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화
제117화
“이번에 무림맹 입맹을 한 이들과 화산, 종남, 점창뿐 아니라 청룡표국, 기린상단에 들어간 이들이 많습니다.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악교운의 진행은 계속되었다. 담담한 음성이 계속해서 울려 퍼졌고, 악교운에게 호명된 이들은 어깨에 절로 힘이 들어가는 듯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여간 쓸데없이 감투 씌우기 참 좋아한단 말이야. 무림맹 입맹이 뭐가 대수라고.”
씹어 대듯 이야기하는 천무린의 이글거리는 눈빛이 이백에 이어 7기수와 8기수를 훑었다. 그 반응에 이백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천하제일인도 아니고, 무림맹의 5개 단체에 들어가는 게 꿈이라니 기가 차네. 정말.”
한껏 비아냥대는 천무린의 표정은 구겨진 채 펴질 줄을 몰랐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을 수 있는 건 악교운의 육합전성에도 불구하고 지근거리에 있는 이백, 단 한 사람뿐이었다.
“무림맹의 5대 무력 단체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니까. 범인이 생각하기에 결코 쉽지 않은 일이란 걸 너도 잘 알고 있잖아.”
“어렵겠지. 근데 그게 어찌 꿈이 돼. 등 따시고 배부르게 사는 게. 그럴 거였으면 애초에 칼밥 먹고사는 걸 업으로 삼지 말아야지.”
무림맹 입맹? 물론 그게 꿈일 수도 있다. 그 자리에 올라서는 것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누구보다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고, 끊임없이 무공에 정진해야 가능한 자리일 것이다.
그러나.
“어쭙잖게 한계 따윌 짓고 말이야. 누차 말했지만, 그따위는 노력하면 다 따라오는 거라고. 후우.”
영 마뜩찮은 표정을 짓은 천무린은 당백진을 비롯한 수많은 고위 인사를 훑어보았다. 사천무관을 지탱하고 있는 이들뿐 아니라 산동무관과 섬서무관, 무림맹의 인사들도 제법 보였다.
“그래서 나는 늙은이들의 고루함이 싫어. 꿈을 한계 짓는,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 저 인간들이 잘못이야. 급수를 매기고, 위아래를 따지고, 출신을 따지고 하는 것들 말이야. 하여간 늙은 여우들이 문제라니까.”
비판적인 천무린의 목소리에 이백은 입을 다물었다. 계속된 천무린의 비판적인 말이 조금은 불편하게 느껴졌다.
정파 무림이 발전하지 못한다는 말.
욱일승천해야 하는 후기지수들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꾸만 자신의 한계를 짓게 되는 것, 이와 같은 허례허식이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
모두 맞는 말이라 오히려 더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이백은 저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놀란다.
‘……그런가. 저 녀석이 뱉은 몇 마디에 그동안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들을 직시하게 된 건가.’
눈앞을 가리고 있던 뿌연 안개가 걷히는 느낌이었다.
개안(開眼)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터.
스윽.
곁눈질로 보니, 천무린은 비아냥거리며 말하고는 관심 없다는 듯 연신 하품을 하고 있었다.
알다가도 모를 녀석. 천둥벌거숭이에 천방지축인 녀석이 던진 말 한마디가 이토록 자신의 마음속에 파문을 일으킬 줄이야.
경지를 가늠할 수 없는 뛰어난 실력과, 자신만만함, 이따금씩 비관적이라고 느껴질 정도의 신랄한 말투, 정파 무림의 관료 사회를 정확히 꿰뚫는 놀라운 안목까지.
어느 하나 범상치 않은 것이 없었다.
하아품?
그런 이백의 시선이 노골적이었는지 천무린이 하품을 하다 말고 마주 바라본다.
“뭘 봐? 내가 그렇게나 잘생겼냐?”
……물론 범상치 않다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이백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대체 어느 장단에 발을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7기수 이백! 8기수 천무린! 단상 위로!”
드디어 두 사람의 차례가 왔다.
단상 바로 아래서 대기하고 있던 두 사람을 호명하는 소리에 둘은 단상 위에 올라섰다.
“임명식에 앞서 알려드릴 것이 있습니다. 지난해 개최된 삼대 무관 비무대회는 뛰어난 후기지수가 등장했음을 사천 무림을 넘어 정파 무림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담담한 악교운의 목소리는 무관 내에 있는 이들에게 잔잔하게 퍼져 나갔다.
“현 단상 위에 올라온 두 사람을 비롯한 7기수와 8기수가 참여해 두 기수 모두 우승이라는 쾌거를 이루어 냈습니다…….”
감회가 새롭다는 표정을 지은 그는 몇 초간의 정적 후 다시 말문을 열었다.
“단상 위에 올라온 우승자인 이백 생도와 천무린 예비 생도, 그리고 비무대회에 참가했던 7기수와 8기수 모두에게 이 자리를 빌려 축하의 인사와 함께 장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제법 많은 이들이 협객행으로 이름을 날렸고, 사천에서 난다 긴다 하는 사파의 무리들을 물리친 전적이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사천무관의 명성을 크게 떨쳤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정파 무림의 공식적인 행사는 어디까지나 삼대 무관 비무대회였으니까. 현 정파 무림의 대표 격은 삼대 무관이니까 말이다.
그러니 현재로써 무관의 이름을 가장 드높일 수 있는 행사는 오직 비무대회뿐인 셈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비로소 우승이라는 쾌거를 이룬 기수, 다름 아닌 이백이 대표로 나선 7기수와, 천무린이 이끄는 8기수였다.
사천무관이 문을 연 이래로 8년 만의 일이었다. 악교운의 말 한마디에 무관주인 당백진을 비롯하여 장로들과 교관들도 가슴이 뭉클해졌다.
“……허허, 오래 살고 볼 일이오.”
“여태 꼴찌라는 오명을 받았었는데, 허허헛.”
“이제 어디 가서 기를 좀 펼 수 있겠지요.”
“호호호.”
이백 역시 그 영광을 이끈 사람으로서 스스로에게 뿌듯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깟 애새끼들 못 잡아서 여태껏 꼴찌 한 게 더 대단하다.”
초를 치는 이가 있었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길래 이와 같은 영광에도 그리 담담하게 있을 수 있는지……. 아니, 담담하다기보다 귀찮아한다고 해야 하나.”
정답!
역시 똘똘한데.
어떻게 알았냐는 듯한 표정을 짓는 천무린을 외면하고 마는 이백이었다. 더 보고 있다간 자신까지 힘이 빠질 지경이었으니.
이 녀석과 더 있다가는 이백이 갖고 있는 신념, 강건한 의지마저 빛바랠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데헷.”
이백의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그보다 잘되고 있어? 진량 그 새끼 데리고 오는 건.”
“……왜 재촉하는 느낌이 들지?”
“왜긴 왜야? 싸가지 없는 새끼 계속해서 교육 좀 하려고 그러지.”
“아주 본성이 드러나다 못해 노골적이구나.”
“그런 애들은 매가 약이야. 알잖아?”
매가 약이라니.
이백이 기막혀 하다 말고 고갤 돌려 진량을 바라봤다.
질겅질겅, 뭘 씹고 있는 건지 여전히 불량스럽다.
그러다가 천무린의 눈과 마주하면 조금은 자세가 단정해진다.
매가 약이라더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어때? 데리고 오기만 해. 내가 조져 줄게.”
“어? ……그래도 되려나. 아, 아니지.”
순간 넘어갈 뻔했다. 천무린의 손에 맡기면 갱생은 되겠지만, 그랬다간.
천무린의 두 눈에 피어난 귀기(鬼氣)를 보며 이백은 고갤 저었다.
걸레짝을 만들어 놓을 게 분명하니까.
“쳇, 안 넘어오네.”
아쉬워하며 천무린은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진량 같은 부류가 어디 한둘인가.
황태, 남사익, 명진…….
아오! 생각하니까 너무 많잖아?
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7기수는 함께해야 한다.
그것을 모르지 않는 이백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알지. 양분된 만큼 함께하려면 융화가 되어야 할 터인데.”
“나한테 안 맡길 거면, 어떻게 융화시킬지는 본인이 알아서 생각하고. 내가 밥상까지 차려 줄 의무는 없잖아. 그 정도 그릇밖에 안 된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고.”
하나같이 맞는 말이다. 반박할 수 없었기에 이백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이백이 천무린에게 입으로 두들겨 맞는 것을 막아 준 것은 악교운의 음성이었다.
“……먼저 7기수 이백 생도가 보여 준 검호로서의 뛰어난 모습은 후배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차후 사천무관의 큰 대들보가 되리라 사료된다. 그러니 여기서 그치지 말고 더욱 정진하여 사천을 넘어서 정파 무림을 대표하는 무림인이 되길 바란다.”
단상에 올라간 이들에 대한 명예 수상이 시작되었다. 그 명예 수상에 이백은 자세를 단정히 하고 악교운의 말을 집중해 들었다.
“예! 감사합니다!”
무관에서 주관하는 대행사인 만큼, 임명식에 참관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특히.
“우리 백이가……. 저기 단상 위에 있는 아이가 정녕 우리 백이가 맞는 것이죠?”
“허허, 부인. 몇 년 못 봤다고 백이의 얼굴을 까먹은 것이오. 저 보시오. 헌앙하고 아주 잘생긴 것이 부인과 날 꼭 닮지 않았소.”
후보생과 생도들의 가족도 참석하여 기쁨을 함께 누렸다.
소중한 사람과 소중한 자리를 함께한다는 사실에 모두 감격했고, 특히 8기수는 그간 훈련과 교육이라는 미명 아래 5년이란 긴 기간 동안 가족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모두에게 즐겁고 반가운 자리였다.
단 한 명만 빼고.
“8기수 천무린은 훈련에 방만하던 자세를 고치고 부단한 노력을 통해 단시간 내에 범접할 수 없는 고강함을 이루어 타의 모범이 되었고, 사천무관의 이름을 드높였다. 나아가 8기수 전체를 아우르는 통솔력까지 보여 주었으므로 이에 수상한다. ”
이백에 이어 천무린에 대한 수상이 시작되자마자 오랜만에 가족을 본 기쁨도 잠시, 하나같이 표정이 일그러지는 8기수들.
“타의 모범이 돼?”
“방만하던 자세를 고쳐?”
“누가! 대체 누가!”
“통솔력? 그냥 사람을 잡아다가 패면 그걸 통솔력이라 부르나 보지?”
특히 황태와 명진, 남사익, 태강이 이를 갈았다. 그뿐 아니라 진량마저 두 눈이 크게 떠지며 경악을 할 정도였다.
“정말 뻔뻔하네요. 저런 말을 듣고도 기뻐하다니. 철면피도 저런 철면피가 없어요.”
설화린의 말마따나 귀찮아하던 자세를 바로잡고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는 천무린이었다.
가슴을 쭉 펴며 아주 흐뭇한 표정을 짓는 그의 모습에 8기수 예비생도들의 가족들은 감탄했다.
“저 예비 생도가 그 유명한 천무린 생도인가?”
“익히 소문으로만 들었으나, 과연 영웅의 자태로다!”
“태강아, 더욱 친해지거라. 무인이든 상인이든 인간관계에서 시작되는 것이 많으니 말이다.”
“아무런 연고도 없다는 게 사실이냐, 후송아?”
대부분 순수한 감탄이 주를 이뤘지만, 그중에는 천무린을 탐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들이 오갈 때마다 천무린의 허리는 더욱 뒤로 꺾이며 가슴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엣헴!”
으득.
설화린마저 말을 거들자, 8기수들은 천무린을 당장 끌어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자신은 있고?”
“…….”
송무의 말 한마디에 모두의 입이 합죽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