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화
제115화
역혈마공이 적힌 마공서는 금방 회수되었다.
위사검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품속에 있던 마공서를 건넸고, 천무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후보생이라고 하셨소이까?”
“예. 사천무관 8기 후보생 천무린입니다.”
“내 비록 지금은 무공을 쓸 수 없는 몸이 되었지만…… 이 두 눈은 옹이구멍이 아니라오.”
낭인들 사이에서는 제법 위명이 자자했던 위사검이었다. 정직한 정파 무림의 세계, 잔혹한 사파 무림의 세계에서 날고 기는 이들이 낭인이 된 사례가 어디 한둘인가.
그만큼 위사검은 수많은 인물들을 만났고, 기인이사와 직접 마주했다.
거기다 정마대전에서 정파의 손을 들어 함께 싸웠던 인물인 만큼, 전장의 경험도 있었고 무위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던 위사검이었다.
그의 눈에 천무린이 담겼다.
“……어떤 연유로 그대가 좁은 세상에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낭중지추라 하더이다.”
관록과 연륜, 모든 것을 갖춘 위사검이 경어를 썼다. 그것도 한참 어린 무관 후보생에게.
“주머니 속에 감춰진 송곳은 언젠가 드러나기 마련이오. 숨기려면…… 아니, 이미 숨기는 것은 물 건너간 듯하니, 그 힘을 부디 좋은 곳에 써 주기 바라오.”
숨기려야 숨길 수 없다.
위사검의 말처럼 이젠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다.
쌍용검 파평을 꺾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삼대 무관 비무대회에서 우승을 한 이력은 단번에 묻힐 판이었다.
“뭐, 그것도 그거 나름대로 수순이겠죠. 애초에 숨길 생각도 없었습니다. 치켜세워 준다는 데 뭐가 문제겠습니까.”
그 말에 후보생들과 생도들은 혀를 찬다.
“하긴. 칭찬은 고래만 춤추게 하는 것이 아니지.”
“칭찬은 녀석에겐 독이지. 아주 좋아 죽잖아.”
“저것을 노렸을지도 몰라. 저놈은.”
“으으, 징글징글하다.”
후보생들과 생도들은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위사검은 달랐다.
천무린의 발언은 언제라도 자신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반응. 그렇다는 것은 이미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맞았다.
당차다고 해야 할지.
겁이 없다고 해야 할지.
위사검의 두 눈이 잠시 이채를 띠었다가 사라졌다.
“하하, 나이가 들어 말이 많았소이다.”
그러다가 위사검의 시선이 이백과 진량, 송무와 설화린, 백리무영, 신혁건을 바라봤다.
“감사의 인사가 늦었소이다. 여러 협객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진즉에 죽은 목숨이었겠지.”
푸근한 미소를 짓던 위사검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지더니 일행들과 하나하나 시선을 마주했다.
“늙은 나이에 추해져서 그만 욕심을 부렸소이다. 깨우쳐 주어 고맙소이다.”
그 말에 일행이 손사래를 치며 크게 고갯짓을 했다.
“천부당만부당합니다.”
“욕심이라니요. 가당치 않습니다. 어르신.”
“늙은 나이가 무슨 이유가 되겠습니까. 강호에 살아가는 무림인인 이상, 강해지고자 하는 열의가 어찌 욕심이 되겠습니까.”
일행의 한마디, 한마디에 위사검은 재차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고맙소. 그리 말해 주어 이 노부에게 마음의 위안이 되었소이다. 그리고…….”
위사검은 자신보다 한참 후배이자 어린 사천무관의 일행을 마주하며 두 손을 포갰다.
처억.
그러곤 가벼이 고개를 숙이며 최대한의 예를 갖췄다.
“이 노구를 지켜 주어 고맙소이다.”
“아, 아닛. 어, 어르신!”
송무가 당황해하며 과한 예의는 받지 못한다고 말하려는 찰나.
“……별말씀을.”
천무린이 마주하며 포권을 취했다. 그리고 그 모습에 이백이 일행에게 눈치를 주고는 마주 포권을 취했다.
‘어르신이 우리에게 도리를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인사를 받지 않는 것은 되레 무례일 수 있다.’
이백이 말한 강호의 도리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위사검의 행동이었다.
고마움을 고맙다고 표현하는 것.
은혜는 은혜라고 말하는 것.
나이와 직위의 높낮이랑 전혀 상관없이.
그것이 바로 강호의 도리라고 한다.
처억!
일행은 모두 포권지례로 위사검과 마주하였다.
그렇게 일행은 첫 협객행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 * *
다행히 사파와의 무력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천무관주 당백진이 사천 방어선을 재빠르게 구축하면서 사파의 움직임을 봉쇄했고, 장강수로채와 녹림칠십이채의 움직임이 잠잠해지면서 구심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사천 성도 인근에서 사천무관의 후보생과 생도들이 파견되었고, 후보생이자 삼대 무관 비무대회에서 우승자인 천무린이 다시금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을 일으켰다.
바로 쌍용검 파평이라는 절정 고수와 겨뤄 승리를 했다는 것.
“아무리 삼대 무관 비무대회 우승자라고 하지만, 쌍용검을 이겼다는 게 말이 되는가?”
“말이 되질 않네. 절정 고수를 어찌 후보생이 이길 수 있단 말인가.”
“아마 영웅 놀이를 하고 싶었던 게지. 다 같이 덤벼들어서 이겨 놓고 말이야.”
물론 모두가 그 사실을 믿은 것은 아니었다.
허나.
“……그렇다고 한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는가.”
“중요한 건 사천무관의 천무린 후보생을 비롯한 후보생들과 생도들이 파평과 마주했다는 점과 마공서를 다시 회수해 왔다는 점이지.”
“그렇다네. 객관적으로 그 사실만 봐도 놀랍고, 거듭 칭찬해도 모자랄 판이지.”
“허허허. 호기롭다고 해야 할지, 자신만만하다고 해야 할지. 어린 나이에 대단들하이.”
호사가들이 떠드는 유언비어 같은 소문 속에서 화룡점정을 찍는 이야기가 낭인들 사이에서 흘러나왔으니.
그 이야기는 다름 아닌 위사검의 입에서 나왔다.
「 사천무관의 협객들이 아니었다면, 난 이미 파평의 손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오. 그들은 자신들의 생사가 위태로웠음에도 가망이 없는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았고, 이 노구를 지키려고 용을 썼다오. 」
저명한 인사이자 무인이었던 위사검은 생각보다 많은 이들에게 칭송을 받는 인물이었고, 그는 파평의 악행과 동시에 천무린을 비롯한 사천무관을 치켜세웠다.
「 무엇이 협인지, 무엇이 의인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을 뿐 아니라, 혹여 사천무관의 일원들에게서 도움을 요청 받는다면 내 만사를 제쳐 두고 달려가리라. 」
비록 무공을 잃었다고는 하나, 정마대전에서 직접 낭인들을 진두지휘하며 정파인들의 편에 섰던 위사검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았다.
“위 대협께서 정말 그렇게 이야길 하셨단 말인가. 그 진중한 사람이?”
“그렇다니까! 거기다 파평 하면 누군가? 위 대협의 밑에서 같이 정마대전에 참전했던 인간이 아닌가!”
“허 참, 이거야 위 대협이 말했으면 믿지 않을 수도 없고.”
비난하던 이들의 반응이 대번에 바뀌면서 이번에는 사천무관을 칭송하기 시작했다.
“……저 녀석이, 그러니까 저…….”
태강이 입을 벙긋거리며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태강뿐만 아니라 수많은 후보생들이 황당한 눈빛으로 한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 녀석이 이번에 얻은 명성으로…….”
“……듣고, 나도 할 말이 없더라.”
“이것 참,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네.”
태강은 물론이고, 마공서를 추격하는 협객행에 동행했던 송무와 설화린, 백리무영과 신혁건마저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축하한다. 무린아.”
“……미친.”
밝은 표정으로 축하하는 이백과, 그와 상반된 표정으로 못마땅한 반응을 보이는 진량까지.
“뭐? 왜?”
그러나 정작 본인은 관심도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천무린이었다.
“너 이번에 별호가 생겼던데.”
“별호?”
귀찮게 별호가 왜 생긴대?
후비적후비적.
이미 정점을 찍어 봤다.
천마(天魔).
무신(武神).
뭔 별호가 생겨도 내가 만족할까.
귀를 파고 있는 천무린을 바라본 이들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한 표정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저런 녀석에게 뭐 그런 별호가…….”
“나 원 참.”
“싫다, 싫어. 내 입으로 말하기 정말.”
칠색 팔색 하는 이들에게 한 사람이 다가왔다.
저벅, 저벅.
“……원래 비정상적인 녀석이란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악교운이 모호한 표정을 지으면서 다가왔다.
“……뭐가요? 그보다 두 사람은 괜찮나요?”
두 사람, 즉 협객행에서 가장 큰 부상을 입은 부교관 고윤과 자겸을 뜻했다.
“괜찮다.”
“하여튼 내가 신경을 안 쓰면 난리라니까.”
그 말에 악교운은 순간 욱하고 올라오는 감정을 애써 눌러야 했다. 그게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어째서. 어떻게 된 놈이.
부교관들 두 명이 덤벼들어도 어쩔 수 없었던 파평을 상대하여 이겼단 말인가.
악교운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렇고.”
“응?”
“고생했다.”
응?
천무린의 두 눈이 커졌다. 그리고 고개를 들이밀면서 혼자 생각했다.
“이 양반이 뭘 잘못 드셨나?”
“혼자 생각한 거 아니었느냐. 다 들린다.”
아, 혼자 생각한다는 게 다 들리게 말해 버렸네. 크흠.
“다치지 않고 어느 누구 하나 잃지 않고 무사히 돌아와서 정말로…… 고생 많았다.”
가라앉은 말투에 천무린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갤 돌렸다.
“뭐 그리 진지하게. 그러지 맙시다. 우리 사이에.”
민망하다. 하여간, 오글거리는 거 싫어하는 인간이 잘도 표현하네.
“후후, 알겠다. 그보다 네 녀석에게 별호가 붙었더구나.”
“아니, 대체 별호가 뭐길래 다들 이렇게 호들갑이래.”
“한 번의 협객행치고는 제법 거창하게 붙어 버렸지.”
거창? 대체 뭐길래.
두 눈을 게슴츠레 뜬 천무린의 반응에 악교운이 씨익 웃었다. 그는 고갤 돌려 송무와 후보생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말해 주거라.”
“예, 예!”
악교운에게서 시선을 받은 송무가 고갤 끄덕였다. 그러곤 해맑게 웃으며 천무린을 바라봤다.
“……멸마신군(滅魔神君).”
우뚝.
그 네 글자에 천무린은 그만 얼어 버렸다.
“응?”
방금 뭐라고.
“하하, 아마 모두의 염원이 담긴 별호이지 않을까?”
……멸마라니.
황당한 눈빛이 된 천무린이었다. 마를 멸한다고? 마를 멸한다니, 내가?
모든 마(魔)를 아우르던 내가 멸마신군이라고?
예상치 못한 별호였다. 생각해 보지도 못했던.
천무린이 하늘을 바라봤다.
“이것도 당신이 행한 거요?”
닿지 않을 말 한마디였지만, 천무린의 귀에는 들려온 듯했다.
「 내가 무슨 힘이 있겠느냐. 다 너의 연인 것을. 」
저승사자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했다.
피식, 절로 웃음이 나오는 천무린이었다.
전생에서는 천마.
현생에서는 멸마.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그런 천무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후보생들은 서로 힐끗거리며 말을 이어 갔다.
“마공서를 회수하는 일에 무린이 네가 펼친 활약이 놀라웠기 때문이겠지. 단신으로 파평을 이긴 것도 있고 그렇고.”
송무의 말에,
“으으, 나는 왜 별호를 얻질 못해……!”
신혁건이 아쉬워했다.
“아무리 그래도 신군(神君)이라는 별호는 좀 과하지 않나요?”
“삼대 무관 비무대회 때 우승자인데도 생기지 않았는데, 그때의 공까지 더해진 거 아니겠어.”
“아휴, 하여간 될놈될이지 뭐.”
아쉬워하는 이들을 보며 악교운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사천무관 7기수와 8기수 합작 협객행은 처음이었구나. 첫 협객행을 무사히 마쳤고, 또 고생했다. 너희 덕에 이번에 사천무관의 평판이 드높아졌구나. 다시 한번 고맙다.”
송무와 설화린, 이백과 진량, 백리무영과 신혁건까지 모두 고생을 한 것은 사실이었으니. 악교운은 후보생들을 바라봤다.
악교운의 말처럼 긍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루면서 사천무관의 명성이 크게 높아졌다. 동시에 사천에 파견 왔던 개방의 탁궁이 각 지부에 발 빠르게 움직이며 어디에서 어떻게 마공서가 출몰했는지 일제히 정보를 전달하였다. 당연지사 그 정보는 천무린이 쥐소굴과 합작하여 퍼뜨려서 은밀하게 탁궁에게 전달한 것이었다.
정파 무림으로서는 천무린이 직접 쓴 탁본 마공서라는 사실을 알 리 없었지만, 그들에겐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수많은 마공서를 회수할 수 있었고, 무림맹과 삼대 무관의 활약으로 정파 무림은 민간과 군소 방파, 정파를 지지하는 이들로부터 상당한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근 8년간 주목받지 못했던 사천무관이 정파 무림의 중심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그리고 한 해가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