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6화
제116화 - 2부 시작
“모두 차렷!”
기합 가득한 육합전성이 사천무관 내 연무장에 크게 울려 퍼졌다.
두 청년이 단상 바로 아래에 서서 다소 상반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중 2학년 예비 생도의 표식을 달고 있는 청년의 기세는 단단하면서도 날카로웠다.
삼대 무관 비무대회에서 사일검룡이란 별호를 얻으며 혜성처럼 등장한 7기수 대표인 이백은 근엄하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1학년이 아닌 2학년 생도가 된다는 것은 사천무관이라는 이름 아래 본격적으로 협객행을 할 수 있는 막중한 책임감을 짊어지는 것.
협객행은 사천무관을 대표하는 일원의 자격으로 사도 세력을 물리친다는 공식적인 임무를 띠고 무림으로 떠나는 수행의 길을 이른다.
그러니 이제 2학년 생도가 되는 임명식을 앞두고 있는 이백의 표정은 사뭇 진지해질 수밖에 없었다.
후비적후비적.
그러나.
“뭐 이리 쓸데없이 거창해?”
귀를 파면서 하품을 늘어지게 하는 또 한 사람이 이런 이백의 옆에서 1학년 생도를 대표하고 있었다.
“……오늘만큼은 좀 진지해지는 게 어때?”
“귀찮아서 올라오기도 싫었는데, 겨우 올라온 거야. 큰맘 먹은 거지. 그러게 나를 대표로 뽑으래?”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이는 다름 아닌 천무린이었다.
그런 천무린을 이백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혀를 찼다.
“8기수 중에 1등이라는 쾌거에도 아무런 감흥이 없는 거냐?”
“쾌거? 쾌거는 개뿔. 그딴 게 무슨 쾌거야. 사파 놈들 대가리를 다 깨부순 것도 아니고 고작 꼬맹이들이랑 어울려서 1등 한 게 뭔 대수라고. 꿈이 그 정도밖에 안 돼?”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말로 그 몇 배를 두들겨 맞은 이백은 그만 입을 꾹 다물었다.
이래 봬도 임명식은 무관 내에서 공식적인 행사 중 가장 큰 행사다. 따라서 고위급 인사들이 참석하는 비중 역시 컸다.
그러므로 임명식에 임하는 자세가 남달라야 한다는 것인데, 이 녀석은 대체…….
바로 그때.
“무관주님 입장!”
둥둥둥둥!
악교운의 육합전성, 그리고 터져 나오는 웅장한 북소리와 함께 등장하는 사천무관주 당백진이 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저벅, 저벅.
이제 막 1학년 생도가 되는 8기수, 2학년 생도가 되는 7기수 그리고 협객행을 나섰던 3, 4학년 생도도 복귀하여 임명식에 참석하였다.
손에 닿으면 당장이라도 베일 것 같은 날카로운 기세.
형형한 안광에서부터 표출되는 자신감.
사천무관을 대표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더불어 정파 무림에 널리 이름을 알리고 있다는 뿌듯함까지.
임명식에 참석한 이들의 표정은 밝았고, 아주 늠름해 보였다.
“쓰읍, 이번에도 꽤 괜찮은 여아들이 들어왔네?”
“킥킥, 이 새끼 또 습관 나온다. 하여간 신출내기들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린다니까?”
“자고로 여자란 어리면 어릴수록 좋은 법이지. 거기다 아직 때가 안 탄 계집들만큼 좋은 게 없지.”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5기수 대표 소화진은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음담패설을 내뱉는 이들을 경멸스럽다는 듯 훑어보고는 이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조금만 있으면 무림맹에 입맹하여 무력 단체로 손꼽히는 청룡검대의 일원으로 활동하게 될 테니까.
그런 소화진처럼 사천무관이라는 표식과 함께 무림맹의 표식, 명가로 알려진 문파의 표식을 하나둘 달고 있는 이들도 종종 보였다. 사천무관을 졸업하기도 전에 이미 장래가 보장된 이들이 아닌가.
여태 위의 기수들과 제대로 된 일면식도 가져 본 적 없는 8기수 후보생, 아니 1학년 생도가 된 송무와 태강, 황태는 연신 신기하다는 듯 상위 기수를 쳐다봤다.
“부러운데? 벌써 무림맹 표식을 단 선배들도 있네.”
“무림맹 입맹이라…….”
“아무래도 5기수, 6기수 선배들은 협객행을 통해 이름을 알리고 있고, 무림맹과의 공동 임무도 많이 맡았으니까.”
송무는 안경을 올리며 씨익 웃는다.
“아마 무림맹에 입맹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학관에 들어온 선배들이 많을 거야. 임명식이 단순히 임명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춘 게 아니라 각 기수에 대해 정리하는 시간도 있는 거니까.”
그 말에 태강과 황태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정보는 어떻게 아는 거냐?”
“누가 정보 벌레 아니랄까 봐.”
두 사람의 말에 송무는 발끈하여 눈에 쌍심지를 켰다.
“정보 벌레라니! 그냥 이런저런 소문을 내가 취합해 가공하는 거지.”
“가공?”
“그래, 가공! 소문을 곧이곧대로 퍼뜨리면 그게 떠버리밖에 더 되겠어? 소문들을 분류하고 그 진위 여부가 확인된 건지 알아본 후 정리하는 거지. 그러면 그게 진짜 나한테 좋은 정보가 되는 거니까.”
허허, 이 녀석.
알고 보니, 너?
어이없는 웃음을 지은 황태와 태강이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넌, 종남보다 개방이 더 잘 어울릴 거 같아.”
“그래. 그 정도면 탁궁 선배 사결개 신분을 금방 따라잡을 거 같은데.”
개방의 탁궁이라니.
송무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탁궁이라니. 끔찍하다. 마공서 사건으로 인해 천무린에게 지독하게 시달렸던 탁궁을 생각하면……. 으으.
그들이 잡담을 나누고 있는 사이, 천무린은 조용히 고갤 돌렸다. 단상 아래에 있는 천무린이 그 대화를 어떻게 들었는지 고갤 돌려 바라본 시선은 정확하게 송무에게 닿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 모양이 다음과 같이 움직였다.
‘어렵지 않다. 송무야.’
그 말에 소름이 돋은 송무가 죽어도 싫다는 표정을 짓고는 태강과 황태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노려봤다.
“너, 너희들 때문에!”
천무린의 시선을 함께 의식한 두 사람은 황급히 고갤 돌리며 헛기침을 해 댔다.
“크흠.”
“크흠흠. 보자, 무림맹이라니. 나도 저렇게 될 수 있겠지.”
“무림맹에 들어가면 그렇게 복지가 좋다던데. 아마 어지간한 문파에서 지원해 주는 것보다 훨씬 좋겠지?”
화제를 전환해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려 한 황태의 말에 태강이 바로 받았다. 그런 작전이 성공했는지 씩씩거리던 송무도 금세 그 화제에 끼어들었다.
“무림맹에도 어느 단체로 들어가느냐에 따라 달라져. 제1부대는 천성검대, 제2부대는 청룡검대, 제3부대는 백호대, 제4부대 주작대, 제5부대는 현무대.”
그 말에 두 사람뿐 아니라 다른 예비 생도들도 벙찐 표정을 지었다. 관심 없는 표정을 짓고 있던 신혁건과 백리무영, 백리후와 진무양까지 귀를 쫑긋거릴 정도였다.
“무림맹에 입맹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직책을 맡고, 어느 부대에 들어가는지에 따라 지원이 좌우되는 거야. 특히 무림맹을 대표하는 무력 단체에는 5개 단체가 있지.”
첫째로 천성검협 하후성이 이끄는 천성검대.
둘째로 청룡검 우신극이 이끄는 청룡검대.
그리고 타격대이자 정예 부대인 백호대, 주작대, 현무대까지.
“적어도 이 5개 단체에 들어가야 정파 무림에서 손꼽히는 무림맹의 무인으로 이름을 알릴 수 있어. 첫 단추가 중요한 만큼, 무림맹 입맹을 희망한다면 그중에 입단해야 어지간한 명문 문파급 무인으로 인정받겠지.”
그 말에 모두의 표정이 벙쪄 있다가 듣고 있던 낭소소, 명진과 남사익이 박수를 쳤다.
짝, 짝, 짝.
“정말 대단한데.”
“어떻게 그런 고급 정보까지 입수한 거야?”
“따로 정보책이 있는 거야? 신기해.”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하던데, 장난 아닌걸!”
“굼벵이는 무슨, 송무가 너보다 실력은 뛰어날걸?”
“이 새꺄, 진실 폭행도 폭행이랬다. 그렇게 막 말로 패면 좋냐.”
여럿에게서 박수갈채가 이어지자, 송무는 쑥스럽다는 듯 몸을 배배 꼬고 있다가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응?
‘……염X들 하네.’
천무린의 입 모양이 보였다.
‘등신들이 목표를 그따위로밖에 안 잡는다고? 고작 무림맹에 입맹하는 것 따위를 꿈으로 삼는다고? 강하면 알아서 찾아온다고 내 누누이 말했을 텐데.’
분명 입 모양으로 말하는데도 어찌 이리 잘 알아듣겠는지. 예비 생도들의 표정이 일시에 굳어졌다.
으르르.
당장이라도 천무린의 두 주먹이 자신들을 향해 날아올 것 같은 공포심에 모두가 시선을 돌려 버렸다.
“야야, 눈 마주치지 마.”
“쟤는 왜 또 난리인 건데?”
“누가 무림맹 이야기 꺼냈냐. 으으.”
“책잡힐 짓 좀 하지 마! 앓느니 죽지!”
예비 생도들은 송무를 원망하듯 바라봤다. 모두 다 너 때문이라는 듯.
그러자 억울한 표정을 지은 송무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방금까지 칭찬해 줄 땐 언제고…….”
그렇게 잡담을 나누고 있는 사이,
“모두 집중하시오! 집중을……!”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자 임명식을 진행하려던 악교운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리고 주목하게끔 내공을 담아 외치려던 순간,
화아악!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 버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중압감을 발산하는 당백진의 기운에 왁자지껄하던 분위기는 금세 사라졌다.
뻗어 나오는 무시무시한 기세는 현장에 있던 모든 이들의 말문을 닫게 만들었다.
“……역시 무관주님!”
“으이구, 저 양반이 정말. 애들 앞에서 저러고 싶나.”
좌중을 압도하는 기운에 감탄하던 이백은 구시렁거리는 천무린의 입을 황급히 막으며 자세를 재정비했다.
“큼큼, 지금부터 임명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차분해진 분위기를 인지한 악교운은 자처해서 임명식 사회를 맡았다.
사천무관주인 당백진의 소개 이후,
“이번에 운남의 남만야수궁에 파견을 다녀오신 세 장로님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덕유명 대장로님이 참석하셨습니다.”
“화영조 1장로님이 참석하셨습니다.”
“손태각 2장로님이 참석하셨습니다.”
“사천무관을 위해 고생하신 장로님들께 아낌없는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잇따라 사천무관을 뒷받침해 주고 있는 이들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광동성 파견 협객행을 무사히 마친 5기수 소화진 외 3명.”
“신룡강 탐색 협객행을 무사히 마친 6기수 고진담 외 5명.”
“포달랍궁과의 외교 협객행을 무사히 마친 6기수 사택기 외 8명…….”
성공적으로 협객행을 마친 이들의 이름까지 호명하며 노고를 치하했다.
이처럼 현 사천무관은 역대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이고 있는 이들이 연무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아니, 추워 죽겠는데 뭔 말이 저리 많아. 다 세워 놓고. 아주 헛짓거리를 저렇게 정성을 들여 잘한단 말이야!”
움찔.
볼멘소리가 터져 나온 곳을 바라본 이백은 움찔거렸다. 으르렁거리고 있는 단 한 사람. 천무린이 잔뜩 구겨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러니까 정파는 안 된다는 거야. 임명식이면 임명만 하고 치울 것이지, 뭔 논공행상(論功行賞)을 이렇게 쓸데없이 거창하게 하냐고?”
“……거창하긴 하나, 이와 같은 행사도 필요한 법이다. 각 기수가 무엇을 했는지, 어떤 공을 세웠는지 다들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야 그 공을 인정받아 다음에 더 잘하겠다는 동기부여도 될 것이고.”
“흥! 개소리도 정성 들여 하는구먼? 선배, 그렇게 동기부여를 해 주려면 입으로만 떠들지 말고 보검이라도 한 자루씩 하사하든가. 앙?”
맨날 입으로만 떠드는 논공행상!
이러니 발전이 없지!
죄다 자기 주머니만 채우려고 들어가는 예산!
표국이랑 상단, 각 문파에서 들어오는 예산은 대체 어디에 쓰길래!
“처맞아야 돼. 처맞아야 된다고!”
천무린의 두 눈이 겁화로 타올랐다.
그렇게 이글이글 타오르는 천무린의 두 눈을 본 이백은 움찔한 채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더 건드렸다간.
꾸구국, 잔뜩 힘이 들어간 저 주먹에 두들겨 맞을 것 같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