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화
제98화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던 독고황이 하후성에게 시선을 옮겼다.
“끝인가?”
“……아닙니다. 맹주님. 아직 세 사람이 더 필요합니다.”
“세 사람?”
“먼저 사천무관의 악교운 총교관, 지화루의 점소이 소강입니다.”
청명하게 빛나는 하후성의 눈빛을 바라보던 독고황이 고개를 슬며시 끄덕였다.
“두 사람밖에 호명하지 않았군.”
“이와 같은 중대한 자리에 감히 후보생을 불러도 될지 맹주님의 고견을 듣고자 하였습니다.”
“후보생이라. 고견이라 표현함은 섬서의 저 아해와 낙양의 점소이랑은 다른 이유 때문이라는 거겠군.”
나직한 말에 울림이 담겼고, 하후성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눈에 하후성의 뜻을 알아차린 독고황이었다.
“…….”
“편한 대로 하라.”
미세한 고개의 끄덕임이었지만, 오랜 기간 독고황을 모셔 온 하후성은 이내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
“천성검대는 세 사람을 데리고 오도록.”
짧은 명에 회의실에 대기하고 있던 천성검대 대원들이 포권을 취하며 짧고 굵게 외쳤다.
“충!”
사라진 천성검대 대원들을 바라본 하후성은 별안간 시선을 제갈벽과 공선에게 주었다.
“제갈 교관과 공선 생도는 여기에 불려온 연유를 알고 있습니까?”
짧은 물음에 제갈벽은 당최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알 도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몇 시진 전에 있었던 불의의 사태와 연관된 일이라고만 추측하고 있습니다.”
“호오, 그렇습니까. 섬서무관의 생도와 후보생들이 단체로 습격을 받았는데 그저 알 도리가 없다?”
눈매가 좁혀지는 하후성의 기세는 회의실 내부를 짓누르고도 남았다. 일신의 무력으로 정마대전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친 십인(十人) 중 한 명으로, 무림맹주인 독고황과 각 무관의 관주들을 제외하고 그 강대한 기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제갈벽 역시 괜히 총교관의 자리에 올라선 것이 아니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덤덤히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공선 생도, 자네가 말해 보게. 무슨 일을 겪었는지.”
무거운 중압감은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는 공선에게로 이어졌다. 평생 눈앞에서 마주할 수 있을까 말까 한 정파 무림의 최고 권위자들이 주는 위압감과 더불어 하후성이라는 위인마저 자신에게 압박을 가하니 공선의 숨은 턱턱 막혀 왔다.
“……그, 그것이.”
“우리 섬서의 생도를 이리 일방적으로 몰아붙여도 되는 것입니까. 섬서의 일은 섬서에서 먼저 취조를 하고 그 결과를 명명백백하게 밝히도록 하면 되지 않습니까.”
공선에게 쏘아지는 기운을 제갈벽이 한 걸음 나서서 가리는 것으로 그 기운을 차단해 버렸다.
“나는 정당히 취조를 하고 있는 것이오. 명명백백해야 할 일을 짚고 넘어가는 것일 뿐. 제갈 교관께서는 어서 물러나시오.”
“…….”
제갈벽 역시 그 사실을 안다. 더불어 독고황이 하후성을 지지하니 어쩔 수 없었다. 제갈벽이 그제야 할 수 없다는 듯 물러났다.
그러면서 공선에게 시선을 주는 제갈벽이었다.
‘……꿀꺽.’
제갈벽의 더없이 차가운 시선이 공선을 스치고 지나갔다.
섬서무관에서의 자애롭던 제갈벽의 시선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지금 공선에게 닿는 시선은 그저 싸늘할 뿐이었다.
「 알아서 잘 처신하라. 칠 주야 후에 제갈세가로 방문하기로 한 공씨세가의 가주께서 막내딸을 데리고 온다지. 」
부들부들.
심하게 흔들리는 눈빛으로 제갈벽을 바라보던 공선은,
“공선 생도.”
자신을 부르는 중후한 하후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려야 했다.
“겪은 대로 소상히 말하라.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예.”
하후성에게는 이미 지화루에서 다 털어놓았으나 그때와 사정이 달라졌다. 자신의 죄를 제 입으로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공선은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것도 정파 무림의 최고위급 인사들 앞에서, 그리고 섬서무관주인 혜공과 청강이 보는 앞에서 말이다.
“……저, 저희 7기 생도와 8기 후보생들은 검진 시합이 끝난 이후 사천무관 8기 후보생들과 시비가 붙어 잠시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시비?”
“예, 시비입니다. 지화루에서 부딪힌 사천무관의 후보생과 말다툼이 벌어졌고, 그로 인해 주먹다짐이 이어졌습니다.”
그 말에 회의실 내에 있는 이들의 시선이 시시각각 변했다.
“그것이 전부인가?”
“……예. 단지 그뿐입니다.”
공선은 결정을 내렸다. 지화루에서 만난 흑의인으로부터 느낀 위협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는 겨우 한 명이었고, 공씨세가가 그 한 명에게 흔들릴 정도로 나약할 리 없었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는 그 흑의인의 위협 따위는 깨끗이 잊을 정도로 강렬한 존재가 서 있었다. 바로 제갈벽이라는 거대한 산 말이다.
하후성은 공선이 보이는 뻔뻔한 태도에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고.
때마침.
“……대주님, 모셔 왔습니다.”
천성검대원의 음성이 하후성의 귀에 들렸고, 하후성은 들여보내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등장한 세 사람.
그 세 사람은 다름 아닌 악교운과 천무린, 그리고 지화루의 점소이 소강이었다.
악교운은 들어서자마자 침울하다 못해 무거운 회의실 분위기를 느꼈다. 범접할 수 없는 기운들이 한데 뭉쳐 만들어 낸 중압감이었다.
그러나.
“아이고, 대장들은 다 모였네요? 나 참, 이게 다 무슨 난리람.”
천연덕스럽게 말을 내뱉으며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는 한 인영에 회의실의 공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최고위급 인사들의 앞에서도 전혀 굴하지 않고 혀를 차는 모습은 누가 봐도 후보생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저기요. 그렇게들 기세를 떨치고 있으면 저 녀석이 이 안으로 발이나 제대로 디딜 수 있을까요. 표정들 좀 풀어요. 하여간 말만 정파지 인상들은 죄다 드러워 가지고!”
되레 막말을 쏟아 내는 천무린이었지만, 문 앞에서 감히 들어오지 못하고 다리를 후들후들 떨고 있는 소강의 모습에 기운을 거둬들이는 사람들이었다.
“커흐흠.”
“큼. 큼.”
“자, 자, 그래서 우릴 부른 이유가 뭐라고요?”
말 몇 마디에 분위기를 휘어잡은 천무린을 멍하니 바라보던 하후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을 했다.
“두 사람은 차후에, 먼저 점소이로부터 이야길 들을까 한다. 지화루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는지 전부.”
그 말에 천성검대 대원들은 지화루의 점소이 소강 옆에 서서 그가 편히 말할 수 있도록 자릴 지켰다.
“소강이라 하였는가?”
“예? 예!”
“방금 말한 것처럼 무엇을 듣고, 무엇을 보았는지 소상히 말해 보도록.”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던 소강은 불안한 눈빛으로 다른 이들을 훑어보다 말고 공선과 눈이 마주쳤다.
공선이 위협적인 눈빛으로 소강을 쏘아보자 더욱더 입을 굳게 다무는 소강이었다.
“어서 말해 보래도.”
다그치는 하후성의 음성에,
“에이, 순서는 그게 아니죠.”
천무린이 어깨를 으쓱이며 한 걸음 나섰다.
“순서?”
“생각해 보세요. 줄줄이 말했다가 이 상황이 끝나고 나면 저런 새끼들이 원한을 품고 돌아가서 칼이라도 찌르면 어떻게 해요? 강호가 얼마나 비정한데.”
공선을 가리키는 천무린이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 안 되긴. 시비 좀 붙었다고 일대다로 다구리나 놓는 그런 놈들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얼토당토않다며 대꾸하는 공선에게 몸을 돌려 바라보는 천무린이었다. 서늘한 그의 눈빛을 마주한 공선은 일순간 얼어붙었다.
‘마, 마치 어디선가 본 듯한 눈빛……!’
얼어붙은 공선을 뒤로하고 다가온 천무린이 악교운을 바라봤다.
“그렇지 않나요?”
“일리가 없진 않구나.”
“그래서 말인데, 소강이 쟤, 우리가 데려가면 어때요?”
당백진을 바라보는 천무린이었다. 당혹스러운 말을 꺼내는 천무린의 모습에 당백진의 미간이 좁혀졌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냐. 점소이를 받자고?”
“아니죠. 그게 아니죠. 저기 저 비열한 섬서무관 놈들로부터 보호해 주는 동시에! 똘똘한 녀석을 우리가 데려가자는 거죠.”
청산유수(靑山流水)와도 같은 말에 당백진과 악교운은 순간 벙찐 표정을 지었고, 일순간 모욕을 당한 섬서무관의 두 관주와 제갈벽의 시선은 싸늘해졌다.
제아무리 천무린이 뛰어난 후기지수로 인정받는 자라고 해도 이와 같은 발언은 도를 넘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후후……! 당돌하구나.”
독고황은 섬서무관의 혜공과 청강, 제갈벽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당 관주! 이 회의가 끝나는 순간, 소강이라는 이를 데려가서 비무대회가 끝날 때까지 지켜 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천으로 복귀할 때 함께하도록 하라.”
“예! 알겠습니다.”
혜공과 청강의 눈빛이 절로 사나워졌다가 이제는 독고황을 원망의 눈빛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나무아미타불.”
“허허허. 무량수불.”
그러면서도 애꿎은 당백진에게 이를 갈아붙이는 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한때는 천마를 상대로 함께 싸웠던 전우였지만, 지금 이 순간 세 사람의 사이가 크게 틀어지는 순간이었다.
당백진 역시 이 두 사람의 기운을 온전히 받고 코웃음을 쳤으며 당장이라도 사생결단을 낼 듯한 기세를 뿜었다.
“아이고, 이러다가 사람들 다 말라죽겄네! 저, 저, 저! 다 큰 양반들이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걸 꼭 여기서 보여 줘야겠어요!”
짝! 짝! 짝!
점차 사나워져 가는 관주들의 기세에 천무린이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양반들이 허구한 날 싸우려고 아주 발버둥을 치네! 아주!”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된 건데!
그 상황을 쭉 지켜보던 악교운은 정말 대단하다는 눈빛으로 천무린을 바라봤다.
어떻게 된 녀석이 긴장감 따윈 하나도 느끼지 않는지. 간이 크다 해야 할지, 정신줄을 놨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 악교운이었다.
그런 와중에 하후성은 다시금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이어 갔다.
어째 저 어린 후보생에게 자신마저 휘말리는 느낌이라 황급히 정신을 차리는 하후성이었다.
“소강이라 했는가? 혹여 걱정은 말게. 아무 일도 없을 터이니.”
그 말에 소강은 침착해진 눈빛과 심호흡으로 자신을 진정시켰다.
“……예. 그러면 불과 몇 시진 전에 있었던 일을 말해 드리겠습니다.”
사천무관 후보생인 송무와 태강, 그리고 두 사람과 시비를 붙은 하건욱과 공선 등의 무리가 태강을 일방적인 구타를 한 것과 그것이 곧 의도된 계략이었다는 것. 마지막으로 흑의인의 습격으로 인해 섬서무관의 생도들이 개박살이 난 것까지.
짧고 명료하게 이야길 했으나 핵심은 빠지지 않았다.
“거짓이 단 하나라도 있으면 안 되는 것은 알고 있는가.”
“제가 어디라고 감히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소강도 눈이 있고 귀가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은 이들밖에 없다는 것쯤은 대번에 알았다.
소강의 이야길 쭉 듣고 있던 공선은 눈을 질끈 감고야 말았다. 설마설마했는데, 점소이까지 데려올 줄이야.
섬서무관의 치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탄식이 이어지는 순간에도 하후성은 침착했다.
“이유는?”
질문의 상대가 소강에서 공선으로 넘어갔다. 이제는 더 이상 거짓을 고했다간 일만 커질 뿐이었다.
그래서.
“……너, 너무.”
“너무?”
“괘씸해서였습니다.”
괘씸이라니,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이유였다.
모두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한숨을 내쉬고 있는 와중에 한 사람이 다가와서 공선의 어깨를 두드렸다.
“……에휴. 괜찮아, 괜찮아. 그럴 수 있어. 뭐 괘씸하다고 구타도 할 수 있고 단전도 부서질 수 있고 그런 거지. 안 그래?”
그 말에 공선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서, 설마? 어디선가 본 눈빛이라고 생각했는데……!
눈이 점점 커지는 공선을 바라보며 한쪽 눈을 찡긋거리는 천무린이었다.
데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