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제39화
하지만 내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는 건 따로 있었다.
다름 아닌, 이 세 놈을 제외하고 다른 후보생들의 말이 내 가슴을 후벼 판다.
“하씨, 부러워…….”
부러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을 거 같은데.”
“……가자! 저 녀석들 표정을 봐! 그간 쌓였던 게 다 풀리는 느낌인데!”
왜 이 세 놈들에게 기회를 뺏긴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건데.
얼마나 두들겨 맞았을까.
고통에 잇따르자, 단전 끝에서 조금씩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피어오르는 것은 역근경의 기운이었다.
금빛 서기가 몸 전체를 감돌면서 격통을 조금씩 내리누른다. 분명 전에는 일각 이상 이어지던 격통이 지금은 반각도 채 지나지 않아 사라진다.
……오늘부터 부처를 믿기로 했다. 오, 부처님.
그렇게 조금씩 기운이 돌아오니 눈에 생기가 돈다.
활기가 돌아오고 있는 와중에 명진의 발이 내 가슴팍을 찬다.
퍼억! 퍼억!
하하, 녀석들 참. 나를 패는 데 아주 진심이네.
퍼억! 퍼억!
하하, 이제 그만해도 될 거 같은데.
퍼억! 퍼억!
하하……. X발.
당최 멈출 생각을 안 한다. 무아지경에 빠진 것 같다.
“와하하하! 너네도 지금 아니면 얘 못 팰걸?”
“필멸무린! 난도무린!”
“며칠 못 일어나게 쥐어 패! 죽여! 아주 그냥!”
눈깔들이 돌아 버린 것 같다.
그렇게 얼마를 더 발길질을 해 댔을까.
세 명은 숨을 몰아쉬며 다른 후보생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부럽지?”
“후우, 나 오늘 간만에 악몽을 꾸지 않을 거 같아.”
“오늘따라 세상이 밝아 보여.”
땀을 훔치며 후련해하는 세 사람은 몸을 돌렸다. 쓰러져 있는 내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하하, 그렇구나.
그렇게 맞다 보니 나도 머릿속이 조금씩 비워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잘못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내가 잘못 생각했다.”
뚝.
후보생들의 자리로 되돌아가려던 세 사람의 움직임이 마치 거짓말처럼 동시에 딱 멈췄다.
내가 말을 꺼내니, 그제야 세 명의 표정이 온전히 돌아오면서 점차 창백해진다. 하도 때리다 보니 숨조차 거칠어져 호흡도 고르지 못했다.
“내가 잘못 생각했다. 잘못 생각했어.”
그 말에 세 사람은 서로를 돌아본다.
무얼 잘못 생각했단 말인가.
“내가 ‘그냥’ 팼으면 안 되었는데 말이지.”
나는 미련하게 살기를 피워 올리지 않았다.
절대 죽일 생각? 어후, 전혀.
역근경으로 인해 부처의 자비심과 부동심이 잔뜩 생겨난 내가 아닌가.
곧 정파의 기둥이자 대들보가 될 아이들인데, 어떻게 죽일까.
“친우이자 벗과 같은 녀석들에게 어떻게 이리도 팼을까.”
그 말에 세 사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빙긋 웃는다.
“그, 그렇지? 역시 사람은 역지사지가 되어 봐야 안다고 했다. 무린.”
“그래! 우리 이제 샘샘이야.”
“그럼, 그럼.”
세 사람은 내 말을 듣고 환하게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에 나도 따라 웃는다.
“샘샘? 하하, 그렇지. 근데 셈을 잘못한 것 같네. 친구들.”
“어?”
“그냥 패는 게 아니라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끔 패 줬어야 하는데 말이야.”
“히이익!”
“튀어!”
“도망가아아아아!”
명진과 남사익, 그리고 황태는 고작 반각 동안 해소한 응어리로 인해…….
“다 뒈졌어! 샘샘은 X랄이고 염X이다! 이 새끼들아!”
내 다시는 이놈들이 기어오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리.
부동심? 자비심? 오, 부처여!
당연히 자비심을 가득 담아 절대 죽이지는 않겠습니다!
* * *
악교운은 도열해 있는 8기 후보생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문을 열려다가 순간 흠칫한다.
천무린이 히죽히죽 웃고 있다. 무복 주변은 붉게 적셔 있는데.
저게 당최…….
그러다가 뒤에 나란히 서 있는 세 사람이 보였다.
명진과 남사익, 황태의 두 눈엔 초점이 없었다.
저런, 어쩌다가.
“크흠흠.”
악교운은 헛기침을 몇 번 하고 고갤 돌리더니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앞으로 3개월 후에 삼대 무관 비무대회가 열리는 것은 다들 알고 있겠지?”
“예!”
“그렇다면…….”
악교운이 말을 이어서 하려는 순간,
“크으, 드디어 삼대 무관 비무대회인가.”
“7기 선배님들은 황금 기수라고 불리니 압승하지 않을까?”
“이번에야말로 우리 사천무관이 우승할 때지.”
……빠직.
후보생들이 쉬지 않고 입을 연다. 그의 한마디에 열 마디는 더 나온다.
총교관인 악교운의 기세에 짓눌려 눈 한번 못 마주치던 놈들이 이제는 그의 존재감을 잊은 채 떠들어 대고 있었다.
이렇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다름 아닌 단 한 놈 때문이었다.
찌릿.
악교운의 시선이 단 한 놈에게로 날아가 꽂힌다.
거, 할 말 있으면 말을 하면 되지 왜 눈에 힘을 팍 주고 그러나.
그 시선을 받은 나는 헛기침을 몇 번 하며 후보생들에게 고개를 돌린다.
“……이것들이! 어디 총교관님이 말씀하시는데 떠들고 X랄들이야? 어? 콱 마! 다 뒈지고 싶어?”
내 으름장에 잡담을 나누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숙연해진다.
그리고 내 한 마디, 한 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집중됐다.
움찔거리고 있는 명진과 황태, 남사익이었다. 찍소리도 못 한 채 가만히 시선을 내리까는 세 사람이었다.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다시피 한 세 사람은 썩은 동태눈으로 겨우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후후후.”
역시 사람은 제대로 패고 봐야 해. 이젠 더 이상 기어오르지 못하겠지?
좋아, 좋아.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고 있는 내 모습에 악교운은 눈을 질끈 감았다.
뭔가 꼬여도 단단히 잘못 꼬였다.
13세부터 17세에 이르기까지 악교운의 권위는 그야말로 절대적이었는데, 단 반 년 만에 무시당할 정도로 바뀐 것은 물론이거니와 죄다 천무린처럼 성격이 변해 가는 것이.
어째 날이 갈수록 불안해진다.
“하실 말씀 있으시면 하십시오!”
안 그래도 하려고 했다, 이놈아.
“……우리도 참가하게 됐다. 삼대 무관 비무대회. 예비 생도의 자격으로.”
그 말에 꾹 닫혔던 입이 절로 벌어지는 후보생들은 벙찐 얼굴로 서로를 바라본다.
갑자기 삼대 무관 비무대회에?
“……그게 무슨?”
여태 단 한 번도 일어난 적 없던 상황이 자신들에게 일어난다고 하면 과연 어떤 말이 나올 수 있을까. 그저 멍해질 뿐이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은 씨익 웃는다.
“뭐야, 합법적으로 다른 놈들을 팰 수 있는 거야?”
……다시 한번 눈을 질끈 감는 악교운이었다.
어떻게 생각을 해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난놈은 난놈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와중에, 정신을 차린 한 후보생이 손을 든다.
“총교관님! 질문 있습니다.”
“말하도록, 29번 후보생.”
송무였다.
“……비무대회에 참가하게 된다면, 그에 따른 2차 진급시험과 남아 있는 평가들은 어떻게 진행되는 것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있구나, 아직 멀쩡한 놈이.
정말로 다행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악교운은 고갤 끄덕이며 입을 연다.
“제법 괜찮은 질문을 했군. 일단 삼대 무관 비무대회는 사천무관 단독으로 어찌할 수 없는 문제이기에 부득이하게 일정을 모두 조율하게 되었다.”
호흡을 길게 내쉰 악교운이 말을 잇는다.
“따라서 대련 평가는 한 번, 조별 평가 한 번, 진급시험 역시 단 한 번으로 조율될 것이다.”
그 말에 후보생들의 눈을 떼구르르 굴린다.
이게 자신들에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 따지는 중이었다.
대련 평가가 2번에서 1번, 조별 평가 역시 2번에서 1번, 진급시험도 2번에서 1번.
어찌 보면 귀찮은 과정이 사라져서 좋다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교관님!”
설화린이었다.
“질문하도록.”
“조별 평가는 일정상 어쩔 수 없다고 치더라도 대련 평가가 두 차례 치러지는 것은 첫 대련 이후 깨달음을 소화하고 한 차례의 성장을 거친 후 다음 대련에 숙고하여 임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기 위한 것으로 압니다. 진급시험 역시 마찬가지라고 사료되고요.”
호, 아주 요목조목 말을 잘하는데?
내가 짧게 감탄하고 있는데, 그 말을 들은 악교운의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후보생들에게도 납득이 될 만한, 혹은 합당한 무언가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걱정하지 말도록.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해 줄 테니.”
애매모호한 대답에 설화린은 입을 오물거렸다.
무엇을, 어떻게 해 주겠다는 말인지 명확하지 않으니 답답함이 앞선 듯하다.
근데 뭐 그리 다들 답답하게 하는지.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후우, 17번 후보생?”
말해 보라는 듯 악교운은 턱짓을 했다.
“그냥 다 같이 진급시켜 주시죠?”
뜬금없는 내 말에 악교운은 눈살을 찌푸렸다.
“헛소리는 집어치…….”
“헛소리가 아니라 당근과 채찍을 주려면 제대로 주시라는 말씀입니다. 애당초 8기 후보생들이 예비 생도의 자격으로 참가를 시키는 건 윗선에서 뭔가 목표하는 바가 따로 있어서 그런 모양인데, 그 목표를 이루게 하려면 저희에게도 뭔가 떨어지는 게 있어야 되지 않겠어요?”
그 말에 후보생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뭐야, 저놈. 왜 저래?
“갑작스럽게 일정을 조율한 만큼 평가든 뭐든 급해지셨을 텐데, 그 모든 평가가 결국에는 진급을 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하기 위해서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럼 결국 8기 후보생들이 승리를 하면 전원 진급, 아니면 평가에 따른 개별적 진급으로 정하시면 이놈들이 죽어라고 열심히 하지 않겠습니까? 뭐, 지금도 죽어라 하고 있지만.”
후보생들의 마음이 찡해진다.
사람 패는 것만 할 줄 아는 놈인 줄 알았더니, 이런 기특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원래 처음부터 잘해 주다가 한 번 실수하면 큰 실망감을 불러일으키지만, 반대로 처음부터 악질이었던 놈이 조금 잘해 주면 그 사람이 새삼 달라져 보이는 법이다.
천무린의 말 한마디는 후보생들의 가슴을 후벼 파면서 감동에 젖어들게 만들었다.
‘나…… 오늘부터 천무린 편이야.’
‘앞으로 천무린한테 뭐라고 하는 놈은 다 죽었어.’
‘쳇, 녀석. 그런 마음으로 우릴 대하고 있었어?’
코끝이 찡해진 후보생들이 천무린을 바라보는데, 천무린의 말이 이어진다.
“그리고 제가 반드시 우승시키죠. 어떻게 해서든지.”
……어?
“숙고해 보겠다. 혼자만의 결정은 버거우나 네 말에 일리는 있다고 판단한다.”
“저 믿죠? 이놈들 아직 비무대회에 나가려면 멀었잖아요. 쥐어 패서라도 우승시킬게요.”
……그럼 그렇지.
잠깐이나마 감동을 먹은 내가 병X이지! 아오!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천무린에게 천벌이 안 떨어지나 생각했다.
이미 천벌을 받은 몸인 줄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