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0화
제120화
부교관이 헐레벌떡 뛰어와서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간만에 가진 술자리를 깨는 분위기에 덕유명의 미간이 좁아졌다.
“내 어지간한 일은 차후에 보고하라고 일렀거늘.”
“죄, 죄송합니다!”
“되었다. 무슨 일이기에 이리도 다급한 게냐?”
“그, 그것이…….”
부교관은 무관주 당백진 다음으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장로들이 어려웠다.
대장로라는 자리도 자리이거니와,
‘말도 안 되는 꼰대력과 쓸데없는 잡음이 가장 많은…….’
움찔.
세 쌍의 날카로운 눈빛에 부교관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말을 전했다.
“지, 징계위원회를 소집하시랍니다. 건의자는 악교운 1학년 생도 총교관입니다.”
* * *
징계위원회.
무관 내에서 정해진 규정을 어긴 자의 사건을 다루기 위해 열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다만 그 절차가 상당히 복잡하고 까다로워 어지간한 일이 아닌 한 거의 열리지 않는다.
그러나.
“총교관의 권한으로 징계권을 발동하여 편일현, 고우림, 명천 세 사람을 징계위원회에 출석시키자 한다.”
나직한 목소리로 일갈한 그 순간, 부교관으로 보이는 이들이 뛰어나와 편일현과 고우림, 명천을 붙들었다.
“그리고 피해자로 보이는 이백과 진량, 구태현, 문호, 송무, 백리무영, 백리후까지 모두 동행하여 징계위원회에 참석하고, 때에 따라선 첨언을 할 수 있음을 밝히는 바이다.”
그 말에 부교관 중 한 명이 고갤 끄덕였다.
징계위원회가 열리려면 생각보다 길고 복잡한 절차를 밟아야 하지만, 총교관이라는 자리는 그런 복잡한 절차를 간소화시키는 힘이 있었다.
“캬! 역시 총교관, 이럴 때 제대로 본때를 보여 주는구먼?”
천무린이 감탄한 표정으로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 반응에 악교운이 입가를 끌어올리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후후, 이 정도쯤이야 당연한 것을.”
그 반응에 천무린이 박수까지 치며 치켜세워 주자, 악교운의 희미했던 미소가 조금씩 함박웃음으로 바뀌어 갔다.
“……뭔가.”
“다, 닮아 가고 있다.”
백리후와 백리무영의 말에 송무와 진량, 이백까지 흔들리는 눈빛을 보였다.
그들이 봐도 냉랭하기 그지없던 악교운이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저, 저 야차 악교운 교관이……?”
“대체 어떻게 돼먹은 놈이야, 저놈은.”
“불가항력적인 일이죠. 저놈은.”
놀라운 일이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천무린은 “오오!” 하면서 연신 악교운을 치켜세워 주고, 부교관들이 나서서 편일현과 고우림, 명천을 잡아갈 때에는 천무린의 칭찬에 신이 난 악교운의 허리가 아예 뒤로 꺾일 정도였다.
“와, 나도 총교관 할까 봐! 역시 실세는 뭔가 다르네!”
“엣헴.”
그 둘의 모습에 두 눈을 질끈 감는 이들이 대다수였지만.
* * *
징계위원회는 잘못을 저지른 생도에게 벌을 주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열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징계위원회 자체는 의당 필요한 이들에게 치러지는 것이고, 혈기왕성한 이들로 가득한 무관이다 보니 별의별 일이 다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생도가 잘못을 저질러서 벌을 주기 위해 징계위원회를 여는 일은 생각보다 이런저런 이해관계가 엮여 있어 그것을 풀어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실세는 염X. 아주 X랄났네. X랄났어.”
툭 던지는 천무린의 말 한마디에 아까 천무린의 칭찬에 당장이라도 승천할 것 같았던 악교운이 그만 움찔하고 말았다. 하지만 천무린의 비아냥거림은 비아냥거림이고, 상황은 상황.
“어째서 저 새끼들이 그렇게 득의양양한가 싶었는데……. 믿는 구석이 있긴 있었네.”
진량은 현 점창의 장문인 노릇을 하는 진궁 장로의 아들이고, 송무 역시 현 종남의 장문인의 사제인 도량진인의 제자다. 또한, 백리 형제는 비록 속가 제자이지만 이십사수매화검법을 계승할 후계자로 거론될 정도로 정식 제자 이상으로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인물들이다.
그러므로 어지간한 일에는 절대로 밀리지 않을 정도로 쟁쟁한 이들인 것이다.
“누가 금수저들을 함부로 건드리나 했건만.”
그래서 천무린은 이런 일들이 벌어졌을 때 의아해했다. 어째서 저 새끼들이 저리도 자신감이 충만해 있는지.
징계위원회가 열리는 ‘징계원’에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그리고 이제는 이해가 되었다. 저 정도 뒷배경이면 무관 내에서 무슨 짓을 벌이든 아무도 건드릴 수 없을 거라는 걸.
“……징계위원회는 원칙에 따라 장로원에 계신 장로님들 중 한 분을 선정하여 징계위원장으로 추대하고, 그 외의 위원은 각 기수 총교관님들 중 해당 징계에 올라간 생도를 담당하는 총교관과 건의한 8기수 악교운 교관을 제외하고 선정하겠습니다.”
징계위원회에서 진행을 맡은 교관 담진이었다. 공명정대하기로 널리 알려진 담진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거 뭐, 임명식을 다시 보는 것 같은데.”
“…….”
“진짜 어마무시하네.”
“징계위원회를 열면서 이렇게 많은 장로님들이 참석했다는 건 그다지 들어 보지 못했는데.”
그의 말마따나 징계위원회를 참관하는 인물들과 위원으로 임명된 이들이 줄줄이 등장했는데.
“대장로 덕유명, 1장로 화영조, 2장로 손태각, 3장로 모대건, 5장로 기사우, 6장로 원인명, 5기수 총교관 장합, 6기수 총교관 칠현, 기록원주 호태화 등 총 9명이 참석하셨습니다.”
임명식에 참석할 법한 고위 인사들의 향연이었다.
규율을 어긴 일개 생도들의 잘잘못을 가리기 위해 열리는 징계위원회의 참관 인사들치고는 조금 과했다.
그 때문인지.
“어휴, 저 새끼들 표정 좀 보세요. 어느 놈이 피해자고, 어느 놈이 가해지인지……. 좀 바뀐 것 같지 않아요?”
천무린의 말에 악교운은 팔짱을 끼고 무거운 표정으로 고갤 들었다. 그의 시선에 편일현, 고우림, 명천 세 사람의 표정이 먼저 들어왔다.
징계위원회가 본인들 때문에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반성의 기미는커녕 일말의 불안감이나 걱정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표정이었다. 오히려 낄낄거리며 이 분위기를 즐기는 듯한 모습까지 보였다.
……그에 비해.
이 자리가 죄스러운 것인지 혹은 징계위원회라는 이름에 짓눌린 것인지 이백과 진량, 구태현과 문호, 송무와 백리무영, 백리후는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꽈아악.
그 모습에 악교운의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간 보지 못했던 이면이었다. 그동안 후보생들과 예비 생도들을 맡으며 사천무관 본관에서의 활동이 극히 제한되어 있던 터라 두 눈과 두 귀가 가려져 있었던 탓이다.
‘무관 안이 이렇게 개판이 되어 있을 줄이야.’
마지막에 닿은 악교운의 시선은,
“허허허, 고작 이런 일로 징계위원회라니.”
“그러게 말입니다. 대장로님. 아이들이 많이 놀랐겠습니다.”
“우리가 잘잘못을 명명백백히 밝혀 이와 같은 일이 더 이상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현이와 우림이가 또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되다니 눈물이 앞을 가리오.”
“허허, 명천아. 아버님은 잘 계시느냐? 일전에 보내 주신 비단은 아주 잘 쓰고 있다고 전해 드리거라. 조만간 얼굴 한번 뵈어야 하는데 말이다.”
“예! 장로님! 헤헤.”
세 녀석은 대장로 그리고 1장로, 2장로와 줄이 닿아 있는 듯했다. 그들끼리 나누는 대화가 숨김없이 다 들렸다. 부끄럽지도 않은지 당당하게 행동하는 장로들의 행태에 악교운의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차가워졌다.
이야기는 익히 들었다.
사천무관 건립 당시, 가장 많은 금전적 지원과 지지를 한 세 사람이라고. 그래서 민심으로 추대된 당백진과 달리 사천 무림 내에 각 명문 정파의 장로급 인사이면서 무관에 아낌없는 지원을 한 인물이라는 점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추대된 이들.
그들 때문에 불협화음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토록 썩어 빠졌을 줄이야.’
속으로 침음을 삼키고 있던 그에게 정적을 깨뜨린 목소리가 파고들어 왔다.
“이 정도로 썩었을 줄 몰랐어요? 정말로?”
“……뭐?”
“사실 저도 썩어 있는 줄은 알았는데, 보다 보니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보다 이 정파 무림에 오래 살아온 총교관님이 정말 이런 모습을 몰랐을까, 하고요.”
나직이 내뱉는 그 말에 악교운은 말없이 듣다가 입을 오물거렸다.
“……나는.”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요. 보면 알게 되겠죠. 정의와 협(俠)을 논하는 정파 무림의 어른들이 이끌어 가는 세상은 과연 어떨지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알 수 있겠죠?”
……꽈악.
악교운은 부디 최악의 상황만은 벌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천무린, 이 녀석의 말처럼 앞으로 정파 무림에서 활약을 해야 할 아이들이 마주할 미래가 어둡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물론 악교운 역시 멸문한 명문 정파 산동악가의 마지막 남은 후손으로 가장 밑바닥을 경험해 보았다.
산동악가에 잘 보이기 위해 간이며 쓸개며 다 내줄 것 같았던 이들도, 정마대전 당시 최전방에서 마교를 마주했던 산동악가를 칭송했던 이들도.
전부 부질없었다는 사실을 악교운은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십여 년 전의 일.
이제는 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
정마대전이라는 끔찍한 참사를 겪었고, 처절하게 무너졌던 정파 무림이었지 않은가.
그와 같은 일을 겪었던 이들이라면 이제는 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
“……걱정 마라.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다.”
천무린에게 하는 말, 아니.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을지도.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요.”
일말의 기대감도 느껴지지 않는 천무린의 말 한마디 이후 징계위원회는 시작되었다. 천무린이 아는 정파 무림의 정의는 매우 보잘것없었으니까.
“……건의자, 8기수 총교관 악교운으로부터 올라온 징계 건의 사유는 다음과 같다. 5기수 편일현, 고우림, 6기수 명천은 임명식이 끝나자마자 7기수 이백, 진량, 구태현, 문호, 8기수 송무, 백리무영, 백리후를 별관 뒤로 불러내 구타와 폭언을 시작하였고, 8기수 천무린에게는 살인멸구를 하겠다는 협박도 서슴없이 하였다.”
담진의 담담하기 그지없는 음성이 울려 퍼졌다.
“악교운 총교관의 징계 건의에 대하여 진위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조사한 결과, 해당 피해자들에게 구타 흔적이 명백히 남아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그 말에 징계위원회에서 징계위원장으로 뽑힌 2장로 손태각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징계위원회에서 어떻게 처벌할지 징계 수위를 정하는 것은 위원들이 결정할 일이지만, 담진과 같이 미리 죄목에 대해서 조사한 이들이 있으면 최소한의 징계 수위가 높아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힐끗.
확실히 진량과 이백, 두 사람의 볼이 퉁퉁 부어 있었고, 짓밟힌 흔적과 더러워진 옷가지, 맞은 자국 등이 구타가 있었음을 명백히 알려 주고 있었다.
“다음과 같은 징계 건의 사항에 대해 말씀드렸으니 본격적인 심문을 진행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먼저 징계위원장님.”
담진의 부름에 2장로 손태각의 시선이 참관석에 앉아 있는 덕유명과 화영조의 시선과 마주했다.
끄덕.
“……심문을 시작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