 찢어 죽였어야지!”
“야야, 우리가 그놈들한테 당한 거 생각하면 멀쩡히 있으면 되겠냐?”
삼대 무관 비무대회에서 사천무관이 우승한 것을 두고 섬서무관 생도들은 크나큰 치욕으로 여겼다. 그러니 좋은 감정이 있을 리 만무했다.
거기다 문제는 제갈벽이 섬서무관의 총교관으로 있으면서 저질렀던 사천무관 생도들을 겨냥한 집단 구타 사건이었다.
당시 검진 시합에 나올 수 없도록 7기 생도와 8기 후보생들을 차출하여 집단 구타를 하도록 꾀했던 제갈벽으로 인해 사천무관의 생도들 역시 섬서무관이라면 이를 갈고 있었다.
제아무리 천무린이 복수를 했다고는 하지만.
“……보셨죠? 제가 움직이지 않아도 알아서 움직이게 될 거라고.”
“그렇긴 한데.”
악교운의 두 눈이 가늘어지며 이를 갈아붙이는 8기 생도들의 얼굴을 훑었다. 당장이라도 검집을 들고 뛰쳐나갈 기세였다.
심지어.
“일단 닥치는 대로 쥐어패고 시작하자.”
“선빵필승이랬어. 알지?”
“무조건이지! 이 새꺄! 이 형만 믿어.”
“우아하게 검이나 휘두를 줄 알지, 제대로 칼밥이나 먹어 봤겠어?”
흐뭇.
악교운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린다.
이게 무슨 사파 새끼들도 아니고, 어찌 저렇게 입이 걸단 말인가.
뒷골목 시정잡배들이나 쓸 법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걸 들은 악교운의 심정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으랴.
얼마나 착한 녀석들이었는데. 흥분하면 살기를 진득하게 피울 줄 알게 된 생도들의 모습을 보는 와중에,
“헤헷, 옳지! 옳지! 죄다 죽여 버려!”
……그래, 모두 이놈 때문이다.
더 살아서 뭐 하나.
이놈 때문에 무려 5년 넘게 생도들을 교육하고 지도해 왔던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그냥 이놈 죽이고 나도 떠나는 것이…….
그리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 천무린이 어깨를 으쓱한다.
“어차피 무관 연무장을 빌려서 수련시키는 것도 눈치 보이는 거예요. 케케묵은 숙원은 더 쌓이기 전에 빨리 풀어 버리는 게 낫죠.”
“이미 쌓이고 쌓여서 터질 것 같은데. 당장이라도 저리 칼부림을 준비하고 있는데.”
접객청 창으로 보이는 섬서무관 생도들의 눈빛 역시 살벌했다. 같은 정파인들이라고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원래 애새끼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지 뭘 그리 걱정해요?”
……애새끼들이란다. 누가 누굴 보고.
“원래 비무대회처럼 큰 무대에서 싸우면 긴장하는 놈들이 더러 있죠. 규모도 규모이거니와 실전 경험이 없는 이놈들이라면 더더욱. 그러니까 비무대회에서 풀지 못한 아쉬움을 지금 풀어 줘야죠. 제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녀석들이 많을 텐데.”
특히 남사익은 눈에 불을 켜고 한 사람을 찾고 있을 정도였다.
“그, 그! 땡중 놈을 찾아야 한다! 내 그놈에게 받아 낼 것이 있으니!”
“땡중? 각원을 말하는 거야? 무린이랑 마지막에 싸웠던?”
“그렇다! 그놈! 내가 방심하지만 않았어도 이겼을 것을!”
분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남사익의 말에 송무와 태강이 어리둥절해했다.
“방심? 그러기에는…….”
“기억이 왜곡된 것 같은데. 한참 두들겨 맞다가 쓰러지지 않았나?”
“시끄럽다! 이 녀석들아! 내가 이번엔 이길 수 있다! 내가 바로 적화객이 아니겠느냐!”
남사익은 슬며시 설화린을 바라보았다.
각원과 비무하기 전, 설화린과의 비무에서 과도하게 쓴 내력이 채 회복되지 않아 쉽사리 무너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어느 때보다 기운이 차고 넘쳤다.
그리고 남사익뿐만 아니라 낭소소 역시 각원에게 쓰라린 패배를 당해 최후의 10인에 들지 못했다.
“나 역시 이번엔 이겨 보이겠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자존심이 강한 낭소소와 남사익이었다. 두 사람은 이번 기회에 반드시 설욕하겠다는 마음이 가득했다.
그렇게까지 열의를 보이는 이들의 모습에 천무린이 어깨를 으쓱한다.
“저래도 그냥 못 본 척하시려고요?”
“끄응…….”
제자들이 비무를 통해 더 나아가고자 하는데, 스승이자 담당 교관으로서 찬물을 끼얹는 게 쉽진 않았다. 아니,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그래서.
“명단을 뽑아 그렇게 하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우오! 역시! 화끈하네! 누가 악교운 교관님 아니랄까 봐! 크으!”
천무린의 엄지척을 뒤로하고 악교운이 단호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네 녀석은 따로 할 일이 있다.”
“엥.”
뜬금없이 자신에게 지시를 내리는 악교운의 모습에 천무린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여기서 베짱이 짓이나 하면서 놀고먹으려 했던 것 아니냐. 애들만 내보내고.”
뜨끔.
정말 귀신이 따로 없었다.
“아무리 대외적인 모습을 위해서라지만 온 김에 일하는 척은 해야지.”
……하아.
천무린이 당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악교운을 노려봤지만, 노려봐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악교운은 어깨를 으쓱였다.
“싫으냐? 싫으면 비무는 없었던 일로 하자꾸나.”
그 말에 천무린을 향해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들. 기대와 반감, 동시에 희생을 요구하는 시선들이 무수히 쏟아졌다.
“……하아.”
꼼수를 쓰려다가 제 발목이 잡힌 격이다. 애들만 열심히 굴리려 했더니 졸지에 나까지 구르게 생겼네.
빌어먹을.
“……알았어요. 대신 한 명만 데려가게 해 줘요.”
그 말에 모든 생도들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하, 한 명이라니. 누군지 몰라도 같이 가는 이가 어떤 꼴을 당할지 안 봐도 뻔했으니까.
“좋다. 그리고 미리 말하지만, 어차피 전 인원은 불가하다. 애당초 명단을 뽑아 움직이는 것은 배려 차원이다. 갑작스럽게 제안하는 것은 섬서무관에 폐가 되는 행동이니 열 명으로 제한한다. 배움을 원하는 이들은 앞으로 나서라.”
척, 척, 척!
동시에 오십여 명이 전부 나섰다. 형형한 안광을 빛내며 한발도 양보할 생각이 없다는 듯.
물론 그 이면에는 천무린과 함께하고 싶지 않다는 의도도 깔려 있었겠지만.
“……아니, 양보도 할 줄 알아야지. 이 새…….”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악교운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려는 순간,
“이 새끼들아! 나약한 새끼들은 빠져. 저 새끼들 대갈통 다 부숴 버릴 수 있는 놈들만 나서라고!”
그 말에 악교운이 다시금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먼저 나서 줘서 참 고마운데.
그렇게까지 말할 필욘 없었는데…….
“당연하지! 다 부숴 버리고 남지!”
신혁건이 창대를 쥐며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자세를 취했다. 가뜩이나 몸이 달아올라 있었다.
별호를 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신혁건이니만큼 섬서무관을 죄다 박살 내고 나면…….
“이번에야말로!”
별호를 얻고야 말겠다. 맨날 쓸데없이 다투는 백리 형제나, 정보 벌레인 송무, 틈만 나면 설화린한테 구애나 하는 남사익보다 자신이 대체 못한 게 뭐냐.
그러면서 나서는 신혁건과 함께 송무, 황태, 낭소소, 남사익, 설화린, 백리무영과 백리후, 태강까지 나섰다.
“으이구, 또 너희들이야?”
천무린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자 아홉 명은 애써 시선을 피했다.
적어도 저 녀석과 함께하는 것보다 섬서무관 생도들과 칼부림을 하는 편이 백번 낫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무린은 다른 생도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왜 또 저 아홉 명이 나선단 말인가. 매번 익숙한 인원들로 참전하는 느낌에 다른 생도들을 쭉 훑었다.
“니들은 나갈 생각 없냐?”
그 말에 생도들은 움찔했다.
당연히 나가고 싶지. 그걸 말이라고!
근데 나가려고 하니까.
막상 같이 수련할 때 보여 준 저 아홉 명의 무위가 자신들과 확연한 차이가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극명한 차이는 천무린 역시 느끼고 있었지만, 어쩌겠는가. 그건 천무린이 제아무리 뛰어나다고 한들 도와줄 수가 없었다.
스스로 깨닫고 알을 깨고 나오는 수밖에.
“그래도 한 자리가 비는데.”
아홉 명이었다.
그리고.
“나!”
“내가 나간다!”
명진과 진무양이 서로 으르렁거리며 어깨를 부딪치며 한 걸음씩 나섰다. 티격태격하면서 아홉 명 옆으로 가는데, 그 모습에 천무린이 미간을 찌푸렸다.
“한 명은 근육 돼지에, 한 명은 잔머리꾼이라.”
그 말에 근육 돼지와 잔머리꾼은 발끈하며 천무린을 향해 소리쳤다.
“누가 근육 돼지냐!”
“내가 잔머리꾼이라니?”
그렇게 소리치고 있는데, 한 인영이 불쑥 나서며 아홉 명 옆에 가서 섰다.
“나! 내가 나갈래.”
……어?
생각지도 않았던 녀석이 나섰다.
다름 아닌.
“당지운?”
사천무관주 당백진의 손자이자 여태껏 이런저런 사건 사고에서 항상 한 발 떨어져 있던 당지운이었다.
그 모습을 골똘히 바라보던 천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됐네. 열 명.”
“에에엑? 저, 저 새X가……!”
“새치기를 이렇게 한다고.”
명진과 진무양이 열 받아서 뒷골을 잡고 있는 사이, 천무린과 악교운이 시선을 마주했다.
“나서 볼까요?”
“그 전에 누구랑 움직일지 미리 정해라. 미리 정해야 움직이기가 편하지.”
그 말에 모든 생도들이 재차 움찔거렸다. 하나둘씩 눈을 감는다.
원시천존, 태상노군, 부처.
그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이번 한 번만 살려 주십시오.
저 녀석을 따라가 따까리 노릇을 하면서 죽도록 처맞을 걸 생각하면 지금 차라리 자결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중생 하나를 구원하신다는 생각에 제발 저를 선택하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하나같이 마음속으로 염원을 담아 빌고 있는데, 천무린이 생도들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움찔거리는 생도들 사이로 태연자약하게 천무린이 지나쳐 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이들과, 천무린의 접근에 가슴을 졸이는 생도들이 크게 대비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왜 아무도 지목을 안 하지?’
하나둘 지나쳐 모든 생도들을 훑고 지나가는 동안에 아무도 지목하지 않은 천무린의 모습에 공통적으로 의문을 드러내는 생도들.
그때.
“밥 고만 처먹고, 밥값 하러 가자.”
으응?
와구와구.
“……나?”
“응. 선. 배. 님?”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에 혼자 밥을 먹던 소화진의 어리둥절한 모습을 뒤로한 채 8기 생도들은 저마다 살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소화진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히히.”
이미 늦은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