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화
제109화
진량이 생각하는 호적수는 이백, 단 한 사람뿐이었다. 적어도 이백만 꺾으면 동년배의 인물들 중 자신을 이길 만한 이는 하나도 없으리라고 확신했다.
심지어 이백이 비무대회에서 보여 준 활약상은 진량이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겨 낼 것이다.
무관을 졸업하는 대로 점창파의 주인이 되어 강호를 누빌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진량이었다.
‘반드시 이백 저놈을 꺾고 대제자가 되겠다.’
그런데.
“감히 후배 기수 따위가! 올라설 수 없음을 필히 보여 주마.”
건들거리는 천무린의 모습에 진량의 눈에는 열화(熱火)가 피어올랐다.
꽈아악, 하고 손잡이를 쥔 진량의 온몸에서 피어나는 기세는 잘 벼려진 검처럼 매섭고 날카로웠다.
오소소소.
후보생들의 표정이 동시에 굳어졌다.
“……저 정도였어요?”
“비무대회 때보다 더 강해진 것 같은데.”
“말도 안 돼…….”
그 이야기를 들은 이백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비무대회에서 떨어진 뒤로 녀석은 단 한 번도 손에서 검을 놓지 않더군. 어쩌면 비무대회가 녀석의 기폭제가 됐을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진량의 모난 마음과는 별개로 강해지고자 하는 열의와 열망만큼은 그 누구보다 강하다는 것을.
이백에 대한 질투와 시기를 넘어서서 무인으로서 이기고 싶다는 열망이 촉발한 것일 터. 무인이라면 어느 누구도 그런 점을 욕할 수는 없을 것이다.
“X랄!”
이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빠각! 빠각!
두개골, 늑골로 이어지는 무자비한 난타는 진량의 기세를 대번에 꺾어 버렸다.
“후배 기수 따위라고? 선배가 선배다워야지. 어디 꼰대처럼 염X질이야!”
버럭 소리를 지른 천무린이 타구봉법으로 진량을 마구 두들겼다.
퍼버버벅!
진량은 타구봉법 앞에서 열심히 반항하며 이를 꽉 물었다.
“으윽…….”
“그렇게 안 봤는데, 맷집이 제법인데.”
“후, 후배 기수 따위가!”
“제법 끈기도 있고, 또라이 기질도 있는 게 제법이야. 이번 여행은 아주 즐겁겠어.”
짜릿하다.
원래 말 안 듣는 놈을 말 듣도록 교육시키는 것만큼 재미난 일이 없다.
왜냐고?
힘들지 않느냐고?
왜 힘들지? 그냥 패면 되는데.
잠깐 천무린이 딴생각을 하느라 멈칫하는 동안, 멀찍이 뒤로 물러난 진량이 살벌한 눈빛을 띠었다.
그 모습에 후보생들이 감탄사를 뱉었다.
“다른 게 대단한 게 아니었네요.”
“그러게 말이야. 맷집이 아주 좋네.”
“저렇게 맞고도 싸우려고 검을 잡는다는 게.”
“우리 중에 저렇게 맞고 버틴 이가 있었나?”
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후우, 그 근육 덩어리인 명진이 녀석도 한 방에 나가떨어졌어. 무슨 말을 더 해.”
“그럼 저 선배가 정말 대단한 거네.”
후보생들의 감탄사에 이백의 두 눈이 빛났다.
“저 자세는.”
꾸구국.
한 걸음 나서 중심을 잡은 진량의 움직임. 그리고 살벌하기 짝이 없는 기세가 다시금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구곡전척(九曲箭剔).
사일검법의 오의. 사일의 정수이자 사일이 가진 강맹함으로 승부수를 던지는 최후의 초식.
진량 역시 어느새 사일검법의 오의에 점차 다가가고 있음을 보여 주는 모습이었다. 이백과 마찬가지로.
“이백 선배님만 쓸 수 있었던 거 아니었어?”
“그럴 리가. 사일검법은 나만의 검이 아니다. 점창의 것이지.”
“분명 그때는 저 오의를 못 쓰지 않았나요?”
“불현듯 깨닫게 된 것이겠지.”
파앙!
이야기를 하고 있던 이들은 말을 멈추고, 땅을 박차고 나아가는 진량의 모습에 집중했다.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진량의 신형이 흐려졌다 말고 천무린에게 쇄도하는 모습은 분명 이백의 강맹함과는 다른 쾌속함이 있었다.
이백의 담백한 기세와 달리 끈적한 살기까지 더해지니 검세 자체가 아주 흉포해졌다.
그 진득한 살기는 보는 이로 하여금 상대인 천무린을 걱정하게 만들었다.
“어……!”
“저, 저러다가!”
“무린아! 위험해!”
“천무리이인!”
후보생들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걱정이 잔뜩 묻어났다.
아무런 자세도 취하지 않는 천무린의 무방비한 모습에 후보생들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당장이라도 허리를 두 동강 낼 듯 보였기 때문이다.
“제법인데?”
천무린은 파고들어 오는 흉흉한 검세를 지그시 바라보면서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흥! 이제 와서 울고불고해도 나 역시 멈출 수 없다!”
소리친 진량의 눈빛이 그저 가만히 멈춰 있는 천무린을 바라봤다. 어째서 가만히 웃고만 있는가.
이대로 이 구곡전척을 맞이한 천무린은 어떻게 될 것인가.
불현듯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진량의 아랫입술이 꾸욱 하고 씹혔다.
결국.
“칫.”
손잡이에 힘을 주어 방향을 약간이나마 틀었다.
그렇다고 해도 천무린을 꿰뚫을 것 같은 이 검세는 멈추지 않겠지만.
어쩌겠느냐. 너의 업일 것이다.
“……았냐.”
응?
코앞에 당도한 진량의 검 끝을 보고 중얼거리는 천무린이었다.
“제법인 걸…… 그렇게 말할 줄 알았냐고! 이 새끼야!”
구곡전척이고, 구국진척이고 나발이고!
후웅! 휙휙휙!
살벌한 기세로 천무린을 난자하려던 검격은 취팔선보라는 희대의 보법을 쓰는 천무린 때문에 종이 한 장 차이로 빗겨 갔다.
유려하고 변칙적인 천무린의 움직임을 진량의 검세가 따라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발걸음은 살기등등한 검세를 보란 듯이 피해 냈고, 매순간 아슬아슬 피해 내는 모습에 진량의 손아귀에는 힘이 잔뜩 들어갔다.
“이익! 쥐새끼처럼 피하지 말고 덤벼라!”
열이 뻗친 진량의 노호가 터져 나왔지만, 천무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무자비한 칼부림 속에서도 여유롭게 움직이는 것은 물론이고.
“실력이 딸려서 잡지 못하는 걸 왜 나한테 난리를 쳐? 나 원 참, 요즘은 세상이 거꾸로 돌아간다니까.”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입담까지.
월등한 모습으로 진량을 찍어 누르다 말고.
빠각! 빠각!
검집은 부서질세라 진량의 온몸을 누비듯 타격했다.
휘청거리면서 몸이 퍼덕거릴 정도로 크게 반응했지만, 그래도 진량은 끝까지 검을 놓지 않았다.
“크흐으윽.”
“와, 이놈 이거 물건일세.”
천무린은 짧게 감탄했다.
“역시 선배는 선배인가 봐? 1년 더 먹었다고 악바리도, 근성도 다르네.”
“……허억, 허억.”
대꾸할 기력도 없어진 진량은 검을 지팡이 삼아 겨우 버티고 서 있는 게 고작이었다. 흔들리는 두 눈동자가 천무린을 응시했다.
어째서.
구곡전척을 완성하지 못했다고는 하나, 오곡전척(五曲箭剔) 정도 펼칠 수 있다면.
동년배에서 자신을 따라올 자가 없다고 여겼건만, 이토록 우습게 피하며 자신을 마치 가지고 놀 듯 후려친다.
다시 시선을 돌려 이백을 바라봤다.
후보생들과 달리 담담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짜증이 났다.
자신 역시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았지만, 같은 것을 지도받으면 한 걸음 더 앞서 나가는 이백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래서 이백을 따라잡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하지만.
꾸욱.
검의 손잡이를 쥐고 있는 진량의 손아귀에 힘이 더해졌다.
‘결과적으로 더욱 차이가 벌어졌다.’
그래서 이백에게는 없는 권력을 이용하게 됐다. 하지만 이젠 그조차도 이백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세상이 지금은 자신을 등져도 언젠가는 알아줄 거라며 검법을 갈고닦았다.
그런 와중에 이백보다 더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후배가 등장했다.
어째서.
자신은 이리도 노력하고 있는데 아무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두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기필코 저 녀석보다 더 낫다는 것을 보여 주리라. 그리 생각하고 천무린의 시비에 응했던 것인데.
“허억, 허억.”
거친 숨을 몰아쉬는 진량은 천무린을 응시했다. 천무린의 옷깃 하나 스칠 수가 없었다.
“어째서, 어째서 네놈은 그렇게…….”
차마 뒷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 말을 뱉는 순간, 여태 자신이 쌓아 올린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될 것 같았기 때문에.
“강하냐고?”
씨익 웃은 천무린이 한 걸음씩 다가오며 진량의 뒷말을 이었다.
“원래 강한 건 타고나는 거야.”
그런 거다. 타고나는 거다.
천무린의 말에 진량의 고개가 푹 꺾였다.
“타고난다는 건 무릇 무공에 대한 오성과 재능만을 뜻하는 건 아니지. 애새끼처럼 난 왜 쟤보다 강하지 못할까. 이렇게나 노력하고 있는데, 하면서 남을 헐뜯고 비난하고 질투하고 시기하기보다.”
저벅, 저벅.
“어떻게 하면 더 강해질까. 저 녀석의 검에는 대체 무엇이 담겨 있을까. 그저 강해지고 싶다는 담백한 열망을 지닌 정신적 건강함도 타고난 재능에 해당하지.”
그러면서 천무린이 송무와 이백을 가리켰다.
“혹은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열망이 삐뚤어지지 않고 순수한 노력으로 나아가고 싶어 하는 마음도 타고나는 거고.”
이어 설화린, 백리무영, 신혁건을 가리켰다.
“편협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네 녀석이 담고 있는 검 끝은 한계가 명확할 뿐이다. 남을 밟고 올라서는 검이 대체 얼마나 높은 곳까지 오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저벅, 저벅.
천무린의 한마디, 한마디가 진량의 마음을 아프게 후벼 팠다. 후벼 파다 못해 폐부 깊숙이 찔러 댔다.
후보생들과 이백이 보였다.
‘나보다 타고난 이들이라고?’
송무와 이백은 담백하게 강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설화린과 백리무영, 신혁건은 각자의 위치에서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아 스스로를 증명하고 싶어 했다.
분명 자신은 저들보다 부족한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저들보다 뛰어난 배경을 가졌고.
부족함 없이 하루를 살았으며.
어릴 적부터 인정받아 온 검에 대한 재능도 있었다.
“……늦지 않았다.”
그 말에 진량은 떨궜던 고개를 서서히 들었다.
“지금부터라도 검을 바로잡아라. 마음을 바로잡는 것이다.”
여태 보지 못했던, 아니 보지 않았던 천무린의 얼굴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진량의 온몸을 짓누르는 천무린의 기세에.
“……내가, 내가, 가능한 건가?”
“가능하다.”
처음으로 모난 마음이 아니라 순수한 무인의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 모습에 천무린이 다가와 진량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면서 씨익 웃는다.
“당연히 가능하지. 불가능할 것 같던 놈들도 내가 다 가능하게 만들었어.”
“……고맙다.”
“고마워할 필요 없어. 지금부터 개조 작업에 들어갈 거니까.”
“……어?”
터억, 터억.
천무린의 손엔 검집이 아니라 어디선가 주워 온 두툼한 나무 몽둥이가 쥐어져 있었다.
저, 저건.
악교운 집무실에나 있을 법한 나무 몽둥이가 아닌가.
대체 저걸 어디서?
“……무, 무슨?”
진량은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손사래까지 치면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그의 힘으론 역부족이었다.
빠가악!
마치 두개골이 박살 나는 소리와 함께 진량의 의식은 대번에 멀리 날아가 버렸다.
“……이런 씨X, 끄르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