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화
제102화
비무대회가 끝난 직후, 낙양에서의 시간을 마무리 짓고 정리할 시간이 무려 칠 주야나 주어졌다.
그 시간 동안, 천무린은 단 하나 작업에 매몰되어 있었다.
제갈벽이 두고 간 혈마공의 흔적.
그저 물 흘러가듯 두고 볼 수 없는 악의 고리였다. 천무린의 입장에서는 마공을 다시 볼 수 있어 반갑기도 했지만, 그런 한편으로 절로 사명감이 생기는 문제였다.
당백진과 악교운이 언급했던 것과 같이 분명한 사실은 후보생이라고 천마신교와 관련이 없지는 않다는 것.
“도로아미타불. 아무리 염불을 외워도 혈마공 따위를 익히고 있다면 모를 만도 하군.”
종종 마교의 간자로 보이는 이들이 염불을 줄줄 외워 댔건만, 효력이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천마신교의 무공이긴 하나 굳이 마기를 쌓지 않아도 시현이 가능한 것이 바로 혈마공이다.
그런 마공이 어디 한두 가지일까. 파마의 기운이 담겼다고 한들,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면 쉬이 알 수 없는 마공은 무궁무진하게 많았다.
마공이되, 마공의 흔적을 시현하는 이의 뜻대로 갈무리할 수 있다는 것. 고로 일일이 증거를 찾아내 잡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이로써 명확해졌다.
“제법 귀찮아졌네.”
혀를 차는 천무린의 눈빛이 침잠하듯 가라앉았다. 본인이 뿌린 씨앗이다. 10여 년 전에 농담 삼아 저지른 비행이 커다란 파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결자해지(結者解之). 곧 천무린의 몫이란 소리였다. 더군다나 이미 정파 무림의 일원으로서 당당히 살아가기로 한 이상, 이는 당연한 일이 아닌가.
“꼭꼭 숨어 있으려 해도 안 나오곤 못 배기게 만들어 주지.”
후보생들이 봤다면 모골이 송연해질 미소를 아무렇지 않게 지은 천무린은 숙소 중에서 마땅한 장소를 물색했다.
“여기가 좋겠는데.”
사천무관이 자리 잡은 숙소 중에서 가장 인적이 드물면서 굳이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곳 중 하나랄까. 사천으로의 복귀까지 칠 주야나 남았고, 남은 이들에게 당분간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휴, 휴식! 드디어!”
“……허허, 송무야.”
“응?”
“휴식? 그리 달달한 것이 우리 무관에 아직 남아 있었던가. 허허허허.”
걸쭉한 목소리를 뽐내는 태강이 어림도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나 다를까.
“알아서 훈련 잘하고 있어라. 괜히 헛짓거리 하다가 내 눈에 띄면 다 죽는 거야.”
누구나 휴식 시간이라고 하면 달콤하고 느긋한 시간을 떠올리겠지만, 8기수 후보생들에겐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엄포를 늘어놓은 천무린은 인적이 드문 숙소에 틀어박혀 지필묵을 들고서 하품을 했다.
하아암-!
“정말 필기시험도 거지발싸개 같았는데, 결국 내가 지필묵을 또 드네. 열 받게. 누군지 걸리기만 해 봐라.”
필기라면 치를 떠는 천무린인데, 그가 자진해서 지필묵을 든 이유.
뻔했다.
“일명 낚시 신공!”
역혈마공이건 혈마공이건 사장된 마공들 전반이 모두 머릿속에 들어 있는 천무린이 아니던가. 이미 한 번 해 본 전략을 두 번 못 하랴.
“……뿌려 놓은 마공들이 워낙 많아서 어디에 걸려들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안 걸리고 배기겠냐.”
스슥- 슥.
중얼거리며 머릿속에 있는 마공들을 모조리 필사본으로 만들었다. 수백, 수천이 넘는 무공이 머릿속에 들어 있는 천무린에게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특히 마공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일가견이 있는 이가 천무린이었으니까.
다만.
“아오, 귀찮아.”
천무린의 인내심은 그리 길지 못했다. 휘갈겨 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쓰다가 쓰다가 종래엔.
“에라이, 대애충 낚시용으로 만드는 건데 앞에 좀 그럴듯하게 쓰다가 말지, 뭐.”
마공서를 대충 날림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애초에 마인들은 실전적으로 몸을 움직이면서 무공을 익히는 족속들이다. 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공자 왈, 맹자 왈 하며 떠드는 이들이 아니란 소리다.
정말 마공서처럼 써 놔야 그럴듯하게 믿겠지.
그렇게 며칠 동안 밤을 새워 마공서를 끄적거리던 천무린은 수십 권이 쌓인 걸 보고서 씨익 웃었다.
“끝났군. 이제 본격적으로 낚시 신공을 시작해 보실까.”
근질근질할 거다, 아마.
낄낄.
* * *
삼대 무관 비무대회가 끝난 직후.
대다수가 비무대회가 끝난 것을 아쉬워하며 그 기간을 한껏 즐겼지만, 모두가 다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아닌 이들도 있었으니…….
“……얼마라고? 삥땅 친 거 없지?”
껌 좀 씹은 것 같은 표정으로 껄렁대며 협박하는 어린 청년에게 자신의 몸을 가누기도 힘을 정도로 육중한 몸뚱어리와, 그와 대비될 만큼 작달막한 몸으로 쩔쩔매는 두 사람.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삥땅이라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낙양의 암흑가를 주름잡는 쥐소굴의 주인인 공야찬과 조수강이었다.
잊지 않고 찾아온 이 인간에게 절로 이가 바득바득 갈리는 두 사람이었다.
‘어떻게 된 인간이 비무대회 끝나고 바로 찾아올 수가 있냐고!’
‘돈독이 올라도 이렇게 오를 수가 있느냐고, 씨앙!’
찡그린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사람의 반응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청년.
“후후후후, 그렇지. 그렇지.”
천무린은 군침을 줄줄 흘리며 금전에 그만 눈이 돌아 버렸다.
번쩍, 번쩍.
쌓여 있던 금전들이 발하는 빛은 어두운 공간을 환히 밝힐 정도였고, 그 액수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제아무리 재물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절로 고갤 돌리게 만들 정도의 위력을 가진 금전들의 향연이었다.
“아주 좋아. 그래서 원금은 얼마였지?”
“워, 원금 말입니까?”
“응. 원금.”
갑자기 원금은 왜 묻는단 말인가.
“에이, 왜 그래? 나도 상도덕이라는 게 있는 사람이야. 설마 여기 거덜 내려고 투자한 원금까지 빼먹을까 봐?”
그러면서 마치 선심 쓴다는 듯 금전이 가득한 보따리를 공야찬에게 던졌다.
투욱, 하고 묵직하게 잡히는 돈 보따리.
공야찬과 조수강의 두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큰 액수였다. 그 액수는 자신들이 투자한 원금을 상회하는 금액이었으니.
“이, 이거 진짜 주시는 겁니까?”
“그럼, 줘야지. 나도 상도덕이 있다고 방금 말했잖아.”
그 말에 두 사람의 목울대가 꿀꺽 넘어갔다. 야차로만 보였던 그의 등 뒤로 하얀 날개가 어렴풋이 보이는 듯했다.
“아아, 내가 그동안 사람을 잘못 봤구나.”
“크흑흑, 고생한 보람이 있었어.”
물론 피 같은 원금의 주인은 본인들이며 투기판에서 사천무관에 모두 투자하라는 천무린의 말에 울며 겨자 먹기로 투기했던 그들이었지만.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상관이겠는가.
일단은 고생했고, 그 고생한 값을 돌려받았다는 게 중요한 거지.
“뭘 어떻게 봤길래?”
“어떻게 보긴요! 당연히 개새……!”
“개새?”
개새? 개새 뭐.
“아, 아니…….”
조수강이 헙 하고 입을 닫자마자 공야찬이 진땀을 줄줄 흘리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개천에서 세상을 바꿀 끼 있는 사람이라고 봤습니다.”
“……뭔가 이상한데. 하지만 나쁘지 않은 뜻이로군.”
어깨를 으쓱이는 천무린의 모습에 두 사람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그러나.
“근데 고마워할 필요 없어. 너희들 밥값 미리 지불하는 거니까.”
응? 밥값이라고?
“예?”
“귓구멍에 돌멩이가 박혔나. 아까부터 뭘 자꾸 되물어?”
아니! 이 인간아! 당연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니까 그렇지!
뻐끔거리는 입 모양으로 반항을 하려던 공야찬은 천무린의 서슬 퍼런 눈빛을 보고 고양이 앞의 쥐처럼 몸을 사렸다.
“……그, 그러니까 밥값이라는 정확한 뜻이…….”
“뭐긴 뭐겠어. 너희가 밥값답게 할 수 있는 일이. 앞으로 칠 주야마다 사천무관으로 사람을 보내. 낙양을 비롯한 전 무림의 정보를 모두 긁어모아서 가공해. 그 가공한 정보를 갖고 오는 거야. 어때, 쉽지?”
……퍽이나!
이런 씨앙.
‘겨우 벗어나나 했는데, 이 악마 새끼. 크흑흑.’
‘대체 전생에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어무이! 커흐흑.’
“어때, 좋지?”
좋긴 개뿔. 개같이 일해서 얻은 정보는 말 그대로 금값인데, 이런 코 묻은 돈 정도로 금싸라기 같은 정보를 칠 주야마다 내놓으라고?
붉으락푸르락해지는 두 사람의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무린이 씨익 웃었다.
“근데 또 내년에도 비무대회가 열릴 거고. 그 비무대회에는 내가 참가할 거고. 그때도 투기장 판은 지속될 거고. 그렇지?”
그 말에 두 사람의 표정이 환해졌다.
“뭐, 이미 알려진 마당에 내 배당금은 꽤 많이 올라가겠지만 그게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잖아? 우리가 쿵짝이 잘 맞으면 말이야.”
그의 말대로 정파 무림, 그것도 17세라는 나이에 천하제일의 후기지수로 인정받는 천무린이다. 하다못해 8기는 평정했다시피 했고, 7기까지도 넘볼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다.
아니, 얻은 정보에 따르면 섬서무관의 7기수 수십 명을 맨손으로 두들겨 팬 흑의인이 바로 천무린이라는 정보까지 있는 마당에 무엇을 더 의심하랴.
‘그래, 1년. 딱 1년만 더 고생하자.’
‘에이 X! 내가 40년을 살아왔는데, 그깟 1년을 못 버티려고!’
공야찬과 조수강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이 섰다.
붉으락푸르락해진 표정이 곧바로 온화하게 바뀐 것은 물론이거니와 목표가 생긴 마당에 간이고 쓸개고 못 빼 줄 게 뭐가 있으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쇼!”
“그래서 말인데.”
천무린은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갈벽에 대한 정보, 그걸 알아봐.”
구린내가 진동하는 제갈벽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비록 미완성의 무공이었지만, 혈마공을 익힌 녀석이 제갈벽 혼자가 아닐 수도 있었다.
그리고 잘나가는 정파 세력의 인간들이 굳이 마공을 익힌다?
뭔가 꿍꿍이가 없고서야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이겠는가.
“제갈벽 말씀이십니까? 소문으로는 제갈벽이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갑작스레 종적을 감췄다고 들었습니다만.”
“정확히는 사천무관과 섬서무관의 충돌 이후에 회의 결과에 대한 불만으로 낙양 바닥을 일찍이 뜬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지금 제갈벽의 행적은 그리 중요치 않아.”
제갈벽이 그간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중요하지.
“정마대전에서부터 여태껏 제갈벽과 어울렸던 인간들, 그리고 제갈세가에 대해서 샅샅이 조사해 와. 조금이라도 수상하다 싶은 흔적이라면 쓸데없는 것이라도 모조리.”
“옙!”
“알겠습니다!”
태도부터 달라진 두 사람의 충성심은 최고치에 달했다.
그렇게 정파 무림 제일의 후기지수는 원하는 것을 얻고, 암흑가의 수장 격인 쥐소굴을 자기 밑으로 복속시켰다.
“옳지! 쿠헬헬헬. 내가 사람들 하나는 기똥차게 잘 통솔한다니까.”
자신만의 당근과 채찍으로.
“아 참, 그래서 말인데. 더 해 줘야 할 일이 남았어.”
혼자 낄낄거리며 웃던 천무린이 포대 자루에 가득 들어 있던 서책들을 우르르 쏟아 냈다.
“이, 이게 다 뭐…….”
“뭐긴 뭐야. 폭탄이지.”
그것이 범상치 않음을 대번에 알아본 공야찬과 조수강은,
‘……씨X, 이번엔 또 뭐람.’
‘조진 거 같은데.’
괜스레 겁이 나는 두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