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제40화
숙고해 보겠다는 말과 함께 사라진 악교운은 불과 사흘 뒤에 대련 평가를 치르겠다고 밝혔다. 삼대 무관 비무대회로 인해 어그러진 모든 일정 때문에 총교관인 악교운과 부교관들은 무척 바쁘게 움직였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는,
“천무린.”
“어? 이제는 17번 후보생이 아니라 천무린이라고 불러 주시네요?”
“쓸데없는 말은 됐고, 정말 자신 있나?”
나는 악교운의 집무실에 들어와 있었다.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은 다름 아닌 악교운의 것이었다.
독대를 한 채 바라보고 있는데, 내가 어깨를 으쓱인다.
“……어차피 마인을 잡는 것도 이 모든 과정에 포함되어 있고, 내가 키운 놈들인 만큼 다 같이 올라가면 좋잖아요.”
키우다니.
고작 반 년 가르쳐 놓고 키우니 뭐니, 게다가 같은 동급생인 주제에.
악교운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 참았다.
“그건 그렇고, 그거 물어보려고 여기에 부르신 거예요? 나 바쁜데.”
……악교운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툭툭 불거진다.
“어? 태양혈 도드라진다. 성취가 제법 있었던 모양이에요?”
삐딱해진다.
그렇게 악교운은 결국 총교관으로서의 위엄 따윈 개나 줘 버리고 그 자리에서 천무린을 마구 두들겨 팰 생각을 했지만.
“……대련 대진표 구성해 달라고 말하려고 부르신 거죠?”
악교운의 눈에 핏발이 서는 것을 보고 나는 황급히 이야길 꺼냈다.
아직은 악교운이 나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기에 나는 재빨리 선수를 쳤다.
암만 그래도 내가 처맞기에는 자존심이 상하잖아.
화두를 돌린 내 이야기가 적중했는지, 악교운의 붉어졌던 눈빛이 이내 가라앉으며 한숨을 내쉰다. 호흡을 고르고 나니 금세 차분해지는 악교운이었다.
“알고 있었나?”
“대충은요.”
대련을 누구와 누굴 붙여야 적당한 수준인지, 평소 같았으면 그저 무공에 대한 성적으로 나눠서 대진표를 구성했을 것이다.
적절한 공수를 주고받을 수 있고 그로 인해 평가가 가능하도록 구성이 되어야 얼마나 성장했는지 비로소 알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지금은.
“자유 훈련 시간이 무려 한 달이나 주어졌고, 제가 뭐 거의 키우다시피 했으니까 의당 제게 물어보리라 생각했죠.”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앞을 내다보는 시야가 고작 17세의 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혜안을 갖고 있다. 이미 악교운의 생각을 다 읽고 있다는 듯이.
심지어 천무린의 말처럼 한 달간 자신과 부교관들의 손에서 벗어나 이놈이 직접 키운 것도 사실이고.
“알아서 해 주리라고 믿는다.”
그 말에 나는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먼저 말을 하고 싶었다.
대련 대진표에 대한 구성은 가장 시급한 일 중 하나였다.
현재 후보생들 사이의 관계는 직접 힘으로 찍어 누르다시피 하여 만들어 낸 인위적인 것에 불과했다.
개개인마다 해소되지 않은 케케묵은 감정들이 남아서 내가 없을 때면 서로 으르렁거리기도 많이 했다.
이것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커질 문제였다. 단합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전장에서 서로의 등을 맡기고 싸울 수가 있을까.
홧김에 칼침 꽂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을까.
그러다 보니 이번 대련을 통해 그간 쌓인 감정들을 해소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 와중에 호기심이 일었다.
“근데 난 어떻게 하려고요?”
……응?
악교운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나를 바라본다.
“나도 대진표에 넣어요?”
아…….
해맑게 웃는 내 모습에 악교운이 두 눈을 질끈 감는다.
“골치 아프군.”
넣자니 후보생들과 상대가 안 될 것 같고, 그렇다고 안 넣자니 불합리하다는 이야기가 나올 텐데.
“왜 또 어렵게 생각해요? 녀석들한테 물어보면 되지?”
“그게 무슨 말이지?”
“후보생들 중 한 명이 내 상대가 되는 거 아니에요?”
“그건 맞지.”
“걔들한테 물어봐요. 과연 나랑 상대하고 싶은지. 모두 하기 싫다고 하면 그만 아니에요?”
……간단했네.
* * *
총 26차례의 대련이 진행된다. 애초에 사천검법이라는 검술 하나에 국한되어 있기에 많은 대련은 필요치 않았다.
많은 대련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게끔 했는데, 총교관이자 대련의 총감독관이 된 악교운을 제외하고는 담진, 배단아를 비롯한 부교관들이 각자 연무장에 흩어져 대련의 감독을 맡았다.
그리고 대련이 진행되기 하루 전, 대진표가 구성되어 모든 후보생에게 통보되었다.
“뭐야?”
“내가 너랑 비무를?”
“박 터지게 싸우겠네.”
대진표를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짓는 이들도 있었고, 서로 으르렁거리던 사이라서 차라리 잘됐다고 소리치는 이들도 여럿 보였다.
그중에서,
“나보고 황태랑 싸우라고?”
“싫어?”
송무가 대진표를 바라보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송무에게 황태는 늘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바라만 보아도 겁이 났으며 늘 악몽을 꾸게 만들었던 존재였다.
지난 5년간, 가장 많은 괴롭힘을 당했던 것은 천무린과 송무였다.
하지만 천무린은 그 모든 것을 깨부쉈고, 송무는 혼자가 되었다.
만년 꼴찌라는 이름으로 그 누구도 지켜 주지 않은 외로운 싸움을 해야 했고, 이유도 없이 자행되는 도가 지나친 장난을 받아 내야만 했다.
지금이야 그 기억이 희미해졌다고는 하나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완벽하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과연 이길 수 있을까?”
지금도 황태를 바라보면 덜컥 겁을 집어먹는 송무였다.
비록 현재는 황태가 송무뿐 아니라 그 누구도 건드리지 않지만.
황태뿐 아니라 수많은 후보생들을 괴롭게 만든 녀석들이 또 있었다.
명진, 남사익, 황태.
내가 왜 놈들을 유독 짓밟았겠는가.
다 사람 만들려고 그리 짓밟았다.
다행히 그 효과가 보여 놈들은 이제 다른 후보생들을 괴롭히지 않았다. 지들이 약자가 된 마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니 이유 없이 맞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 안 거겠지.
하지만 그게 나로 인해 해결된 것이기에 마음속 응어리가 전부 해소되진 않은 모양이었다.
“안다. 그 마음.”
나는 송무에게 다가가 나직이 말했다.
“도망가고 싶으면 도망가라. 하지만.”
늘 모두가 보는 앞에서 무시당했고, 멸시와 천시가 어린 시선으로 모든 이들에게 창피를 당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피하면 더 이상 네가 황태의 그늘에서 벗어날 기회는 아마 없을 거다.”
그 말에 송무의 눈빛이 흔들렸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네 모습을 보여라. 쓰러져도 좋고, 무너져도 좋다. 단, 네 의지를 끝까지 보이는 거다.”
이젠 네가 알아서 할 차례다.
아마 힘들 거다.
설화린 때보다도.
딱히 부정적인 감정이 없었던 설화린과의 비무는 그저 비무에서 그칠 뿐이지만, 황태와의 대련은 다르다.
겉으론 황태와의 싸움이지만, 실상은 자기 자신과의 내적 싸움이 될 테니까.
황태가 두려워서 도망치던 나날들, 한 번을 덤비지 못하고 처절하게 짓밟혔던 자신의 모습이 담긴 심마(心魔)와 싸워야만 하겠지.
그것은 비단 송무와 황태의 사이뿐 아니라, 수많은 후보생들의 사이에서 벌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심마를 깨뜨린 이들만이 올라간다. 그렇게 성장하는 것이다.
“……네 신념을 지키려면, 혹은 네가 다른 누군가를 지키려면 반드시 힘이 필요하다.”
몸을 돌리며 송무에게 조용히 말했다.
“응원한다, 송무.”
진심이었다.
* * *
“지금부터 대련 평가를 실시한다. 살의가 있는 손속은 엄금하며 불상사가 발생할 시, 교관들이 개입하여 제재를 가할 것임을 반드시 숙지하도록.”
육합전성이 연무장 전체를 떨어 울렸다.
진중한 음성이었다.
그가 이토록 내공을 실으면서까지 말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진검이 아닌 목검이라도 상대방을 해할 수 있는 이 대련 평가는 가장 사건 사고가 많이 일어나는 데다,
‘자칫 잘못하면 눈이 돌아가 서로를 죽일 수도 있는 대진표를 짜 오다니.’
악교운은 대진표를 보고 그만 혀를 찼다.
아무리 봐도 서로 앙금이 있는 사이로만 쏙쏙 골라서 대진표를 구성했다.
그래서 악교운은 부교관들에게 긴장을 절대 늦추지 말라는 이야길 전해야만 했다.
“각 부교관들은 후보생들의 대련 준비가 끝났다고 판단되면 각자 진행 후 보고하도록!”
그렇게 말을 하는 와중에, 악교운의 옆에 서 있는 한 사람.
천무린이었다.
“여기 단상 위가 역시 최고의 자리네. 아주 잘 보이네요.”
“일부러 대진표를 그렇게 구성한 건가?”
“예.”
“왜지? 다들 죽이려고?”
“에이, 무슨. 죽이긴 뭘 죽여요? 참 이상한 사람이네.”
……이상하다고?
악교운이 쓰읍 하고 위협적인 소리를 내니,
“앓느니 죽지. 에휴, 알았어요. 말해 주면 되잖아요. 말해 주면.”
“얼른 말하도록.”
귀찮다는 듯이 말하는 녀석에게 자꾸만 손이 올라간다.
“원래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예요. 싸우면서.”
……너는?
내 말에 악교운은 입가가 자꾸 비틀리는지 간신히 표정을 관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말했죠. 처음에 황태 놈 팰 때.”
“무엇을 말인가?”
“기억 안 나요? 불과 몇 개월 전에 내가 자유 연무 신청하겠다고 한 날 있잖아요.”
「이게 무관입니까? 이게 애들 훈련하는 곳이냔 말입니다. 죄다 한곳에 몰아넣고 평등, 공정 따윈 개나 줘 버리고 각자 잘사는 놈들끼리 뭉치고, 센 놈들끼리 뭉치고. 약한 놈은 그저 눈치나 보고 쥐어 터지고 말입니다. 애당초 무관을 만든 목적이 이거냔 말입니다.」
기억났다.
“기억났어요?”
“기억이 날 수밖에. 그날부터 네가 아주 막 나갔으니까.”
“무슨 말을 또 그렇게 해요? 나 참, 쑥스럽게.”
……어떻게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악교운은 자연스레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천무린이 꼬집은 사천무관의 폐해에 대해 다시 한번 말이다.
“해소되지 않으면 계속해서 잠식됩니다. 감정의 골은 점점 깊어 가고, 그 골에 깊게 파묻힌 감정에 잠식돼 열등감 혹은 자괴감에 허우적거려서 자기 자신을 더욱 심마에 빠져들게 만들죠. 특히 어린놈일수록 더욱요.”
그 말에 악교운은 차마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여기서 해소하는 놈들은 이후에 날개를 달 것이고, 못 하는 놈들은 날개를 달 수 있도록 도와줘야죠.”
“…….”
“그게 바로 무림학관의 일이잖아요.”
치기 어린 아이의 모습이 아닌, 깨달음을 얻고 수도 없이 많은 일을 겪은 어른의 모습으로 말을 하는 천무린에게 할 말을 잃는 악교운이었다.
‘……정말로 어쩌면 사천무관의 홍복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