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4화
제114화
일반적인 장검보다 1촌(寸)이나 짧은 검신.
그러나 단단해 보이는 쌍검은 삼류 낭인에 불과했던 파평을 절정 고수로 올려놓았다.
범인이라면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의 쌍검을 타고난 신력으로 휘두르기 시작했고, 파평 특유의 검술을 무수한 실전 경험을 통해 갈고닦아 왔다.
궤적이 짧음에도 불구하고 변칙적이고 무수한 변화를 일으키는 쌍검의 검술과 파상공세로 처음 쌍검을 마주하는 이에게는 크나큰 당혹감을 안겨 주었다.
웅웅!
쌍검에서 울려 퍼지는 검명이 점차 커져 객잔 내부를 떨어 울리다 못해 뒤흔들 정도가 되었다.
“나 하나 잡으려고 너무 용쓰는 거 아니야?”
“…….”
파평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습은 천무린마저 차분하게 만들었다.
그러곤.
“여기서 벗어나야겠는데, 모두들.”
차분하게 가라앉은 두 눈.
진중하게 굳어 버린 표정.
낮게 내려앉은 목소리에 송무와 이백을 비롯한 일행 모두가 다시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쓰러진 파평의 수하들을 뒤로하고 위사검과 객잔의 주방에 있던 이들까지 데리고 빠져나갔다.
“검기(劍氣)를 느낀 것이로군.”
산발적으로 쏟아 내던 옅은 검풍의 기운이 검기로 진화되면서 파평의 기세 역시 폭사했다.
“막아 낼 수 있다면 어디 막아 내 보거라.”
파평이 아는 한, 검기는 오직 검기로만 대응할 수 있다. 검풍과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기예가 바로 검기였기 때문에.
내공의 소모가 극심하다는 단점을 갖고 있긴 하지만, 위력은 최소 몇 배 이상이었다. 게다가 절륜한 내공을 갖고 있는 이들이라면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무기였다.
내공이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쌓이는 것이다. 그것은 고금의 진리였고, 제아무리 뛰어난 내공심법을 익힌다고 한들, 내공의 양을 키우는 방법은 고금의 진리를 반드시 따라야만 했다.
“자신감이 대단하네.”
여유롭던 천무린의 말이 채 끝맺기도 전에 섬전과도 같은 빠른 속도와 기세로 파평의 좌수 검이 움직였다.
서걱!
자리하고 있던 천무린의 자리가 깊이 파이며 단숨에 객잔 바닥까지 베어 버렸다. 날카로웠던 검세에 대한 대처는 단순했다.
처억.
흐릿해졌던 천무린의 신형이 언제 사라졌었냐는 듯 금세 본모습을 되찾았다.
“다시 또 이형환위더냐?”
“뭐, 비슷해. 부동명왕보(不動明王步)라고도 하지.”
부동명왕보(不動明王步).
소림이 낳은 절세의 보법이다.
소림칠십이절예 중 보법으로는 그 어떤 것도 감히 따라올 수 없다고 평가되는 것.
부동, 움직이지 않되 명왕과도 같은 움직임을 보인다.
그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부동명왕보는 펼칠 수 없는 최고의 기예였으나, 그것이 천무린을 통해 다시금 세상에 튀어나왔다.
“……그놈의 다리가 문제로구나. 성가시다. 대번에 잘라 주마.”
“항상 말만. 그만 떠들고 제대로 좀 실력을 보여 봐.”
웃는 천무린의 입가에 이가 훤히 드러났다.
그리고 천무린은 파평의 수하들이 버리고 간 검 한 자루를 발로 올려 차서 좌수(左手)에 쥐었다.
천무린의 미소에 파평 역시 기괴하고 비틀린 미소로 화답하듯 쌍검을 교차했다.
휘둘러지는 쌍검에서 일어나는 불그스름한 기운은 객잔을 누비고도 남을 정도로 맹렬한 기운이었다.
순식간에 불어난 적기(赤氣)는 천무린을 옭아매기 위한 그물망처럼 단숨에 덮쳐왔다.
검기가 그물의 형태를 갖추는 순간에, 천무린의 허리춤에 있던 검이 대번에 뽑혀 나와 우수(右手)로 휘둘렀다.
좌수와 우수.
균일하지 않은 두 자루의 검이 종횡무진 휘둘러지더니, 그물의 형태로 덮쳐오는 붉은 기운에 대적했다.
천무린의 대응은 단순했다.
파평의 쌍검의 움직임보다.
더욱 빠르게, 쾌속하게, 표홀하게, 날렵하게 그리고 미친 듯이!
움직이는 것이다.
휙휙휙휙!
수십의 붉은 검기를 쳐 내기 위하여 얇디얇은 검막(劍幕)이 천무린의 쌍검에 덧씌워지는가 싶더니, 식별할 수도 없는 속도로 휘둘러지기 시작했다.
사사삭! 삭삭!
붉은 기운을 품었던, 흡사 그물망의 형태까지 갖추었던 검의 잔영이 나아가지 못했다. 그물망처럼 옭아매던 파평의 검기와 부딪히기 시작했다.
검막이 붉은 기운에 맥없이 사그라드는가 싶더니.
파바바박! 서거걱!
놀라워할 시간도.
어리다고 입을 놀릴 수도 없을 만큼.
파평의 검기가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천무린의 검영(劍影)이 수없이 피어났다. 그 검은.
“……꽃?”
그렇다. 꽃이 피어나듯 일어나고 있었다.
파평의 본능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움직이도록 촉구했다. 쉴 새 없이 움직이도록 위험을 알리는 경종이 울렸고, 그래서 움직일 수밖에 없는 파평의 쌍검이었다.
섬뜩한 붉은 기운은 천무린의 검막을 도려내기 위하여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타올랐고, 그에 질세라 천무린의 검영(劍影)은 거친 불길을 타고 꽃을 피웠다.
성난 불길을 잠재우는 것은 도리어 맞불을 놓아 압도적으로 찍어 누르는 것이다.
천무린은 마치 새로운 동력원이라도 얻은 듯 주체할 수 없이 빠르고 쉼 없이 움직였고, 그의 검영은 꽃처럼 피어올랐는데.
그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려왔다.
아니.
검의 비가 내렸다.
파평은 그의 검세에 놀라 외눈동자가 절로 커졌다.
……익숙하다.
분명 쌍검의 움직임은 유려하지 않았다. 어딘가 어설픈 점이 있었다. 쌍검술만으로는 자신을 따라오기엔 미숙한 점이 있었다.
그런데도.
‘왜 나의 검기가 저 검영을 지워 내지 못한단 말인가.’
그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천무린이 펼치고 있는 쌍검의 기예로 만천하를 아우르는 검의 비(雨)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하늘에서 꽃비가 내려오게 할 만한 검의 기예. 언젠가 한 번 본 적이 있는 기예였다.
“……마, 만천검우(萬天劍雨). 사천당가의 만천화우(萬天花雨)보다 아름답다던 기예를 검으로 펼쳐 낸 단 한 사람이 쓰던 기예인 것을, 어찌하여 네놈이!”
사천당가의 비술이자 오의인 만천화우를 검으로 펼쳐 낸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것도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십여 년 전.
「 만천화우? 그게 뭔데 X덕아. 멀리서 비겁하게 암기로 쓰지 말고 검으로도 쓰면 되는 거 아냐? 」
언젠가 반드시 천마신교로 투신하겠다고 자신을 마음먹게 한 그날이었다. 정마대전 당시, 만마(萬魔)의 종주이자 천하가 인정한 무신(武神)이 보여 준 최절정의 기예.
어찌 잊을 수 있으랴.
“만천화우? X랄. 그게 뭔데 X덕아. 그냥 검으로 펼치면 되는 거지.”
파평의 눈에 그날 무신의 형상이 천무린에게 덧씌워졌다.
“아아…….”
비틀린 미소.
여유로운 눈빛.
거침없는 행보.
어느 하나 다른 게 없었다.
그렇구나.
세상에 만천검우를 펼칠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뿐이다.
비록 어떤 연유로 자신이 알고 있는 모습과 다른지 알 수 없었지만.
서거거걱!
몰아치는 검의 폭풍우 속에서 파평의 검기는 붉은빛을 잃어 가기 시작했다.
힘을 잃는 파평의 쌍용검이 찰나의 호흡에 긴장을 풀자마자 뎅겅 하는 소리와 함께.
터억.
두 팔이 잘려 나가면서 허공에 그대로 피분수를 일으켰다. 그러자 균형을 잃은 채 고꾸라지는 파평이었다.
“……감히 내가 하늘을 건드렸는가.”
허무하게 잘린 두 팔을 보고도 외눈 속엔 동경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천무린을 향한 동경인지, 아니면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모습인지는 모르겠지만.
“허억. 허억. 에고. 나 죽겄다.”
찰그랑, 찰그랑.
양손에 쥐고 있던 검 두 자루를 내던지고 천무린은 꺾일 것 같은 두 무릎을 손에 쥔 채 턱 끝까지 차올랐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후웁. 파하. 후우웁. 파하.”
만천검우라니. 전성기 때도 많이 쓰지 않던 건데, 이번에 무리를 좀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검기를 그렇게 막 뿌려 대는 건 선을 넘은 거잖아.
두 팔이 잘려서 맛이 간 파평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푹 하고 내쉬는 천무린이었다.
파평이 보여 준 무위는 천무린이 환생하고 나서 만난 대적자들 중에서 가장 강한 이에 속했다. 닳고 닳은 천무린의 경험과 무공에 대한 지식이 방대하다고 한들 닥치고 검기를 뿌려 대는 녀석을 막아 내려면 가진 내공만으로는 무리가 따랐다.
오죽하면 손에 맞지도 않는 쌍검을 들었겠는가.
원래 같았으면 한 손으로 멋들어지게 펼쳤을 만천검우이지만, 지금은 쌍검으로 펼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부족한 점을 메우려면.
그나저나.
“……아아, 역혈마공을 얻어 천마신교에 투신했더라면 당신의 옆을 보좌할 수 있었을 텐데.”
엥?
기역자로 꺾여 있던 천무린의 고개가 그를 바라본다.
죽어 가는 마지막 말이 역혈마공이라고.
“천마신교에서 그분을 보좌하며 천하를 누렸을 텐데. 그분을 위해 온몸을 내던지고 내 모든 것을 불살랐을 텐데.”
저런 애 앞에서 역혈마공을 가짜라고 말할 수 있을 리가.
그것도 내가 대애충 끄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게 가능할 리가.
천무린의 두 눈이 질끈 감겼다.
한 사내의 가슴 뜨거운 열정에 자신이 찬물을 부은 격이었다.
이런 천무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파평의 시선이 물끄러미 천무린을 향했다.
“펴, 편히 보내 주시겠습니까. 그분의 전인이시여.”
처음으로 경어를 쓰는 파평이었다.
보아하니, 천무린을 천마신교의 교주이자 무신 시절의 천무린의 제자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무렴 어떤가. 놈이 그리 생각한다는데.
그 말에 천무린이 한숨을 푹 쉬면서 고갤 저었다.
“미안한데, 그건 불가능해. 대신에…….”
천무린이 씨익 웃으며 파평의 아랫배에 발을 올려다 놓았다.
“다른 건 할 수 있지.”
그 말에 파평의 외눈이 급격히 커졌다.
“무, 무슨!”
“편하게 보내 달라고? 염X하네. 이런 개 같은 놈이. 네 죄가 가벼운 줄 알아? 이 새끼가 어딜 편히 가려고 해?”
콰직.
무심하리만치 찍어 누른 발길질에 파평의 몸이 펄떡거렸다.
입이 쩍 벌어진 파평은 살면서 처음으로 겪어 보는 격통에 신음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이 새끼야, 마교가 무슨 오갈 데 없는 부랑아 받아 주는 곳인 줄 알아? 하여간 뻔뻔하기 짝이 없어요. 그리고 역혈마공이 뭐? 그거 갖고 투신하면 뭐 어째?”
내가 짜깁기한 걸 갖고 갔으면 넌 천마신교에서 오체분시를 당해 갈기갈기 찢겼을걸.
“그거 익혔으면 십중팔구 몸이 불구가 되었을 텐데. 차라리 그것보단 나을걸. 어차피 네가 바라던 게 나한테 목숨을 맡기는 거였다면.”
그 말에 파평은 고통스러워하는 와중에도 천무린에게 고갤 돌렸다.
몸을 불사르니 어쩌니 헛소리를 늘어놓으니. 쯔쯧.
“천마신교에 너보다 약한 애가 있을 것 같으냐. 미안하지만 네깟 놈이 와 봐야 내 보좌는 무슨. 저 밑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단체에 조장급이나 맡았을까. 으휴.”
간만에 천마신교를 떠올리며 쏟아 내는 내 말에 커졌던 파평의 눈은 단전이 비워진 고통과 단전이 일반인보다 못한 그릇이 되어 가는 것을 느끼면서 그만 혼절해 버리고 말았다.
아아.
그래도 생명을 앗아 가진 않았다.
스스로 기특하여 쓰담쓰담 해 주고 싶을 정도였다.
자신에게 대견함을 느끼며 천무린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씨익 웃었다.
“나 잘했지? 저승사자야.”
「…….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아마 잘했다고 했으리라.
분명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