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제97화
“……이게 대체.”
한달음에 달려와 지화루의 내부를 확인하는 하후성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쑥대밭이 된 내부와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는 섬서무관의 생도와 후보생들은 그저 숨만 붙어 있을 뿐 살아도 산 사람의 상태가 아니었다.
그뿐 아니라, 섬서무관의 몇몇 생도들과 후보생들이 동일하게 습격을 당해 쓰러졌다는 보고가 들려왔다.
사천무관의 일로 골치가 아픈데, 불과 몇 시진 만에 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아무래도 이상했다.
지화루의 주변을 훑던 하후성의 시선이 어정쩡하게 서 있는 한 인물에게 가 닿았다.
“섬서무관 7기 생도, 공선이라 했는가?”
“허억, 허억. 예…….”
거친 숨을 몰아쉬던 공선은 애써 호흡을 고르며 하후성의 물음에 답했다. 그의 눈에는 과연 하후성이구나, 하는 시선이 담겼다. 비무대회를 주관하는 곳에서 지화루까지의 거리가 상당했으나 이곳까지 달려온 하후성의 호흡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허나, 그런 공선의 경의에 찬 눈빛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연유를 소상히 밝히거라.”
비무대회장 위에서 보여 주던 부드러우면서 강인한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딱딱하게 굳어 버린 표정과 매서운 눈길에 공선은 마른침을 삼켜야만 했다.
꿀꺽.
그리고.
“……실은.”
검진 시합에 출전하는 사천무관 후보생들을 노려 일부러 시비를 걸어 구타한 것, 용의주도하게 사람들의 시선을 피했으며 제각기 따로 다니는 때를 노려 습격한 것 등등 공선은 불과 몇 시진 전에 있었던 이야길 줄줄이 털어놓아야만 했다.
쓰러진 생도들과 후보생들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별수 있겠는가. 나라도 살아야지.
스윽.
공선의 시선이 쓰러진 생도들을 훑었지만, 더 이상 감정은 담겨 있지 않았다. 괜한 동정과 연민은 하지 않을 작정이다.
왜냐고. 강호는 원래 비정하니까.
하지만.
“자네의 말대로라면 지화루에 나타났다는 의문의 인물에게 모조리 습격을 당했고, 자넬 제외한 모두의 단전이 폐했다는 건데. 어째서 자네는 멀쩡한가. 무려 일곱 명이 이 자리에서 박살이 났는데 말이야.”
그 말에 공선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차분하게 호흡을 고르고 공선은 하후성의 옥죄어 오는 기운을 견디며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모두에게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정체불명의 그 인간을 잡으려면 저라도 그렇게 움직이는 것이 모두를 위한 일이라 판단했습니다.”
공선의 말에 하후성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렇다면 그 인물과는 전혀 부딪치지 않았단 건가, 자네는?”
“다행히 제가 뒤에 있었고, 그 인간의 신경이 분산된 순간에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 말하고도 뿌듯하다는 표정을 짓는 공선이었다. 슬며시 미소를 짓는 것까지.
“……자네.”
“예!”
“내가 우스운가?”
무시무시한 중압감이 공선을 찍어 눌렀다. 폐부 가득 채우는 끈적하고 무거운 기운이 그의 숨을 턱 막히게 했다.
“커, 컥컥!”
“날 눈앞에 두고 감히 거짓을 고하다니, 정말 대범한 녀석이군.”
굳어진 표정은 풀어질 줄 모르고 공선을 지그시 노려봤다.
“커, 커억……. 거짓이라니, 무슨 그런!”
“갈! 거짓이 아니라고.”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하후성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발끝에 닿았다.
“온갖 음식물과 술이 엎어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바짓가랑이에 실수한 것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거늘. 이렇듯 악취가 진동하는데! 그런데도 끝까지 거짓을 말하려 들어!”
……실수였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공선에게 하후성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네가 보고 들은 모든 것을 말하라. 하나도 빠짐없이. 소상히!”
* * *
“준비하십쇼.”
“준비?”
대뜸 준비하라는 천무린의 말에 무슨 뜻이냐는 눈빛을 보내는 악교운이었다.
“예.”
“……설마?”
“그 설마가 맞아요.”
“하아, 또 무슨 사고를 친 게냐?”
“사고라니요. 정당하게 돌려준 거죠.”
어깨를 으쓱하는 천무린에게 황당하다는 눈빛을 보인 악교운은 이내 물끄러미 천무린을 응시했다.
“왜요. 너무 잘생겼어요?”
뻔뻔하게 내뱉는 말에 악교운은 껄껄 웃어 젖혔다.
“하하하하! 하하핫!”
이 인간이 미쳤나. 갑자기 왜 파안대소를 해?
“왜 그래요? 드디어 미친 거예요?”
“그래, 이놈아! 미쳤다. 네놈 때문에.”
야차(夜叉)라고 불린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악교운이었다. 그런 그의 어깨에 짊어진 책임감과 부담감이 그의 행동에 제약을 걸었다.
보는 눈이 있기에 행동을 조심하게 되었고, 윗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자연히 마음대로 행동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도 바보가 아니다.
갑작스레 발생한 후보생들의 습격 사태는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속상했고, 화가 났다.
본래 같았으면 심증만으로 시원하게 상을 엎고 대놓고 욕을 퍼부으면 한바탕 난리를 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그가 함부로 행동했을 때의 여파가 상당할 것이므로.
“뭐 그리 또 길게 감상에 빠져 있어요.”
“……늙었나 보지.”
“쯧, 하여간. 허구한 날 책상에 앉아서 행정 업무만 처리하고 있으니 그렇게 되는 거 아니에요. 몸도 좀 쓰고! 어? 그래야지 말이야. 총교관이나 돼서 말이지.”
……허허, 이 새끼가.
“제갈벽이냐?”
“알고 있었어요?”
“내가 움직이면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될 수 있다. 그건 관주님도 곤란해지고 무관 전체가 곤란해지니까.”
“총교관도 참 피곤한 자리네요. 쯧.”
“나이가 들면 너도 책임감이란 걸 알게 되겠지.”
예? 책임감이요?
……그냥 강하면 장땡이던데요.
“납득하지 못하는 표정이군.”
“귀신이네요.”
정말 납득 못 했던 거냐. 후우.
악교운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천무린을 바라봤다.
“……아무튼 속 시원하게 패고 온 게냐.”
천무린이라면 손속이 좀 과했을 텐데.
“아유, 그럼요. 속 시원하게 패고 왔죠.”
홀가분해 보이는 표정에 악교운 또한 통쾌하다는 표정을 짓다 말고.
“단전까지 다 부숴 버렸어요. 헤헤.”
그만 놀라서 딱 얼어붙었다. 두 귀를 의심케 하는 내용이었는데, 뭐가 그리 쑥스러운지 헤헤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이는 천무린을 보고 뜨악한 표정을 짓는 악교운이었다.
……뭐, 뭘 부숴?
* * *
제갈벽은 섬서무관의 습격 사태에 대한 보고를 듣고 있었다.
턱을 괸 채 지필묵의 끝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자신의 심복을 바라보았다.
“뭐라 하였나?”
“……모두 당했습니다.”
“일시에 당했다라…….”
“영문을 알 수 없는 자에게 당했다고만……!”
“사천무관 놈들의 짓이려나?”
마치 남의 일인 양 말하는 제갈벽의 태도에 심복은 놀라 혀를 내둘렀다.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시지 않는 분이다. 언제든 버릴 요량으로 그들을 이용한 것이 맞았던가.’
“내 처사가 잔혹하다 느끼는 것이냐.”
“……예?”
“네 두 눈에 다 쓰여 있구나.”
“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한들 어쩌겠느냐. 쓸모없는 녀석들이 조금이라도 무관을 위해 도움을 주었다면 그걸로 된 게지.”
남들은 이성적이라거나 냉정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지만, 심복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성과 냉정 따위로 평가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냉혈(冷血)한이다.’
“혹 주군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습격을 당한 섬서무관의 다른 생도들과 후보생들이 주군을 거론할 수도 있는 부분이니 지금이라도 손을 써 놓으시는 게.”
“그럴 필요 없다. 그리고 녀석들은 그럴 깜냥도 되지 않을 거다.”
“예?”
“……아직도 배움이 많이 부족하구나.”
멍하니 있는 심복을 바라본 제갈벽은 혀를 차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섬서에서 입김만 불면 사라질 놈들이었다. 고작 군소방파의 나부랭이들의 자식들이 무관에 발을 들였다고는 하나, 그것만으로는 많이 부족하지. 만약 이번 일이 무리 없이 성공했다면 내가 더 높이 끌고 갔을 것이나 그런 역량조차 갖추지 못했구나.”
일순간 심복은 손끝에서부터 등줄기까지 소름이 쫙 돋았다.
‘그렇구나. 제갈세가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군소방파 출신의 후보생과 생도들을 차출하여 일을 진행시켰구나.’
혹여 일을 그르치더라도 감히 제갈벽의 이름을 언급할 수 없도록.
제갈벽의 이름을 언급한 순간, 후보생과 생도의 가문들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것이었다. 아니, 아주 서서히 무너뜨려 버릴 것이었다.
“……그래서 늘 말했잖느냐. 사람들은 제각기 쓸모를 타고나는 법이라고. 태어날 때부터 가진 자들의 세상이다. 제아무리 발악해 본들 무엇이 그리 달라질까. 잠깐이라도 쓰임을 얻어 꿈을 꾸게 해 주었으니 그것으로 족한 게지.”
제갈벽의 두 눈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응당 당연하다는 눈빛으로.
“혹여 심증을 부풀린다고 한들, 내게 할 수 있는 처사가 무엇인가. 고작 교관직을 내려놓으라는 것뿐일 테지. 더 올라갈 수 없음은 아쉬운 일이나 그것이 내 족쇄가 되진 않는다.”
타고난 재능, 탁월한 두뇌. 이 두 가지를 이용해 탁월한 성과와 실적을 냈던 제갈벽이다. 그런 그가 교관직을 내려놓는다고 한들 무엇이 아쉬울까.
“오히려 심증밖에 없는 나를 몰아낸 이들에게 손가락질을 하게 되겠지. 아니 그러한가.”
그 말에 심복은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끼면서도 그저 고갤 끄덕일 따름이었다. 어느 누가 저 제갈벽을 함부로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 * *
그날 밤.
하후성은 사태를 파악해 일사천리로 정리하더니 곧바로 회의를 열었다.
“늦은 밤, 무례를 무릅쓰고 회의를 열어 여러모로 송구스러우나 그만큼 촌각을 다투는 일임을 인지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검진 시합은 사흘 후였다. 비무대회라는 큰 행사는 현 정파 무림을 보여 주는 축소판. 그런데 여기서 사건 사고가 터지고 게다가 수습까지 늦어진다면 정파 무림의 명예는 땅에 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사태를 어서 바로잡고자 하후성은 적극적으로 움직였고, 그는 서론을 생략하고 이내 본론부터 이야길 꺼냈다.
“……혜공 관주님, 청강 관주님. 제갈벽 교관과 섬서무관 7기 공선 생도를 이 자리에 부를까 합니다.”
그 말에 혜공대사와 청강진인은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그늘이 진 표정을 지었다.
“나무아미타불. 혹 괜찮다면 하후 시주께 그들을 찾는 연유를 먼저 여쭈어도 되겠소?”
“무량수불, 섬서의 일은 우리가 먼저 알아야 되지 않겠소이까.”
본래 같으면 혜공의 말에 결코 거역하지 못할 하후성이었지만.
“두 관주는 시일이 급한 일이라는 말을 듣지 못한 겐가. 내가 직접 나선 일이네. 당장 두 사람을 불러 이 자리에 앉히도록 하라.”
독고황이 직접 나서서 입을 엶으로써 하후성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즉, 진행은 하후성이 하지만 그 뒤에는 무림맹주 독고황이 있음을 인지시키는, 간단하면서도 아주 확실한 말이었다.
결과적으로 다른 관주들 역시 함부로 나서지 못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회의실 안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끙.”
“크흠.”
혜공과 청강, 두 관주의 침음에 이어 정적이 흐르고 있는 와중에.
“……데려왔습니다.”
‘天星(천성)’이라는 표식을 한, 하후성이 이끄는 무림맹의 직속 무력 단체인 천성검대 대원들이 예를 취했다.
데려온 두 사람이 나란히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상반된 모습의 두 사람에게 그곳에 있는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바들바들 떨고 있는 공선과, 의연하게 서 있는 제갈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