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5화
제135화
이유야 어쨌든 소화진은 울며 겨자 먹기로 섬서무관과 산동무관으로 향하는 길에 함께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비록 비무에 패배했고 무참히 짓밟히는 결과를 낳았다고 할지라도 좋든 싫든 함께해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심지어 비무에서 졌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인정하지 못한다고 발뺌해 봤자 본 이들만 해도 8기 생도들에다 악교운까지 있었다.
괜히 오리발을 내미는 치졸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낭떠러지로 떨어질 일도 없겠지만.
물론 그렇게 마음먹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힐끗.
천무린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일반적인 고수라고 여겨지는 이들에게서 보이는 칼날 같은 기세, 무거운 중압감 같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제대로 된 훈련도 하지 않은 듯 보이는데, 대체 어떻게 저리 강할 수 있는지.
소화진으로선 당최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어라? 죄인 새끼가 말대꾸?”
“미친X이! 아무 말도 안 했어!”
“아님 말고. 왜 소릴 지르고 난리야? 아직 덜 맞았지?”
움찔.
천무린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소화진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부르르 떨면서 시선을 정면에 고정했다.
한평생 이렇게 치욕스러운 입장이 되어 본 적이 있었던가. 검을 잡은 이후로 청성제일의 기재, 사천무관이 낳은 역대 최고의 검수라는 평가까지 받았던 소화진이었다.
그런데 여기선.
“아오, 선배는 손이 없어요, 발이 없어요? 알아서 요기해요.”
“수련하는 데 방해되니까 비켜요!”
“아니, 뭐 선배라고 유세 떱니까! 같이 준비 안 해요?”
같은 하늘 아래 모든 사람들은 공평하다는 지론이 바로 이곳에서 적용된다는 듯 8기수 생도들은 소화진에게 선배 대접이라곤 1도 하지 않았다.
“이런 미친……!”
울컥 치솟아 오르는 노기를 참아 내지 못하고 목구멍 위로 짐승 같은 비명이라도 지르려는 찰나.
힐끗.
“죄인 새끼가 또 말대꾸?”
소화진은 그만 합죽이가 돼 버렸다. 모든 일의 주범이 바로 저 앞에 있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무력감에 몸을 떨었지만, 그 와중에.
“아오! 너희들 때문에 지금 얼마나 지체된 줄 알아?”
신경질을 내는 천무린에게 생도들이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뭔 헛소리야. 누구 때문에 지체되었……!”
“됐고. 지금부터 섬서무관에 도착할 때까지 한시도 쉬지 말자고. 앞으로 밥 먹고 해우소 가는 시간 빼고는 전부 달리는 거야.”
“뭐어? 그게 무슨……!”
생도들의 표정이 일순 창백해졌다.
잠은!
잠은 재워야 될 거 아냐!
“아, 잠?”
천무린이 귀를 후비적거리더니 허공에 튕겼다.
“죽어서 자. 잠은.”
그런 말을 남기고는 천무린이 탄 마차의 속력이 빨라졌다.
다그닥, 다그닥!
거침없이 질주하는 말들과 그에 딸린 마차.
거기에 탄 이는 오로지 천무린과 악교운뿐이었다.
그럼 나머지는 어떻게 오느냐고?
후다다다다다!
먼지로 돌개바람을 일으킨 채 무려 오십 명쯤 되는 인파가 미친 듯이 달리며 마차 뒤를 따라붙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앞선 송무와 신혁건의 옆에서 소화진 역시 따라서 뛰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억지로 뛰고는 있지만, 이게 훈련이라고?
우다다다다다다!
“보면 몰라요? 말 걸지 마요! 힘들어 죽겠으니까.”
“아오! 나 내공이……. 내공이……. 후달려!”
처음에는 쉬웠다. 경신법을 펼치는데, 뛰는 게 뭐가 힘들겠는가.
애초에 내력을 쓰는 무인들에게 경신법은 딱히 초식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고.
익히는 순간부터는 자연스레 걸음에 경신법을 달고 사는 것이 무인이었다.
그런데.
일각이 지나고.
이각이 지나서.
반 시진이 지났을 때쯤.
“바, 바닥이 보이고 있어.”
“무, 무린아! 멈춰! 벌써 애들이 뒤처지고 있어!”
내력이 고갈되고 있었다. 적독단을 통해 한없이 채웠던 내력이 이젠 그 바닥을 보이고 있을 지경이었다.
다급한 외침에도.
“그러니까 내공을 왜 남발하고 X랄이야. 나 참. 내공 아낄 줄을 모르네. 누가 경신법을 펼치는데 그따위로 내공을 줄기차게 박아 넣어?”
혀를 차던 천무린이 마차 지붕 위에서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가장 선두로 달려오는 녀석들을 바라봤다.
“운기조식을 하면서 따라오든 쉬면서 따라오든 알아서 해. 근데 그거 알아? 이것도 교육과정이래. 그렇죠?”
그 말에 악교운이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력의 운용과 기의 흐름을 깨닫고 어떻게 배분을 잘하는지 모든 것이 다 중요한 법이지. 일상에서 얻는 깨달음이 중요한 법이니 낙오되는 이들에겐 벌점을 부과하겠다.”
미친.
이젠 악 교관님마저 저리 이야기하니 생도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아, 아까 나랑 한 이야기는 더 하진 않으시네. 우리 식량 전부 이 마차에 있는 거 알지? 낙오자 새X들은 밥도 굶겠네. 헤헤.”
지옥에서 아수라가 현신하여 튀어나왔다고 하더라도 이럴 순 없을 것이다. 어떻게 사람의 얼굴을 하고 저리도 태평하게 악담을 퍼부어 댈 수 있는지!
그러나.
다그닥! 다그닥!
마차를 이끄는 말들의 속도가 빨라졌다. 아니, 마부님! 이제 지칠 만도 할 텐데, 채찍질 좀 그만하고 쉬쇼!
태강은 이미 텅 비어 버린 단전이 채워지기를 기다릴 수 없어서 이젠 이를 악물고 악으로 깡으로 달렸다.
그리고 그건 태강뿐만 아니라 8기 생도들 죄다 얼굴이 시뻘게진 채 이를 악물고 달리기 시작했다.
와다다다!
경신법이 아니라 오로지 달리기만으로 마차를 따라잡는다?
그러나 온갖 수련을 거친 무인들일지라도 그저 내공 없이 달리는 걸음으로는 쉼 없이 달리는 말들의 속도를 따라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점점 멀어져 가는 마차를 보면서 하나둘씩 낙오하려고 하면,
“오호! 벌점 받고 싶은가 봐. 1학년 생도에서 무관의 삶을 마치고 싶은 거지.”
“저 악마 새X.”
“으아아아아아아아!”
“죽이고 싶다!”
“오늘은 못 죽여. 좀 더 튼튼해지자. 계속 달려.”
마차의 속도를 늦춰 눈높이 교육에 들어가는 천무린의 모습에 소화진은 절로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절정 고수쯤 되는 소화진으로서는 내력이 당장에 바닥날 일이 없으니 이 순간은 여유로웠다.
이 말도 안 되는 훈련법에 혀를 내두르고 있는데.
파파박!
……으응?
방금 모기가 물고 지나갔나.
히죽.
언제 다가왔는지 미소를 띤 채 기괴한 표정을 짓던 천무린이 소화진의 옆에 서서 엄지를 치켜세웠다.
“다른 애들이 박탈감 느끼면 안 되잖아? 어차피 무림맹도 못 가는 마당에 다시 기초부터 잡자고.”
……그게 무슨?
어라?
갖고 있는 내력의 저장소인 단전 속 흐름이 석연찮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히히, 절정급의 내력을 쓰는 건 좀 비겁하잖아?”
기분 나쁘게 웃음을 흘리던 녀석은 소화진을 놀리기라도 하듯 마차 위로 날갯짓하는 새처럼 가볍게 뛰어올랐다.
저 미친놈이 이제는 내력마저도 못 쓰게……!
“근데 선배 된 입장에서 아래 후배들한테 따라잡히면……. 으음, 끔찍하네.”
그렇게 툭 던진 천무린의 말에 소화진은 뒤에서 미친 듯이 달려오는 생도들을 보고서 두 다리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추락하여 더 이상 밑바닥을 보일 것도 없다지만!
제아무리 녀석들이 선배에 대한 존경심이라곤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다지만!
후배들과 나란히 낙오된다면 이 무슨 개망신이란 말인가.
아마 다시는 무림맹의 무 자도 입에 올릴 수 없을 터였다.
와다다다다다!
마차를 따라잡기 위한 8기 생도 오십여 명과 소화진이 함께 어우러져 달리기 시작했다.
잠을 자는 대신에 운기조식을 펼쳤고, 조금이라도 내공이 차면 다시금 달렸다.
몸속에 남아 있던 적독단의 기운이 미세하게 꿈틀거리며 반응하기 시작했다. 지친 생도들의 심신에 적독단의 기운이 스며들면서 운기조식의 효율을 크게 높였다.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새에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우연찮게 바라보던 행인들은,
“……혹시 무슨 행사가 있는 겐가. 내 알기론 요 근래에 행사 같은 것은 없었던 걸로 아는데?”
“콜록콜록! 행사고 나발이고 먼지바람 좀 보게! 콜록콜록!”
“대체 뭐 하는 이들이길래 단체로 저리도 뛰어간단 말인가.”
“……사천무관이라고 얼핏 적혀 있는 걸 본 것 같은데.”
“에헤이! 이 양반아! 무관에 있는 생도들이 이리 나와서 개고생을 한다는 소린 들어 본 적도 없네!”
“그렇겠지?”
“아암! 그렇고말고.”
사천무관 생도라고는 의심조차 할 수 없었다. 누가 훈련을 저리 무식하게 한다고 생각하겠는가.
더군다나.
“으아아아아! 이 개새X야아아아!”
“잡히면 죽인다! 죽일 거야아아!”
“내 내공 돌리도오!”
난리도 이런 난리를 치는 이들이 결코 무관 생도일 리가 없었다. 그렇게 지나가던 행인들은 대번에 의심을 접었다.
보일 것 같지 않던 마차의 뒤꽁무니가 점차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생도들은 턱 끝까지 차오른 호흡을 애써 꾹 누르며 손을 뻗었다.
와다다다다다!
“거, 거의 다 왔……!”
“내 바아압!”
“미친! 내 내공 돌려 달라고!”
송무와 태강을 뒤로하고 이를 악물고 질주한 소화진의 팔이 뻗어지며, 마차를 지탱하는 지대를 잡았다.
아니, 딱 잡으려고 하는 순간.
끼이이익!
마차의 바퀴가 멈췄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자마자 허물어지는 생도들이었다. 동시에 소화진 역시 그 상태로 허리를 굽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하마터면 힘을 짜내느라 호흡도 멈추고 달린 덕에 과호흡이 올 뻔했다.
털썩. 털썩.
“……허억! 허억!”
“우에에엑!”
“……나, 나는 더 이상은 못 가.”
“제, 제발 죽여 줘. 나를 ……!”
우는소리를 하는 생도들을 뒤로하고 마차 위에서 한 인영이 가볍게 뛰어내렸다.
“읏차.”
그러면서 널브러진 생도들을 보며 씨익 웃는다.
“그래도 열심히 키워 놓은 보람이 있어. 잘 따라왔는데? 식량 아까운데, 에잉! 쯧쯧.”
혀를 차는 천무린의 모습에 생도들이 가열차게 이를 갈아붙였지만, 벌써 몇 날 며칠을 달려왔다. 조금이라도 내공이 채워지려 하면 소진해서 온몸을 엄습하는 피로감과 탈력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뭐, 그래도 오늘은 저기 안에서 따뜻하게 잘 수 있겠네. 고생했다.”
으응?
그게 무슨 말인가 싶어 생도들은 널브러진 채로 고개만 살짝 들어 천무린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봤다.
안개에 잔뜩 휩싸여 도저히 알아볼 수도 없는 뿌연 형체였다.
그런 상황에서 대체 무엇을 보라는 건지 화딱지가 나려던 생도들이었으나.
화아아악!
점차 안개가 걷히더니 건물 앞에 보이는 문패에는 정확히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섬서무관(陝西武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