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화
제104화
후비적후비적.
“뭐야. 왜 이렇게 내 귀가 간지럽지?”
귀를 파는 태강을 바라보는 송무가 고개를 갸웃하며 해맑게 웃었다.
“누가 너 욕하나 보다!”
“해맑게 웃으면서 그런 말 하지 마!”
“헤헤.”
순박한 웃음에 태강은 한차례 혀를 차고는, 고갤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이제 우리도 내일이면 진짜 생도가 되는 건가.”
생도.
비로소 무림학관의 일원으로 자격을 얻는 이들에게 붙여지는 칭호이자 또 다른 책임감이 생기는 자리.
생도가 되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긴 시간을 달려왔던가.
무려 5년이었다. 무림대회와 각종 평가 등을 거쳐 온 태강은 그동안 그걸 어떻게 견뎌 냈는지 스스로가 대견할 지경이었다.
“……아버지가 많이 좋아해 주시겠는데.”
“응? 아버지?”
“무인은 무슨 무인이냐고 그냥 상인이라 하라는 아버지와 한바탕하고 학관에 들어온 거였거든. 5년 동안 한 번도 뵌 적이 없네. 생각해 보니.”
늘 밝고 유쾌하기만 하던 태강의 얼굴에 잠깐 그늘이 드리워지자 이를 위로하려는 송무에게.
“감상에 빠져 가지고는. 기껏 조교라고 키운 새끼들이! 진짜로 뒈지려고!”
와장창.
태강이 보인 그늘과 이를 위로하려던 송무의 감상을 모조리 박살 내는 고함 소리.
“으아아악! 황태 살려!”
“도망가! 야차 새끼 쫓아온다!”
“우리도 이제 생도라고! 좀 냅두면 어디가 덧나냐!”
황태, 명진, 신혁건이 도망간다. 부리나케 다리를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은 흡사 대호(大虎)에게 쫓기는 모양새였다.
“으응?”
송무의 눈이 가늘어졌다가 도망치는 세 사람의 뒤를 쫓고 있는 한 인영에 시선이 꽂혔다.
퍼엉!
쏜살같이 쏘아지는 인영의 신속한 움직임은 세 사람과 금방 가까워졌다.
“……잡히면 천근추 한 시진씩 견디기다. 내 전용 의자가 있으면 편하더라고! 낄낄낄낄.”
그 모습을 바라보며 송무와 태강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폭동 아니 폭군이나 다를 바 없는 그의 행동에 왠지 두 사람의 발걸음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 도망가든가 같이 돕든가. 어떻게 하지?”
덜덜 떨리는 턱으로 말하는 송무의 목소리에 태강이 단호하게 눈을 부라렸다.
“선택지가 두 가지나 있다는 게 말이 돼? 당연히 하나지!”
“어?”
스르릉!
후다다다닥!
번쩍이는 검을 빼 들고 황태와 명진, 신혁건이 보이는 곳으로 달려가는 태강이었다.
“당연히 저놈들을 잡아서 광명 찾아야지! 병X아! 따라와.”
하하.
그렇구나. 선택지는 단 하나였어.
그렇게 송무 역시 태강을 따라 검을 뽑았다.
한데 어우러지는 단합(?)된 모습을 보고 흐뭇하게 웃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러니까 저게 사천무관을 우승으로 이끈 녀석들의 모습이라는 겐가.”
“……면목 없습니다.”
사천무관을 이끄는 당백진과, 삼대 무관 비무대회를 우승으로 이끈 악교운이었다.
“어째 무관이 점점 더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으이.”
“……면목 없습니다.”
같은 말만 반복하는 악교운은 차마 고갤 들 수가 없었다. 저런 교육 방식을 허가해 준 것이 악교운 본인이었기에 입이 있어도 무슨 할 말이 있으랴.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어찌 보면 무책임할 수도 있는 광경이니까 악교운으로서는 그저 고갤 숙일 뿐이었다.
“후후, 괜찮네. 어찌 보면 우리가 너무 고리타분하게 살았는지도 모를 일이지.”
그 말에 고갤 들며 뭔가 잘못 들었다는 듯,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반문을 하는 악교운이었다.
“……예?”
“고지식했던 게지. 냅두면 저리 알아서 잘할 수 있는 것을.”
어……. 관주님. 지금 8기수만 생각하는 거 같은데, 8기수에는 저 괴물이 있어서 그런 거고요. 여태 7기수까지 어떻게 교육했는지 까먹으신 건가.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허허 웃는 당백진의 눈에 천무린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비무대회의 우승, 나아가 녀석이 제안한 귀구의 알을 통한 영단과 내단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연구는 현재 막바지에 다다랐고, 몇 번이나 실험한 끝에 긍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허허허.”
“엎어져! 이 새끼들아!”
“그렇지! 저렇게 박력이 넘쳐야지! 단호한 지도력이 필요하지! 암!”
“아니, 어떻게 된 새끼들이 팔다리에 그렇게 힘이 없어! 내 몸무게 하나 못 버틴다는 게 말이 돼? 오늘부터 근력 훈련 특훈이다!”
“옳지! 근력은 모든 운동의 기본기지!”
다른 8기 후보생들을 가둬 놓고 패는 천무린의 모습에도 박수까지 치며 껄껄대는 당백진이었다. 이 정도라면 천무린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곧이들을 지경이 아닌가.
“아아, 어쩌다가…….”
대체 어쩌다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건지.
사천무관은 망했다. 망했다고!
하나같이 제정신인 자가 없었다. 이제는.
그런 와중에.
“……식사하십시오!”
뚝.
또랑또랑하면서도 맑은 목소리가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내공 한 점 담기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거짓말처럼 모든 이들의 움직임이 뚝 하고 멈췄다.
“차린 건 없지만, 나름 어깨너머로 배운 요리들을 만들어 봤습니다. 특식입니다!”
낙양의 대표적인 객점인 지화루에서 몇 년간 점소이로 일했던 소강이었다. 그는 비무대회가 끝나자마자 사천무관의 보호를 받으며 무사히 이곳까지 올 수 있었고, 수습 숙수가 되어 사천무관의 식당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와, 소강이 만든 음식이야?”
“소강이다! 소강이 만들어 낸 어향육사의 향이 벌써 여기까지 퍼지는구나.”
“크으!”
감탄하는 8기수 후보생들 사이에 유려하게 신법을 펼쳐 가며 소강의 앞에 나타난 천무린은 고인 침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바, 밥.”
유일하게 천무린을 제어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하하, 천 소협님. 아니, 천 후보생님. 얼른 오세요. 차려 놨으니까요.”
그렇게 후보생으로서의 평화로운 마지막 하루를 보내는 8기수였다.
아니, 분명 그러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즐거운 하루를 보냈으나,
「 ……제갈세가에 대한 정보를 갖고 왔습니다. 」
때 아닌 전음, 그것은 오직 천무린에게만 전달되는 전음이었다.
씨익. 미소를 머금은 천무린이 드리운 그림자에게로 고갤 돌려 미미하게 끄덕였다. 일면식도 없는 녀석이었지만, 어디서 보낸 것인지는 뻔히 알 수 있었다.
「 쓸 만한 정보로 추려 왔겠지? 」
「 일급 정보원들이 선별하여 정보를 추려 왔습니다. 두 굴주님께서도 최종 검토하신 후 전달 드리는 것이오니, 믿으실 만하리라고 판단됩니다. 」
두 굴주. 쥐소굴 두 명의 주인을 가리키는 것인가.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이지만, 낙양의 암흑가를 통일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이들의 역량은 안 봐도 뛰어날 것이 틀림없었다. 어지간한 정보를 다루는 문파들보다도 훨씬 나은 성과를 만들어 왔으니 믿을 만하리라.
「 두 놈에게 때가 되었다고 전하라. 그렇게만 전하면 알아들을 것이다. 」
「 ……알겠습니다. 따로 더 필요한 것은 없으십니까? 」
「 정파 무림뿐 아니라 전 무림의 엉덩이가 들썩일 거다. 」
천마신교라는 존재는 중원 무림에서도 가장 신경을 곤두세워야 할 적들 중 우선순위에 들어가 있었다. 그것도 최우선 순위. 그만큼 파급력이 강하고, 가진 무력이 최강으로 손꼽는 이들이 많았다.
「 모든 자금을 풀어서 정보를 긁어모아라. 촉각을 세워서 천마신교와 사파의 움직임을 읽어 와라. 그리고 그들과 접촉하는 정파 무림인들에 대해서도 하나도 놓치지 말고 동선을 파악하라고 전하도록. 」
평화로운 일상을 다시금 긴박감이 넘치는 순간으로 바꾸는 말이었다. 그것은 희망에 부푼 후보생들의 평화로운 일상을 일순 날려 보내는 이야기가 될 터였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쥐새끼가 있다는 것을 안 이상, 움직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확신까지.
사천무관에 숨어 있는 쥐새끼 한두 놈 잡으려고 용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섬서무관의 총교관이었던 제갈벽이 혈마공을 익혔단 사실을 안 순간, 천무린은 굳게 다짐했다.
일망타진(一網打盡). 모조리 때려잡는다.
모든 쥐새끼들을 한데 끌어모아 박살 내는 것. 그것이 천무린의 방식이었다.
「 예, 알겠습니다. 두 굴주에게 말씀하신 바를 전하겠습니다. 」
대답을 한 그림자의 인기척이 홀연히 사라졌다. 흡사 살수의 그것처럼.
사라진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천무린의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오, 제법인걸. 꽤나 실력 있는 놈들을 키우고 있었던 모양이네.”
연기처럼 사라지는 인기척과 소리 없는 움직임으로 보아 단순한 정보원의 역할은 아닐 것이다.
거기다.
“이런 놈들을 고작 한두 놈 키웠으려고. 제법 돈이 들긴 할지라도 키워 두면 그 몇 배로 이득을 볼 수 있을 테니 키워 놨을 게지.”
절대 한 놈만 키우진 않았을 터.
“하기야 강호 무림에서 무력 없이 정보 단체로 먹고사는 건 어불성설이지.”
괜히 하오문과 같은 정보 문파가 그 많은 정보를 다루면서도 밑바닥을 전전할까 싶지만, 적절한 무력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그나저나.
“허허, 여전히 내게 숨기는 게 있었단 말이지.”
쥐소굴 새끼들, 아주 제법이네.
「 항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삼 푼을 숨겨라! 」
강호 무림의 유명한 격언이다.
삼 푼이란 구명절초를 뜻한다. 최후의 순간에 자신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 마지막 한 수를 뜻하는 구명절초는 제아무리 믿을 수 있는 이가 옆에 있다고 한들 끝까지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것이 진정 자신의 구명줄이 되는 길이니까.
“근데, 이걸 어쩌나.”
천무린이 손바닥을 펴며 싱글벙글 웃었다.
“내 손바닥 안이다, 이놈들아! 내가 홀라당 다 먹어 주마!”
흐뭇한 미소를 지은 천무린은 공야찬과 조수강이 애써 키운 무력 집단을 날름 집어삼킬 생각에 들떠 있었다.
* * *
오소소.
등 뒤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한기에 한차례 부르르 떨던 공야찬이 창백한 안색을 비쳤다.
“왜, 왜 등 뒤가 서늘한지…….”
“자, 자네도?”
“몸이 많이 허약해진 것 같으이.”
“허약하다니. 그럴 리가 있겠는가. 우리가 이보다 어떻게 더 잘 챙겨 먹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등골이 오싹해지는 두 사람이었다.
“……설마, 천무린 그 괴물 새X가!”
“예끼! 말이 씨가 된다고 그랬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게 뭐가 있는가! 벼룩의 간을 빼 먹으라고 그러게!”
“그, 그렇겠지?”
사람의 감이라는 것이 참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