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3화
제123화
“지금 창피하다고 했는가? 그게 무슨 저의로 하는 말인가!”
“저의라니, 그런 거창한 단어를 쓸 필요가 있겠소.”
부아가 치밀어 오른 손태각이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며 세 사람을 바라봤다. 대번에 오체분시를 해서 갈아 마셔도 시원찮았다.
상명하복의 질서가 엄격한 무관의 세계에서 세 사람이 하고 있는 짓은 하극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를 빠드득 갈며 손태각이 대노하려는 순간,
“……지금 자네들도 보지 않았는가? 눈이 있다면 봤을 텐데. 저 생도들이 한 행동을.”
덕유명의 시선이 천무린을 비롯해 난장판이 된 현장에 닿았다 세 교관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배단아가 움찔거렸다. 꾸짖는 눈빛이었다. 지금 저 광경을 보고도 이와 같이 행동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대장로나 되는 이의 기세에 맞선다는 것이 쉽지 않은지 배단아가 주춤거리자 대신 나선 것은.
“보았지요. 비로소 공명정대한 징계위원장의 모습을 말입니다. 대장로님.”
흔들림 없이 담담한 어조로 담진이 한 걸음 나서서 덕유명의 말에 답했다. 이와 같은 징계위원회를 어디 한두 번 보았겠는가.
정의로운 결과보다 서로서로 챙겨 주기에 급급한 품앗이를 통해 징계다운 징계를 내리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담진은 이미 질릴 대로 질려 버렸다.
매 순간 이처럼 판을 엎어 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매 순간 장로들의 멱살을 잡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금 저 꼴을 보고도 이따위 행동을 한다는 말인가! 빌어먹을 녀석이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했는지 보고서도!”
일갈하는 2장로 손태각의 모습처럼 제 사람만 챙기는 이들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가 한둘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지긋지긋한 품앗이 문화를 송두리째 도려내지 못한다면 어차피 반복될 뿐.
오죽 답답했으면 당백진에게 직접 찾아가 건의까지 하였을까.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 용기가 없는 이에게 응해 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담진 교관, 정파 무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
「……중요한 것 말입니까? 힘 아니겠습니까? 」
「 일부 맞는 말이지만, 자네가 말한 상황에선 정확한 정답이 될 순 없겠군. 가장 중요한 것은 명분이다. 명분을 찾아라. 명분을 가지고 단행해라.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뒷받침이 될 것이다. 」
당시엔 그저 보기 싫은 장로들과 얽히고 싶지 않은 당백진의 비겁한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직접 나서지 않고 명분을 챙기라는 말만 하는 모습이 전혀 와 닿지 않았던 담진이었다.
하지만.
“빌어먹을 녀석은 누구고, 우리 애들은 누군지요? 모두 같은 사천무관의 생도입니다만. 2장로님.”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명분을 가진 자가 어떤 힘을 가지는지.
“이익! 담 교관! 내 지금 자네하고 말장난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가!”
“2장로님께서는 제가 그리 보이십니까. 저는 지금 이 순간, 그 누구보다 진지합니다.”
흥분하여 소리치는 손태각의 기세를 굳건히 받아 내면서도 한없이 담담한 담진의 모습에서 옆에 서 있던 덕유명이 게슴츠레 눈을 뜬 채 입을 열었다.
“지금 저 아이를 감싸는 것인가? 그것이 자네들의 뜻인가?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보고도 이러는 것이 정녕 자네들의 뜻인지 궁금하군. 폭력을, 단순한 구타가 아닌 명백한 폭력을 행사한 저 아이를 감싸는 것이 말일세.”
묵직한 음성. 그 음성 속에 담긴 힘이 서서히 세 교관의 어깨를 찍어 눌렀다. 2장로인 손태각과 1장로인 화영조보다도 한층 더 무거운 기세.
그때.
“그거 알고 계세요?”
덕유명이 내뿜는 기세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한 걸음 나선 것은 다름 아닌 배단아였다. 오롯이 직면하고 나선 배단아의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 파래졌지만, 그녀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징계위원회에서 나온 징계 결과는 곧 선례가 되죠. 그 선례에 따라 차후에 벌어지는, 비슷하거나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 징계 수위가 결정된다는 것을요.”
미세하게 떨리는 음성. 그러나 또랑또랑한 음성이 징계원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녀의 말에서 나온 선례라는 말에 손태각이 흠칫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선례(先例), 불과 일각 전에 내려진 징계는 구타와 폭언에도 불구하고 고작 자원봉사 활동과 20은자라는 금전으로 대신하라는 처벌을 뜻했다.
“장로님들이 결정을 내린 그 결과로 인하여 형평성에 어긋나는 징계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답니다. 알고 계신가요?”
그녀의 말마따나 앞선 선례를 무시하고 징계 처벌을 내릴 순 없었다. 그것이 징계원의 합법적인 절차였고, 그것을 무시한다는 것은 사천무관의 뜻 자체를 거스르는 것이 된다.
담진과 배단아의 호기로운 기세에 담담하던 덕유명의 표정이 일순 일그러졌다. 그러곤 악교운을 마주 바라봤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는가?”
“알고 있습니다.”
“후회할 짓 하지 말게나.”
“그럴 거라면 나서지도 않았을 겁니다.”
“……여전히 젊구먼. 자네는.”
마뜩찮은 표정을 짓는 덕유명의 시선이 악교운과 다른 두 교관에게 닿았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뜻대로 하게.”
그 말에 담진과 배단아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나.
“징계위원회를 다시 소집하겠네. 대상은 천무린 생도. 건의자는 대장로 덕유명일세.”
중후하고도 꼬장꼬장한 목소리가 징계원 전체로 울려 퍼졌다. 언제 밝아졌냐는 듯 두 교관의 표정은 다시금 굳어졌다.
징계위원회를 연다는 뜻은 곧.
“……자네들도 알겠지만, 징계위원회에 참석하여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이는 사건에 연루되지 않은 자들뿐일세. 즉, 이 사건에 관하여 건의를 한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은 참관할 수조차 없겠지. 그렇게 된다면, 나는 저 아이에게 오롯이 모든 책임을 물을 걸세. 물론 자네들의 죄목까지 저 아이의 잘못으로 돌려 버릴 게야.”
울려 퍼진 음성에 담진과 배단아의 표정이 급변했다. 속에서 진득하고도 끈적한 혐오감이 피어올라 온몸을 타고 흘렀다.
구차했고, 치가 떨릴 정도로 지저분한 처사였다.
허나, 덕유명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저 아이를 내 눈앞에 데려다 놓게. 이 모든 상황에 대하여 용서를 빌게. 아, 물론 그 용서는 나를 비롯한 모든 이들이 납득할 만한 용서여야 한다네. 그렇게만 한다면 그대들의 죄는 단죄하지 않을 생각이네. 그저 젊은이의 호기 정도 넘어가 주겠네.”
헛구역질이 날 만한 순간과 마주한 담진과 배단아였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였을 줄이야.”
“대장로의 신분으로 어찌 그런 이야길 그리도 쉽게 하시는지.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덕유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이 모든 사건에 대하여 천무린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뒤로 빠져서 지켜보라는 소리였다. 성년도 되지 않은, 그것도 본인들이 직접 지도하고 가르치는 아이를 희생하라는 이야길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하다니.
“허허허, 노부에 대한 칭찬인가. 아서게. 세상을 조금 더 넓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네.”
노회한 그가 지금껏 쌓아 온 것이 무력이었을까.
아니. 검을 놓은 지 오래인 그가 쌓아 온 것은 권력과 명예에 힘입은 정치력이었다. 굳이 두 손을 쓰지 않아도 상대를 무너뜨리고 물러서게 만들 수 있는 힘. 그것을 키워 온 덕유명이었다.
세상만사가 무력으로 해결되던 시절은 이미 지났다.
대장로라는 직위를 얻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부단히 노력했던가. 많은 이들을 구워삶고, 또 구워삶아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보여 줄 것이다.
대장로쯤 되면 상대를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는지.
“……하아, 어쩔 수 없나.”
여태껏 대꾸 한 번 없이 상황을 바라만 보던 악교운이 고개를 떨구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 모습에 득의양양한 미소를 띠는 덕유명이었다.
저 천둥벌거숭이를 감싸든, 감싸지 않든.
덕유명에게는 유리했으니.
이를 통하여 악교운의 입지를 더욱 좁힐 수 있고, 혹은 자신을 지지하게 만들 수 있을 터였다. 그것이 바로 덕유명의 장기였으니까.
그때, 문득 악교운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 고개는 천무린을 향했다.
그리고 몇 차례나 한숨을 쉬며 깊은 고뇌에 빠지는가 싶더니 천무린에게 천천히 다가가는 악교운이었다.
그럼, 그렇지. 제아무리 생도를 아낀다고 한들, 제 자신보다 아끼랴.
덕유명의 입가가 파이며 득의만만한 미소를 띠었다.
천무린의 목덜미를 잡아다가 이쪽으로 던진다면 죄를 사하여 주리라.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줄 것이다.
괘씸했지만, 지금은 보는 눈도 많거니와 천무린에 대한 엄벌과 악교운에 대한 용서라면 대장로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할 수 있는 순간이 될 터였다.
심지어 사천무관 내에서는 덕유명의 입김이 닿지 않은 곳을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다. 그러니 덕유명과 정면으로 맞설 존재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였다. 지금 이 상황을 해결하고 나면 대장로의 자격으로 사천무관의 기강을 다시 바로잡을 것이다.
그것이 대장로가 해야 마땅한 일 아니겠는가.
그릇된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올바르게 잡는 것이 대장로로서 해야 할 의무일 테니.
주름진 얼굴에 미소를 띤 그는 머릿속으로 장밋빛 미래를 그려 내고 있었다.
그런데.
응?
천무린에게 다가간 악교운이 귓가에 대고 중얼거렸다. 뭐라고 중얼거리는지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았다.
덕유명이 내공을 끌어올려 청력을 높이자,
“……더 이상 자비는 없다.”
“왜 그래요? 한 번은 봐주지 그래요.”
“참을 만큼 참았다, 이놈아. 그러게 왜 자극해서는!”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려왔다.
후후, 타이르는 것이었나.
옳지, 옳지. 어서 이리로 보내도록.
덕유명은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고 인자한 미소로 근엄하게 기다렸다.
초조해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 역시도 대장로의 미덕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한 번만 참으라고요! 그러다가 총교관 잘리면 어쩌려고 그래요!”
으응?
“참을 만큼 참았다. 내 성격에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용하지. 그러게 왜 날 자극했느냐? 네 녀석이 그렇게 막 나가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몸이 근질거려 참을 수가 있어야지! 네 녀석이 이번에 안 나서고 가만히 있었으면 나도 참았을 거 아니냐!”
참아? 대체 무엇을.
자극해? 누가 자극했단 말인가?
또 몸이 근질거린다고?
영문을 알 수 없는 대화는 이상한 흐름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대, 대체 저게 무슨 대화람.
덕유명이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을 짓자, 천무린과 악교운의 눈빛이 돌변하며 씨익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