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1화
제131화
쾅!
“지금 뭐라고 하였는가!”
노기 띤 음성에 담진이 움찔거렸다. 장로들의 기세에도 꿈쩍 않던 담진이 이토록 움찔거릴 정도라면.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소상히 말하라.”
사천무관주, 당백진.
그의 두 눈썹이 역팔자로 꺾여 있었다.
“녹림칠십이채와의 대치 전선에서 인원이 대거 빠져나갔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인원들 중 호량채(虎良砦)가 포함되어 있다고…….”
말을 하는 와중에도 담진의 표정 역시 더없이 어두웠다. 그가 꺼내는 단어 중 위험한 이들을 지칭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포함돼 있었기에.
“……진위 여부는?”
“현재 투입된 5기수와 6기수들로부터 직접 전달받은 것입니다. 한시도 쉬지 않고 전선 위에서 긴장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입니다. 사실 여부는 재차 확인하지 않더라도…….”
그 말에 당백진은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호량채(虎良砦).
녹림칠십이채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산채 중 하나다. 걸출한 산적들로 구성된 호량채는 한 명, 한 명이 최소 일류급 무인들이었다.
“……이동 경로는?”
나직한 물음에 담진은 목울대를 꿀렁이며 겨우 답했다.
“서, 섬서입니다.”
“……섬서.”
공교롭다. 공교로워도 너무도 공교로웠다.
무관에서 일행이 출발하자마자 호량채가 움직였다?
누가 봐도 때를 기다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는가.
“설마 관주님이 생각하시는 대로 움직였겠습니까. 섬서의 땅덩이를 감안하면 단지 경로만 겹쳤을 뿐이지 않겠습니까.”
녹림이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일행을 쫓아 움직이겠는가. 담진은 그저 우연일 뿐이라고 여겼다.
당연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까.
녹림과 대치하며 서로 신경전을 벌인 적은 있어도 본격적으로 전쟁을 일으킨 적은 거의 없었다. 있었다고 할지라도 무관이 세워지기도 전에 무림 문파들 사이에서 벌어진 알력 정도가 전부였다.
담진은 사천무관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많이 무뎌졌구나. 담진.”
움찔.
당백진의 질책이 담긴 눈빛은 담진을 움츠리게 만들었다.
“장로들 때려잡는 걸 보니 실력은 녹슬지 않은 것 같은데, 그렇다면 감이 무뎌진 것 같구나.”
그 말에 담진은 고갤 깊이 숙여야만 했다.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강호의 은원이다. 장담하지 마라. 담진, 부교관을 차출하여 다녀오도록. 부디 늦지 않아야 할 텐데.”
떨어진 명령에 더는 의아해하지 않았다. 당백진이 그런 거면 그게 맞는 것이니.
“충! 다녀오겠습니다.”
* * *
사천무관에서는 긴박하게 움직이고 있는 반면, 섬서로 향하는 일행의 움직임은 더없이 한가로웠다.
꽈아앙!
단 두 사람만 빼고.
타다닥.
소화진이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나며 이를 악물었다. 힐끗 쳐다본 양팔이 경련으로 떨리고 있었다. 거의 양팔이 떨어져 나갈 정도의 충격이라니.
당최 믿을 수가 없었다.
“오호, 역시 한가락 하는데? 소검귀라고 하더니, 제법이야.”
낭창한 표정으로 히죽 웃고 있는 녀석.
다름 아닌 자신보다 3기수나 아래인 천무린이었다.
금광(金光)으로 빛난다 싶더니 쾌속하게 다가온, 가볍게 뿌린 듯한 주먹 한 방이 이렇게나 큰 위력을 담고 있다니.
소화진은 현 사천무관 내에서 생도 서열로 따지면 1위에 해당한다. 그동안 수많은 강호행과 협객행을 치르면서도 그는 별반 위협을 느낀 적이 없었는데.
현재 그의 머릿속에서는 경종이 크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꽈앙!
언제 날아왔는지, 날렵하고도 표홀한 발차기가 그대로 꽂혔는데, 소화진은 본능적으로 옆으로 굴러야만 했다.
“호오, 본능과 감은 이미 일류급을 확연히 넘어선 것 같은데.”
움찔.
소화진의 두 눈이 천무린을 향했다.
히죽.
흐뭇하게 웃고 있는 천무린의 두 눈이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살짝살짝 엿보이는 광기(狂氣)가 소화진의 솜털을 쭈뼛 서게 만들었다.
“재밌어. 죄다 널브러져 있어서 심심하기 짝이 없었는데.”
미친놈이 틀림없었다. 사람 패는 걸 저리 즐기다니.
“……무엇이 그리 재밌지?”
“그냥. 안 즐거워?”
누가 들으면 정신병자나 다름없는 발언을 툭툭 내뱉으니 소화진으로서는 분노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아 참, 왜 때렸는지 알지?”
왜 때렸는데?
미간을 잔뜩 좁힌 소화진은 천연덕스러운 천무린의 모습에 열불이 났다.
이유도 없이 5초 준다고 염병을 떨더니 대뜸 주먹부터 날려 놓고서는 이제 와서 이유를 말해 준다고?
절로 이가 갈렸다.
빠드득.
“그러다 노친네들 치아 되겠어. 아주. 그나저나 듣기 싫은가 보네. 그럼 말하지 말고 패지 뭐.”
그 상황을 보며 움츠러드는 소화진의 모습에 생도들이 혀를 찼다.
“어쩌다가…….”
“정말 원시천존은 저놈을 왜 안 잡아가시나 몰라.”
“약한 게 죄지.”
“아니, 근데 소화진 선배 정도 되면…….”
“이겨야 하는 거 아냐?”
“소화진 선배라도 파평을 꺾을 순 없지 않을까?”
“에이, 소화진 선배라면 꺾을지도 모르지. 그건 아직 모르는 일이잖아.”
생도들의 표정이 심각하기보단.
뭐랄까.
다소 즐긴다는 표현이 맞을 듯했다.
그 모습에 소화진은 더욱 기가 찼다. 이런 모습을 말릴 생각들은 안 하고.
그 와중에 송무가 곰곰이 생각하다 말고 입을 열었다.
“근데 말이야.”
“응?”
태강이 하늘을 향해 배를 깐 채 숨을 고르며 되물었다.
“소화진 선배까지 지게 되면 생도들 중에서 무린이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뜻이 되려나?”
그 말에 생도들의 입은 순간적으로 합죽이가 되었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어?”
“설마…….”
“…….”
태강을 비롯해 설화린과 황태의 표정도 급격히 어두워졌다. 생각해 보니 소화진까지 꺾인 마당에 어느 누가 천무린을 막을 수 있겠는가.
“……심각한데.”
모든 생도들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울적해진 마음을 달랬다.
어쩌다가 이런 놈과 한 하늘 아래 같이 살게 하신 겁니까.
“소검귀라……. 그럼 대검귀도 있고, 중검귀도 따로 있나? 낄낄.”
그 말에 소화진의 눈매가 씰룩였다. 혼자 낄낄거리는 천무린의 모습에 더 이상 화도 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천무린보다 몇 년이나 앞서서 명성을 날린 소화진이 아닌가.
물론.
천무린이라는 존재가 본격적으로 등장함으로써 소화진이라는 이름이 다소 빛바래긴 했다.
소검귀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인재임은 확실했으나, 같은 후기지수로서 준우승을 한 것과 우승을 한 것은 아무래도 극명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뒤에 소화진이 쌓은 수많은 명성은 어디까지나 사천무관 내에서 퍼진 것이 전부였기에 아무래도 천무린과는 결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전 같았으면 소검귀라는 별호를 단 소화진 선배를 보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을 텐데, 어째 그냥 그렇다?”
“어떤 놈 때문에 쓸데없이 눈이 높아져 버렸어. 아무런 감흥도 없는 걸 보니까.”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하더니.
8기수 생도들로 보이는 두 사람이 널브러져 고개만 힐끗 들고 있는 모습이 얄밉기 짝이 없었다.
어금니를 꽉 깨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일찍이 후배 기수들한테 이런 무시를 당해 본 적이 없었거늘.
그래서.
꽈악.
소화진은 저도 모르게 쥐고 있는 검을 움켜쥐어 힘을 더했다. 그것은 곧 그의 의지를 표명했다.
“네가 뛰어난 것은 알겠다. 그러나 나 역시 만만치 않음을 보여 주겠다.”
“오호, 제법이야.”
뚜둑. 뚜둑.
“근데 말이야.”
응?
“진작에 그렇게 좀 움직이지.”
뜬금없는 말에 소화진이 눈매를 좁혀 천무린을 바라봤다. 바라본 곳에는 천무린이 목을 가볍게 풀면서 입가를 비틀고 있었다.
“서열 1위쯤 되는 양반이 이제 출셋길 열렸다고 주변에 신경도 안 쓰고 말이야. 진작 나섰으면 무관 꼴이 그리되진 않았을 텐데.”
그 말에 소화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제야 천무린이 하고자 하는 말을 알겠다.
“편 뭐시기, 고 뭐시기, 명 뭐시기, 그 새끼들 몇 년 동안 그런 쓰레기 짓거리를 하는 거 다 봤으면서 그렇게 선 긋고 나 몰라라 하면 돼? 안 돼?”
……편일현, 고우림, 명천.
그동안 세 사람이 한 행동을 왜 말리지 않았느냐고 자신을 꾸짖고 있는 것이다.
“그야 그 세 사람은…….”
“사천에서 좀 잘나가는 양반들이라 건드리기 껄끄러웠냐.”
“그저 무관 내에서 싸움이 일어나길 원치 않았을 뿐이다.”
그렇게 말한 소화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물었다. 천무린이 단순히 코웃음을 치는 것 때문은 아니었다.
본의 아니게 느끼고 있는 무언가.
꿈틀거리고 있는 양심의 가책. 바로 그것이 원인이었다.
“후후, 본인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거 알지?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 본인의 잘못을 감싸려 들지 마. 차라리 인정하는 게 나아.”
“무엇을 인정한단 말이냐……!”
그 말에 천무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래서 정파 무림이 탈바꿈이 안 된단 거야. 뭐만 하면 오리발을 내미니까.”
천무린의 시선이 똑바로 소화진을 응시했다. 혀를 차는 음성과 달리 눈빛은 더없이 진중했고 침중했다.
“그러니까 발전이 없는 거야. 자기 일 아니라고 내팽개치고, 회피하고, 책임을 지려 들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변화가 없는 거라고. 자기 동기들이 몹쓸 짓을 당하고, 자기 후배들이 이유 없이 괴롭힘을 당하는데 그것을 보고도 그냥 지나쳐? 넌 그 새끼들보다 더 나쁜 새끼야. 이 방관자 새X야.”
폐부를 찌르는 말에 소화진은 으득 이를 갈아붙였다.
“내가 나서지 않은 것이 무엇이 그리도 잘못된 것이냐? 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고 하지 않더냐. 알아서 살아가는 것이다! 알아서!”
그 말을 던진 소화진은 순간 아차, 싶었다. 주변에 늘어져 있던 모든 생도들, 그리고 유일하게 자신에게 호의를 품고 바라보던 악교운의 표정마저 싸늘하게 굳어졌다.
“그렇지. 그러니까 정파가 마교한테 처발린 거야. 조금만 힘을 합쳤어도 충분히 막아 냈을 것을. 각자도생이라고? X랄하네. 그러고도 네가.”
천무린의 신형이 순간 사라졌다. 그의 기척을 놓친 소화진이 황급히 검을 들며 한 걸음 물러난 순간.
“당당한 정파인이라고 할 수 있는 거냐?”
꽈앙!
“꺼억……!”
옆구리에 짓쳐들어온 발길질 한 번에 황급히 몸을 틀었지만, 충격을 온전히 흘려 내진 못했다.
그리고 그 결과.
쿨럭. 쿨럭.
소화진이 비틀거리면서 몇 걸음 물러났다.
“그런 새끼가 무림맹에 들어가서 의와 협을 갖춘 무인이 된다고? 염병하네. 개소리로 점철된 헛소리일 뿐이라고 생각 안 해 봤어?”
귀화(鬼火)가 피어오르는 천무린의 두 눈에는 분노가 스며들어 있었다. 소화진과 같은 놈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의와 협과는 멀어진 지 오래인 정파 무림의 썩은 부위가 이토록 많다. 그래서 서글프기도 했다. 더 나아지고자 만든 무관이련만, 결과를 보라.
“후보생 5년, 생도 4년. 악 교관님, 서글프겠어요? 꽤 애착을 보인 제자 같은데, 이 모양 이 꼴이어서.”
냉소적인 천무린의 말에 악교운이 씨익 웃었다.
“무슨 말을 하는 줄 모르겠구나.”
“……눈앞에 있는 이 모양 이 꼴을 보고서도요?”
“지금 내 눈앞에 말이냐.”
악교운이 소화진과 천무린을 훑으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몇 번이나 시선을 오가던 악교운은 천무린에게 시선을 고정하더니 이어서 하는 말은 간단했다.
“어차피 탈바꿈시켜 줄 것 아니냐? 네 녀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