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제126화
졸지에 8기수를 담당하는 세 교관이 동시에 자리를 비우게 되었다.
“속은 후련하나, 빈자리를 어떻게 메워야 할지…….”
“에이, 요즘 애들이 그냥 애들로 보이시나요. 저희보다 영리하고 똑똑한 거 이번에 이미 증명되었잖아요.”
똑 부러지는 그녀의 말에 담진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자신이 몇 년이나 끙끙 앓으며 당백진까지 찾아가 논의했던 문제를 눈 깜짝할 새에 해결해 버린 아이들이었다.
어른보다 낫다는 말이 여기에도 해당되리라.
“……그리고.”
배단아가 진저리를 치며 고갤 저었다.
“그 녀석이 있잖아요.”
……아.
걱정할 필요가 없겠구나.
자신들보다 한 수 위, 교관들을 한 아름 데리고 와도 그 녀석보다 생도들을 잘 다루는 이는 없을 것이었다.
물론 한편으론.
“애석하군요.”
“어쩌겠어요. 운명인 것을. 아마 우리가 자릴 비워서 더욱 슬퍼질 걸요, 아이들은. 야차보다 더한 야차의 손아귀에 있을 테니까.”
야차보다 더한 야차.
그렇다. 사천무관에는 두 명의 야차가 있었다.
전(前) 야차라면 의당.
힐끗.
악교운이 넋이 나간 채로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하아, 어쩌다가. 어쩌다가아. 그 양반한테 다시 구실을 주고야 말았다.”
무슨 뜻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는 그의 모습. 넋이 나가 있긴 했지만, 평상시의 차분하고도 차가운 표정은 여전했다.
하지만.
부르르르.
담진은 덕유명을 개박살 내던 악교운의 모습을 떠올리곤 몸을 떨었다. 어찌나 살벌하던지 담진과 배단아는 덕유명을 패고 있는 악교운을 말리느라 한바탕 진을 뺐다.
장로를 상대하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고 할까.
“간만에 악 교관님 본모습이 나왔죠?”
“아, 그렇죠. 아마 몇 년 만인 거 같은데, 아직도 눈에 선하네요.”
배단아 역시 공감한다는 듯 고갤 저을 따름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악 교관님이 진짜 모습을 보일 때면 천무린 생도도 좀 더 수련이 필요할 거 같은데요? 하핫.”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마요.”
“크흐흐흠!”
악교운과 천무린의 조합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요즘 간혹 보이는 두 사람의 조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나저나 장로님들은 어찌 될까 궁금합니다.”
“님 자는 좀 빼죠? 이젠 장로도 아니잖아요? 외인(外人)을 왜 그렇게 부른대, 참나.”
단호한 그녀의 말에 담진은 진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당백진의 엄포 이후 한 식경 만에 만세를 부르던 그녀였다. 적응에 대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빨랐다. 특히 미모가 빼어나서 은근한 눈길로 추파를 던지는 장로들을 끔찍이 싫어했던 그녀로서는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놈들’보다 우리부터 신경 써야죠.”
“……하긴, 남 걱정을 할 때가 아니긴 합니다.”
세 장로는 축출, 문제를 일으킨 세 생도 역시 퇴관 조치까지 끝냈지만, 문제는 본인들이었다.
“단순히 정직이 아니고 호위대라니.”
배단아는 눈을 게슴츠레 뜬 채 생각에 잠겼다. 그런 그녀에게 어깨를 으쓱인 담진이 걱정 말라는 투로 입을 열었다.
“호위대라고 하면 사천무관주님의 일정에 맞춰 옆을 지키는 것이 전부 아니겠습니까. 그리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그렇겠죠? 호호, 혹 3개월간 징계가 아니라 관주님이 우릴 많이 아끼셔서 편의를 봐주기 위함이 아닐지! 그런 생각도 한답니다. 호호호.”
“관주님처럼 속이 깊으신 분이라면 충분히 그럴 것 같습니다. 가능하다면 이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검술 훈련에 매진해야겠군요.”
펼쳐질 꽃길을 그리며 화기애애한 대화를 이어 가는 이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목소리.
“속 편한 소릴 잘도 떠드는군. 그렇게나 그 양반을 봐 놓고 아직도 모르다니…….”
응……?
악교운의 음성이 잘게 떨린 채, 점차 창백해진 표정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에? 그게 무슨 말이에요?”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배단아와 담진의 말에 한숨을 푹 하고 내쉰 악교운이 고개를 저었다.
“호위…… 대는 사라진 지 이미 오래야.”
“에? 호위대가요?”
“호위대는 진작에 사라졌어. 애당초 말이 안 되지. 그 양반을 호위한다는 것 자체가.”
하긴.
당백진이었다.
이름 석 자만으로 웬만한 사람은 범접할 수도 없는 인물.
정파 무림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인물이자, 중원 무림 전체로도 손꼽히는 인물이 아닌가.
대체 누가 당백진을 해할 수 있으랴.
“그렇다면, 호위대는 왜……?”
담진의 말에 악교운이 한숨인지 흐느낌인지 모를 것을 내뱉으며 억지로 말을 이어 갔다.
“흐으, 비무를 가장한 폭력을 행사하겠다는 것이겠지.”
에?
담진과 배단아가 벙찐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뭔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는 표정으로 악교운의 해명을 기다렸다.
“무관주가 해야 할 각종 행정, 사무, 결재까지 해결하는 것은 물론이요, 무관주의 직속 비무 상대가 되는 것. 그것이 호위대의 임무지.”
……당최 무슨 말을.
“그것도 3개월 내내. 본인 업무로 쌓인 화(火)를 우리에게 풀겠다는 거야.”
허얼.
배단아와 담진의 표정이 무언가 끔찍한 것이라도 본 것인 양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악교운은 알고 있었다. 당백진과 동고동락을 한 지 어언 팔 년.
사천무관에서의 삶뿐 아니라 정마대전에서의 인연까지 생각한다면 십 년이 넘는다.
어지간한 이들보다 깊은 인연이라고 할 수 있을, 그런…… 후회스러운 인연의 끈으로 이어진 당백진이란 인물은.
아마.
“……천무린보다 더한 양반이지.”
엑.
그럴 리가.
세상에 그런 인간이 존재한다고?
* * *
천무린.
멸마신군(滅魔神君).
호사가들은 말한다.
시대를 타고난 풍운아(風雲兒)이자 기린아(麒麟兒)라고.
공공연한 천무린의 기행, 아니 기행을 넘어선 기사(奇事)에 가까운 행동을 보노라면 엄지를 척 하고 치켜세울 만했다. 그의 본모습을 모르는 이들이라면.
삼대 무관 비무대회의 우승.
쌍용검 파평과의 승부에서 승리.
정파 무림을 요동치게 한 마공서 회수의 선두 주자.
뿐만 아니라 사천무관 내에서의 그의 입지는 더욱 공고해져 이젠 철옹성이나 다를 바 없었다.
7기수 우승자인 사일검룡 이백이 직접 천무린에게 지도를 받겠다고 선언했고, 자존심 강한 진량마저 승낙했기에 7기수 전체가 천무린의 그늘 아래 들어갔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다 뒈졌어어어어!”
“대가리부터 부숴! 조지라고!”
“강한 놈이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긴 놈이 강한 거야! 이 새끼들아!”
“아니, 선배! 천무린 훈련법 제7장을 수행하지 않았다고? 용납할 수 없지. 빨리 대가리 박아요. 두들겨 패기 전에.”
“말로 고쳐지는 게 어딨어? 사람을 고치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어. 일단 두들겨 패! 두들겨 패면 다 해결된다고 했어.”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을 문제가 생겨났다.
7기수, 8기수 사이에 묘한 경계 따윈 사라졌지만, 선을 넘어도 너무 넘어 버린 것이다. 하나같이 천무린화가 되어 버린 이들을 바로잡기엔 이미 늦어 버렸다.
근묵자흑(近墨者黑).
선량하던 이들이 천무린이라는 인간을 만나게 되면서 먹칠이 된 것이다.
더 먹칠이 되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고 소리치는 이들도 제법 있었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날이 갈수록.”
“강해져 간다는 게 문제겠지요.”
“두각을 드러내고 있어요. 어째선지 실전적이고 효용적인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고요.”
그리고 그것을 흐뭇한 미소를 띤 채 바라보고 있는 악의 종주가 있었으니.
“옳지! 잘한다, 잘한다! 가르친 보람이 있어!”
박수까지 쳐 가며 낄낄거리는 천무린이었다.
“역시 떡잎부터 다르다고! 양아치 출신들이 또 위아래가 없잖아. 황태나 명진이 봐 봐! 선배라고 봐주는 거 없이 대가리부터 부수려고 하는 거! 저거, 저거! 좀 본받아 봐! 이 새끼들아!”
칭찬인지 비아냥거림인지 모를 소리를 외치는 천무린의 모습을 한차례 떠올린 교관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뭐랄까.
잘못된 느낌은 드는데.
아주 많이 잘못된 것 같긴 한데.
“아무도 말리지 않네요.”
“말리지 않는 게 아니라 못 말리는 게 아닐까요?”
그렇다. 이젠 말릴 수가 없다.
그런데 뭐?
저 천무린보다 더한 인간이 있다고?
그런 인간이 있을 리 없지.
부정하는 두 사람에게 자조적인 미소를 띤 악교운이었다.
“……믿고 싶지 않겠지.”
이미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악교운의 우울한 한마디가 두 교관의 귓가에 맴돌 뿐이었다.
* * *
“후후.”
“흐흐흐.”
“끌끌끌끌.”
한두 명씩 웃음을 터뜨린다. 누가 보면 단체로 정신이 나간 게 아닌지 의심할 만한 모습이었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8기 생도들이었다.
힐끗.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송무, 태강, 황태와 명진, 진무양과 남사익, 낭소소, 신혁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통제할 사람이 없어졌다는 건?”
“그건 곧 한 가지를 의미하지!”
“자유!”
“와하하하하!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야!”
“꺄하하!”
“꺄아아아!”
모두가 동시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1학년 생도가 되고 수업이란 수업은 모조리 연기되었다. 총교관인 악교운을 비롯하여 검술 교관 담진, 이론 수업 교관인 배단아까지.
모조리 자리를 비웠을 뿐 아니라.
“때마다 난리 치는 놈도 어디 가고 없고!”
“지금쯤 관주님한테 징계 받고 있을 놈이 여기에 어떻게 있겠어!”
“끌끌끌!”
“이대로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좋겠다.”
왁자지껄하게 떠들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천무린의 부재!
혹시라도 그를 욕하기라도 하면 등장해서 두들겨 패고!
눈에 띄기라도 하면 이유 없이 쥐어 패고!
마음에 안 든다고 두들겨 패고!
조마조마해서 뒷담화는 꿈도 꿀 수 없었던 나날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마음껏 그를 욕하고 비난하고 힐난해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이 없다는 것.
송무 역시 흥에 취해 신나게 이야길 떠들고 있는 와중에,
……응?
휙, 휙!
고갤 좌우로 돌려 자세를 바꾸었지만, 역시나 없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태강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왜 그렇게 안절부절 못 하냐. 뭐 해?”
“태강아.”
“왜?”
“없어.”
“뭐?”
“없다고!”
대뜸 없다니, 뭐가 없다는 말인가.
태강이 눈매를 좁히며 당황해하는 송무의 어깨를 잡고 진정시켰다.
그러나.
“화, 화린이가 없다고!”
진정시키는 태강의 손을 뿌리치고 황급히 자리에 일어난 송무가 주변을 맴돌며 설화린을 찾았다.
“응? 난 또 뭐라고. 해우소라도 간 거겠지. 뭐야, 너 화린이 좋아하냐?”
“무슨 헛소리야! 화, 화린이는 무린이가 없을 때……. 어! 찾았……!”
제자리에 떡하니 멈춘 송무의 시선을 따라 태강 역시 고갤 돌렸다.
대략 오 장은 될 법한 거리인 기록실 별관 지붕 위에 걸터앉아 무언가를 적는 그녀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감탄…… 이 아니라 송무는 창백해진 상태로 소리쳤다.
“자, 잡아야 해!”
억눌린 음성이 터져 나오자, 8기수 생도들이 하나둘 시선을 돌려 송무의 이상 행동을 지켜봤다.
“뭐?”
“왜 저래?”
“송무야, 뭐 잘못 먹었냐?”
“잡아야 한다고! 화린이를 잡아! 잡아야만 해!”
두서없는 송무의 말에 표정을 찡그린 8기 생도들은 이내 곧 경악성을 터뜨려야 했다.
“무, 무린이가 화린이한테 말해 놨다고! 자기가 부재할 때면 조금이라도 놀고 있거나 시시덕거리는 연놈들 있으면 죄다 적어 놓으라고 했다고!”
“뭐어어어! 이런 미친놈이! 그걸 왜 이제 말해애애!”
생도들의 표정이 급변하여 몸을 일으켰다.
있어서도 안 되고 벌어져서도 안 될 일이었다.
혹여 천무린에게 이 사실이 귀에 들어간다면?
부르르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러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사뿐.
“읏차, 다들 팔자 좋네요? 후훗.”
지붕 위에서 막 몸을 일으킨 설화린이 생긋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요. 저도 살아야죠? 여러분을 팔면 제가 살 수 있답니다. 면죄부를 받기로 약속했거든요! 후훗.”
그렇다.
설화린은 자신을 위해 친우들을 팔아 버렸다.
“……저, 저! 미친! 잡아! 잡아야 해!”
“으아아아아! 잡아! 뺏어야 해!”
표정이 급변한 생도들이 모두 경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막 도망가려는 설화린을 바라보면서 더욱 박차를 가했다.
“화린아아아! 살려 줘어어!”
그렇다.
천무린이 없어도 바람 잘 날 없는 곳이 바로 이곳.
사천무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