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화
제125화
부끄럽다.
창피하다.
면목 없다.
낯짝을 들 수가 없다.
모든 단어를 갖다 붙여도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장로들은 고개를 깊이 숙여야만 했다.
촤락, 촤라락.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 가득한 곳. 다름 아닌 사천무관주의 집무실이었다.
묘한 정적 속에 들리는 것이 종이 넘기는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장로들은 그 소리에 몸을 잘게 떨어야만 했다.
“……정말 쪽팔린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게 아닌가 싶군.”
섬찟할 정도의 무거운 중저음.
사천무관 내에 그와 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이는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사천무관주, 당백진.
“악교운, 담진, 배단아. 세 교관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다라……. 갑작스러운 기습이었다고는 하나, 장로라는 작자들이 가진 일신의 무력(武力)이 이렇게나 무력(無力)할 줄이야.”
그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세 장로는 움찔거려야 했다. 움찔거리다 못해 목이 움츠러들어 자라목이 되었다.
반응을 보이는 세 장로 따위는 눈에 보이지 않는지,
“전부 다 제쳐 놓고 사천무관에서 명색이 서열 2위인 대장로의 자리에 앉은 이의 얼굴이 이리도 걸레짝이 되어 버렸군. 이미 얼굴을 알던 게 아니면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야.”
거침없는 언변에 얼굴이 절로 붉어졌다. 그러나 덕유명은 차마 고갤 들 수가 없었다.
무력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고 믿었던 그였기에 더욱 참담했다.
무관 내에서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질 거라고 그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어느 누가 감히 대장로인 자신을 상대로 주먹을 뻗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나.
그러나.
막상 당해 보니 참담했다.
“더 이상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그 말에 세 장로들이 멈칫했다. 물론 창피하다. 부끄러웠고, 다신 고갤 들 수 없을 정도로 치욕을 당했다.
허나 장로의 자리를 내놓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그게 비록 자신들이 검을 놓은 채 수련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은 결과물이라고 할지언정 말이다.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아랫입술을 질겅거리던 덕유명이 고갤 들었다.
몇 마디라도 반론을 하기 위해 고갤 들려는 찰나,
쿠궁.
고개가 절로 꺾였다.
“덕유명 대장로, 언제 내가 당신에게 반론할 기회를 주겠다고 했지? 왜 고개를 드는가? 무슨 자격으로.”
태산 같은 기운이 세 장로의 몸을 찍어 눌렀다. 당장이라도 단두대에 참형을 당할 것 같은 공포감이 세 사람을 휩쓸었다.
‘……제, 제아무리 차이가 난다고 해도 이토록 차이가 날 수가!’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반항조차 할 수 없다니.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 빠진 세 장로들에게 더없이 한심하다는 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낯짝으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나 같았으면 진즉에 접시 물에 코 박고 죽었을 게야. 왜 아직도 여기에 있는 것인지 모르겠군. 나 원 참.”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을 하는 당백진의 시선에 더 이상 세 장로는 없었다. 사천무관에 없는 이들이었다.
“나, 나는…….”
덕유명이 억지로나마 기세를 끌어올려 한마디 하려는 그 때.
“에이! 거 사람 잡겠습니다. 그래도 항변할 기회를 주긴 줘야죠!”
천진난만한 음성이 들려왔다. 더없이 익숙하기 그지없는, 이 모든 사건의 발단이자 주범인 녀석이 히죽 입꼬리를 말아 올린 채 서 있었다.
“……천무린 생도.”
다름 아닌 천무린이었다.
당백진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
“너 역시 징계의 대상이자 처벌의 대상이다. 경거망동하지 말고 순서를 기다리도록.”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잠깐만 시간을 주세요.”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방금 말했을 텐데.”
“……썩은 부위를 도려내고 어려운 길을 편하게 갈 수 있게 해 준 대가라고 생각하고 어떻게 안 될까요?”
그 말에 당백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썩은 부위.
사천무관을 좀먹는 존재들을 도려냈고, 명분이 없어 어렵사리 세 장로와 정치질을 해야 했던 당백진의 입장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 보상을 이야길 하는 천무린이었다.
“후우, 너란 녀석은……. 반각을 주겠다.”
“에이, 반각까지도 필요 없어요. 두어 마디면 되니까.”
천무린이 한 걸음 다가가 덕유명을 바라본다. 한껏 고갤 숙여 당백진의 압박감에 저항하고 있는 그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많이 편찮은가 본데? 의원에라도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휴, 나이 들어서 이게 무슨 고생이래요? 나 참.”
천연덕스러운 말투, 장난스레 던지는 이야기에 덕유명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한낱 생도 따위가 자신을 조롱하고 있다. 손아귀에 절로 힘이 들어갔고, 당장이라도 장력을 발출하여 제압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당백진이 피어올린 기운은 집무실 전체를 찍어 누르고……!
어?
덕유명의 눈의 초점이 흔들렸다.
지금 당백진이 피어올린 기운은 어느 누구를 향해 발산하는 것이 아니다. 집무실 전체를 찍어 눌렀다.
즉, 덕유명과 두 장로를 찍어 누르던 기세가 천무린에게도 해당된다는 뜻이었다.
꾸국.
‘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경악해야 했다. 기운 때문에 무릎이 꺾여 자신처럼 대꾸조차 할 수 없어야 할 마당에 저렇게 미소를 띠며 자신에게 말을 걸 수 있다니.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덕유명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겨우겨우 고갤 올려다보는데.
“괜찮아요? 의원 데려가 줘요?”
만일 악교운이 아니라 천무린이었더라면.
과연 제압할 수 있었을까. 자신은 감당해 내지 못하는 기세를 저토록 거뜬히 받아 내는 이 생도를.
혹여 그런 상황이 벌어져 천무린에게 일방적으로 당했다면.
고작 1학년 생도에게 개박살이 났다는 소문이 퍼졌더라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무린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덕유명의 어깨를 두드렸다.
“많이 힘든가 보다. 말도 못 하고. 후후.”
그리고 자세를 낮춰 덕유명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오물거리는 입술.
“왜 내가 안 나선 건지 알아요?”
오롯이 그에게만 들리게, 아주 작고 미약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나섰으면 죽었을 거거든요. 파면? 퇴관? 중징계? 개뿔.”
단 한 톨의 살기조차 내비치지 않았지만, 어째선지 저리도 천진한 목소리가 한없이 쇠약해진 노인의 심정에 화인처럼 박혀 들었다.
“지금 당신네들이 뒷배나 봐주고 헛짓하던 녀석들은 아마 영영 사람답게 못 살아갈걸요. 운 좋은 줄 아세요.”
편일현, 고우림, 명천.
세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다.
덕유명이 이곳 집무실에 끌려오기 전, 확인했던 세 사람의 모습은 온몸이 걸레짝이 되어 뼈가 바스러진 것을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아마 제 구실을 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것을 떠올리자, 두려움에 부르르 몸을 떠는 덕유명이었다.
“……이제 그만. 두어 마디 한다더니 말이 많구나. 이제 네 자리로 돌아가도록.”
“끄응, 어쩔 수 없죠.”
당백진의 축객령에 아쉽다는 듯 몸을 일으켜 세우는 천무린이었다.
“아 참, 그럼 이 세 노인들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일신의 무력으로도, 명분으로도, 어느 것 하나 이기지 못한 작자들은 더 이상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겠지.”
“크으, 살벌하네.”
저벅, 저벅.
살벌한 표정을 짓는 당백진의 모습에 어깨를 으쓱이고는 집무실을 나서려는 천무린이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몸을 돌렸다.
“아차차.”
빙글 도는 천무린의 모습에 당백진 역시 고갤 들어 그를 바라본다. 제발 좀 나가라는 표정을 짓는 당백진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점창, 종남, 화산은 어쩐대요? 나였다면 쪽팔려서라도 다신 안 받아 주겠다? 아마 사방팔방 소문이 다 났을 텐데, 아닌가? 장로 짬밥이면 제아무리 교관들한테 털렸다고 해도 받아 주려나? 궁금하네?”
그러고는 문을 열고 나가 버리는 천무린의 모습에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갤 젓는 당백진이었지만.
차마 웃을 수도, 그렇다고 울 수도 없는 세 장로였다.
* * *
징계원에서 벌어진 일은 사천무관을 넘어 사천 무림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당백진은 사천무관의 불명예스러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바로잡겠다는 일념하에 이를 숨기지 않았다.
작심하고 사건에 대해 낱낱이 밝히기 시작하였고, 세 장로에 대한 직위 해제 및 파면을 지시하고 사천무관에서 내쫓았으며, 점창, 종남, 화산에는 따로 전서구로 이 같은 사실을 전달하여 지난 행위들도 소상히 밝혔다.
장로직에 있으면서 생도들의 뒷배를 봐주었고, 금전적인 이득을 취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무공 수련을 게을리 하다가 일개 교관과 면대면 승부에서 제대로 힘도 써 보지 못하고 개박살이 났다는 사실까지.
덕분에 세 장로들은 이제 얼굴을 들 수조차 없게 되어 버렸다.
물론 실명을 밝히지 않고 일개 교관이라고 말한 것은 악교운과 담진, 배단아에 대한 배려 때문이었다. 세간의 관심이 세 교관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 것이다.
“세 교관은 3개월간 정직에 처한다. 또한, 기존에 지급하던 봉급과 모든 금전적인 수당은 금하고 오로지 봉사하는 마음과 열의로 사천무관주 직속 호위대에 편입한다. 정직 기간인 3개월간 호위대 임무를 수행할 것을 명한다.”
일각에서는 세 교관에 대한 처우에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고위급 인사이자 상관인 장로들을 개 패듯이 패 놓고 3개월 정직은 솜방망이 처벌이 아니냐는 불만 때문이었다.
이는 사천무관주 당백진의 자기편 감싸기가 아니냐는 지적과 동시에 그의 권위가 더욱 높아지는 것을 두려워한 이들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사건이 벌어지기 직전, 징계위원회에서 구타와 폭언, 악질적인 행위에 대해 자원 봉사 활동과 20은자 처벌을 내렸기에 그 결과를 바탕으로 징계를 내렸으니 그 어떤 불평과 불만도 듣지 않겠다. 혹 불평과 불만이 있는 자가 있다면 직접 사천무관주 집무실로 찾아올 것을 명하겠다.”
사천무관주인 당백진의 엄포에 볼멘소리는 그만 쏙 들어갔다.
사천무관주와의 독대가 두렵기도 했지만, 반대쪽에서는 대장로와 1장로, 2장로에 더불어 사천무관 내 생도를 가르치는 세 교관이 연루된 사건에 사천무관주가 직접 나서지 않으면 대체 누가 나서는 게 맞느냐는 목소리가 나왔기 때문이다.
“피바람 제대로 불었네. 어휴, 무서워라!”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정말 대단하다, 대단해.”
“어떻게 된 인간이 쉬지도 않고 사건을 만들어 내지?”
“저것도 능력이야, 능력.”
천무린이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생도들이 질린 표정으로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어떻게 바람 잘 날이 없냐고. 단 하루도!
“아니, 그래서 편일현이랑 그 똘마니들은 어떻게 됐는데?”
“……어떻게 되긴. 반불구로 살아야 하는데 말해 뭐해.”
“하여간. 인간들이 잔인하기도 하지. 아무리 그래도 선배들인데 그렇게 손을 악랄하게 쓰면 어떡하냐. 쯔쯧.”
누가 가르쳤는지, 나 원 참.
한 소리 하는 천무린을 바라보며 이백과 진량이 처음으로 수신호를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8기수 생도들을 보며 나직이 이야기했다.
“조져.”
“7기수, 8기수 모두 같이 덤비는 거야!”
“우오오오!”
어?
너희 언제부터 그렇게 담합이 잘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