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화
제106화
“……후! 고맙소. 역시 천무린 후보생이오. 천 후보생이 아니었으면 내 평생 이런 산해진미를 먹어 봤을까 싶소.”
입가에 덕지덕지 음식물을 묻히고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탁궁에게 천무린이 흐뭇한 얼굴로 웃었다.
“에이, 무슨. 당연한 일이지. 고생하는 우리 개방의 동도를 위해 이것쯤은 별거 아니지. 그것도 정파 무림을 위하여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니는!”
산해진미에 이어서 노고까지 치하해 주는 천무린의 말에 깊이 감동한 탁궁의 두 눈은 이제 호의를 넘어서서 충성심까지 보일 지경이었다.
“뭐든 말만 하시오! 내 힘이 닿는 데까지 다 들어주겠소!”
그 말에 당백진과 악교운, 후보생들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이게 무슨!
개방에서 내로라하는 뛰어난 후기지수의 마음을 불과 일각 만에 사로잡아 버렸다.
“쿠헬헬헬.”
천무린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탁궁의 어깨를 두들긴다.
“암, 암! 그래야지. 힘이 닿는 데까지? 아니, 힘이 닿지 않아도 해내야 해. 쿠헬헬헬.”
그 말에 탁궁은 묘한 느낌을 받았지만, 기분 탓이라 여기고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였다.
물론 얼마 안 가 크게 후회해야 했지만.
* * *
그로부터 탁궁은 계속해서 천무린에게 개방 지부로부터 정보를 물고 와야 했다.
“아니, 지금 사천 개방 지부에서 얻어 올 수 있는 정보가 이게 전부라고? 사결개 정도 되는 신분이? 엉?”
천무린의 두 눈썹이 확 찌푸려졌다.
“헉헉, 처, 천무린 후보생. 이 정도면 된 것 같은데.”
“돼? 뭐가 돼? 어? 뭐가 되냐고! 이 새끼야!”
일그러진 천무린의 표정. 어느새 기수 따윈 개나 줘 버리고 탁궁을 고양이 앞에 선 쥐처럼 만들어 버리는 야차만 있을 뿐이었다.
으르렁거리는 천무린의 모습에 기가 팍 죽은 탁궁에게는 그때부터 지옥이 시작되었다.
“아니! 거지새끼가 그렇게까지 처먹었으면! 어? 밥값을! 어? 해야 할 거 아니냐고오! 앙!?”
대놓고 면박을 주는 것은 다반사였고.
“아이고, 제대로 일도 안 하고 여기서 놀고먹고 싼다고 정신없이 시간 보낸 줄 알면 산동무관주와 개방도들이 아주~ 좋아하겠다! 그렇지?”
탁궁으로선 억울하다 못해 울부짖을 이야길 마구잡이로 내뱉는 천무린이었다. 각종 협박까지 버무려 탁궁을 쏘아붙이는 천무린이었고, 궁지에 몰린 탁궁은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헐떡이며 온갖 정보를 그에게 가져다 바쳐야 했다.
“산동무관과 섬서무관은 전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비상사태인 만큼 협객행으로 전역에 나가 있던 3, 4학년들을 모두 복귀시키고 이 일에 투입할 요량인 듯 보입니다.”
나름 고급 정보를 가져와 시급한 사안을 먼저 이야기해 주니 당백진과 악교운은 크게 만족하였다. 의당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정보로 확인해 듣는 것은 전혀 달랐기에.
“우리도 서둘러야겠군.”
“탁 생도, 정말 고맙구려.”
두 사람의 치하에 탁궁은 왠지 모르게 눈가가 붉어졌다. 천무린한테 하도 구박을 받다 보니 이런 칭찬이 크게 와 닿았다.
그런데.
“허허, 이 새끼가. 정보가 뭔지 모르나 보네. 무슨 정보에 추측으로 말을 해!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지!”
기껏 받아 온 정보에도, 심지어 고급 정보들로 추려 낸 사실을 갖고 와도 혼나는 건 똑같았다. 먹은 것 이상, 대접 받은 것 이상으로 뱉어 내고 또 그 이상으로 뱉어 내는 탁궁이었다.
“염라대왕도 그냥은 안 데리고 갈 녀석이야.”
“아아, 태상노군! 원시천존! 무얼 하시기에 저런 놈 안 데리고 가십니까!”
비무대회에서는 경쟁 상대였지만, 천무린 앞에만 서면 모두가 동지이자 고통을 함께 나누는 친우가 되었다.
그 고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기에, 송무와 태강을 비롯한 수많은 후보생들이 탁궁에게 다가와 어깨를 다독거렸다.
토닥, 토닥.
“다 이해해요. 우린 동지니까요.”
“원래 그런 거 아닐까? 친우 좋다는 게 뭐겠습니까! 이럴 때 다 힘이 되고 도움이 되는 게 바로 친우지요!”
“인생은 쓰고, 천무린은 더 쓴 법이지. 산동무관에는 천무린이 없으니까 한 번쯤 당해 보는 것도…….”
“쓰읍! 잘못 걸려도 단단히 잘못 걸린 거죠. 아마도…… 탁궁 생도님은 천무린의 마수에 걸려든 것 같은데요.”
위로인지 비아냥거림인지 모를 말을 내뱉는 후보생들의 모습에 탁궁은 눈가에 흐르는 무언가를 계속 닦아 내야만 했다.
서로 부둥켜안는 후보생들과 탁궁의 모습은 이미 오래전부터 친우였던 듯 금방 어우러졌다.
그림자 하나가 그들 사이에 드리워지기 전까지.
흐뭇.
“뭐야, 뭐야. 네 녀석들도 같이 뛰어다니려고? 거지 놈이랑?”
흐뭇하게 웃고 있는 천무린의 나지막한 이야기에 후보생들의 표정이 싹 굳어졌다. 동시다발적으로 탁궁을 바라보고 있던 아련함과 동정심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우리가? 누굴? 왜?”
“무슨 그런 헛소릴 해? 대체 누군데!”
“절대 그럴 리 없지. 거지새끼랑 누가 상종을 해!”
빽 하고 소리친 후보생들이 하나둘 탁궁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보면서 천무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뭐, 다들 동지가 어쩌고, 친우가 어쩌고 그랬던 거 같은데? 아닌가?”
그 말에 손사래까지 쳐 가며 부정하던 후보생들은 더욱 탁궁에게서 멀어졌다. 완벽하게 선을 긋는 모습을 보여 주는 환상의 이중성을 선보인 것이다.
“그럴 리가. 무린이가 많이 피곤한가 보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 주제에 다른 사람을 챙긴다는 건 어불성설이지. 암.”
“그렇고말고!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다고.”
“오늘부터 특훈에 들어가기로 했다고요! 다들 힘내요!”
“나부터 잘하자! 아자아자!”
황태와 남사익은 물론이고, 설화린과 태강, 사람 좋은 미소를 띠던 송무마저 탁궁에게서 시선을 돌려 버렸다.
“…….”
위로해 줄 땐 언제고, 이렇게 갑자기 선을 긋는다고? 누가 위로해 달라고 했나!
탁궁은 시커멓게 죽은 초점으로 후보생들과 천무린을 번갈아 바라봤다.
대체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
얼빠진 얼굴로 후보생들을 쭉 훑어보던 탁궁의 앞에.
“밥값 해야지?”
“…….”
악마의 재림(再臨)이었다.
내 다시는 사천무관에 발을 디디지 않으리라.
* * *
비록 탁궁은 무수한 면박과 꾸준한 잔소리로 천무린에게 괴롭힘을 당했지만, 그가 가져온 정보를 토대로 사천무관은 재량껏 움직일 수 있었다.
산동무관과 섬서무관의 움직임을 면밀히 살펴 전반적인 상황을 재빠르게 파악한 당백진은,
“장강수로채와 녹림칠십이채를 담당하고 있는 협객행 무리들을 복귀시키되, 청성파와 아미파에게도 상황을 전달하여 일선에 방어책을 구축하도록.”
“마교의 발호일지 모르는 마공서 추격조를 서둘러 꾸려야 하며, 정파 무림 전역에 있는 마공서는 회수하지 못할지라도 사천에서 나온 마공서만큼은 반드시 회수해야 한다. 추격조의 인원은 후보생과 생도, 그리고 부교관들로 구성하도록!”
“장강과 녹림 녀석들로 보건대, 대치 전선 때문에 수준 높은 인원들을 대거 빼긴 힘들 것이므로 우린 최소 6명의 생도와 후보생, 그리고 부교관급 이상에 해당하는 인물 둘 이상을 조합하도록 하라.”
직접 진두지휘에 나서며 적재적소에 지시를 내렸다. 보고 들은 정보의 핵심을 정확하게 짚어 내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시켜 나갔다.
“역시 장난 아니신데요? 무관주님의 명성은 익히 들었지만, 정보를 듣고 파악하는 것도 힘드실 텐데 저렇게 바로바로 지시하실 줄이야.”
사일검룡 이백이 감탄하자, 부교관인 고윤과 자겸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행동력하며, 철두철미한 성격하며,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으시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사천당가라는 명문가의 가주로서도 활약하셨고, 직접 천마를 상대해 보신 전설 중 한 분이 아니시더냐.”
“어디 그뿐이겠어. 애초에 무관주가 된다는 것 자체가 상징성을 띠고 있다. 무관의 역할 자체가 단순히 무림의 대들보들을 키우는 데에만 의의를 두고 있지는 않으니까.”
자겸의 말처럼 삼대 무관의 역할은 단순히 인재를 키우는 것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전시 상황이 닥치면 중추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도 된다.
특히 앞서서 주변 지역의 문파들을 규합하고 독려하여 전선에 나설 수 있도록 이끄는 지도자의 역할도 겸해야 했다.
그런 역할을 아무에게나 맡기면 일이 제대로 진행이나 되겠는가.
당시 삼대 무관주로 누굴 임명할지 갑론을박했을 때도 당백진이라는 이름 석 자에는 그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바로 수긍했다고 한다.
“당 관주님이 주는 무게감이란 바로 그런 것이지.”
“암! 대단하신 분인 것은 확실하다.”
존경과 경외의 시선으로 당백진을 바라보는 부교관들의 말에 이백 역시 존경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X랄! 염X들 하고 있네. 무게감이고, 진두지휘고! 앓느니 죽지! 어휴!”
하지만 꼭 그럴 때마다 초를 치는 이가 있었다.
팔짱을 낀 채 코웃음을 치던 천무린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몇 번이나 두들겼다.
“저런 코흘리개 새끼들이 나랑 싸우는 걸 봤었어야 하는데! 그랬어야 아무런 말도 못 하지!”
아아! 천마 천무린의 시절이 그립도다. 아아! 옛날이여!
그때였으면 무관주 넷을 동시에 두들겨 패고도 힘이 남아돌아서 다른 문파들 죄다 부수고 그랬는데!
그렇게 한참을 부들부들 떨며 당백진을 욕하고 있는 천무린을 황당한 얼굴로 바라보는 이백과 부교관들이었다.
“어찌 보면 참 대단하단 생각이 든다.”
“부교관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뭔가 깊이 반성하게 됩니다.”
이백의 진중한 얼굴에 부교관들이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고갤 돌려 그를 바라봤다.
“저 정도 또라이는 되어야 무공 역시 말도 안 되는 또라이급으로 성장이 가능한 것인지 말입니다.”
그 말에 부교관들이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정말 그런 건 아니겠지.
“이백 생도, 설마 그럴 리가 있겠는가. 다만, 본디 천재들 중엔 괴짜가 많다고들 하지. 범재들이 감히 상상하지 못할 영역에 닿아 있다고 생각하게나.”
이백은 그 이야길 듣고선 천천히 천무린에게 고갤 돌려 그를 응시했다.
그런 천무린이 같은 기수인 8기 후보생들과 산동무관의 7기수인 탁궁을 못살게 구는 것을 보면서 정말 다행이라고 여기는 그였다.
“……정말 다행이다. 부모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려야겠다.”
1년 일찍 태어나 하루라도 빨리 들어오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부지, 어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