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화
제95화
“어, 어. 어?”
소강은 검은 복면인이 등장한 것을 보고서는 한 걸음 물러나다가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저쪽에 볼일이 있다고 한다면! 다름이 아니라 할 말이……!”
“아아, 괜찮아. 괜찮아. 이름이 소강이라고?”
“예? 예.”
무심코 대답하다 말고 고개를 든 소강이었다.
언제 자신이 이름을 밝힌 적이 있었던가?
하지만 의구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불과 몇 시진 전에 여기서 불의의 사고가 있었다지, 아마?”
“……그것이.”
“괜찮아. 솔직하게 말해 봐. 그거 해결하려고 온 거니까.”
소강은 자신의 어깨에 올려진 손에서 왠지 모를 따뜻함을 느꼈다. 게다가 사람 좋은 웃음을 한 채 이야기를 꺼내는 미청년의 얼굴을 보니 뭐 별일이 있겠냐며 처음에 든 걱정을 그저 기우로 치부해 버렸다.
“다름이 아니라…… 불과 3시진 전에…… 사천무관 소속으로 보이는 두 명의 소협이 식사를 하고 있다가 저 일행과 다짜고짜 시비가 붙었습니다. 당연히 음식을 엎은 게 제 실수인 줄 알았으나 저들이 말하는 것으로 봐서는……. 사천무관의 그 소협께는 그저 죄송하다는 말밖에 하지 못해서 꼭 보상이라도 하옵고자…….”
더듬거리며 말을 시작한 그는 억울해하면서 또한 태강에 대한 사죄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됐어. 그 정도면.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예?”
“아, 참고로 그 녀석의 이름은 태강이라고 해. 나중에 사천에서 잘나가는 상단을 끌 녀석이니까 이름을 잘 기억해 두라고.”
태강, 태 소협이었구나.
태강의 의연했던 모습은 이곳 강호 무림에서도 보기 드물었던 만큼 소강의 뇌리에 강렬하게 각인될 정도였다.
소강이 태강의 이름을 되뇌고 있을 때.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예? 부탁 말입니까?”
“지금 여기에 있는 손님들을 모두 물릴 수 있을까? 지화루 객잔의 관계자들과 너를 포함해서. 한 식경(30분) 정도면 될 것 같은데.”
“예?”
그 말에 소강은 난처하다는 얼굴을 했다.
지화루의 일개 점소이에 불과한 그로서는 힘든 일이었다.
저녁 장사로 먹고사는 객잔인데, 손님들을 모두 내보내고 게다가 주방장과 주인장까지 내보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소협, 아무래도 그것은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짤그랑.
소강의 두 손 위에 얹어지는 주머니.
“아마 이 정도 금액이면 손님들에게 환불은 물론이거니와 30분 정도 가게를 비우는 값 이상은 될 거 같은데. 물론 이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의 사후 처리도 가능할 정도의 금액이고.”
꿀꺽.
청년의 말 한마디에 소강이 주머니를 열어 살펴보자,
번쩍번쩍.
눈이 부실 만큼 금은자들이 섞여 있었다. 소강이 평생 일해도 그 십분의 일이나 벌 수 있을까 할 정도의 엄청난 금액이었다.
“어때, 가능하겠어?”
“……맡겨만 주십시오!”
소강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후다닥 벗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차, 소강.”
달려가다 멈칫한 소강이 고갤 돌려 청년을 바라봤다.
“예?”
“과일곡료, 궁보계정, 향고유채 부탁하네.”
그 말을 듣자마자 전율한 소강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갤 끄덕였다.
태강의 몸에 엎어졌던 요리들과 곡료가 아니던가. 검은 복면인의 정체는 알 수가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점소이로 살아온 지 어언 10여 년이 다 되어 가는 소강은 이 일이 은원 관계를 해결하기 위함이라고 직감적으로 느꼈다.
생각은 짧았고 행동은 빨랐던 소강은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 소강을 피식 웃으며 바라본 청년, 천무린은 복면을 코끝까지 끌어올리고 천천히 걸어가 여전히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낄낄거리는 이들에게로 다가갔다.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나한테도 알려 주게.”
나직한 음성, 고저 없는 목소리였지만 분위기에 취한 그들은 난데없이 등장한 불청객에게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꺼냈다.
“아잇! 참내. 내가 또 입 아프게 두 번 이야기해야겠는가?”
“암, 해야지. 해야 하고말고! 어서 들려주게! 자네의 무용담을.”
“에? 그런데 자네는 왜 그리 검은 옷으로 칭칭 감고 있는가? 어디 가는가?”
“그게 뭐가 중요한가? 자네 이야기가 중요하지. 자자! 한잔 받고 어디 이야기보따리나 풀어 보게.”
불청객은 취한 섬서무관 소속의 생도들의 기분을 돋우며 이야기를 유도했다.
천무린에게 취한 이들을 다루는 일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다.
눈앞에 과일곡료와 금존청이 널브러져 있는 개수만 따져도 고주망태가 되지 않고서야 배길 수 없는 상태였기에.
하여간 어린놈의 새끼들이 싹수가 노래도 너무 노래!
천무린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해 가는 것도 모르고 섬서무관의 이들은 그저 낄낄거릴 따름이었다.
“크크, 좋다. 기분이다! 내 한 번 더 무용담을 펼쳐 주겠어.”
“자자, 박수! 박수!”
짝짝짝.
와하하하.
하, 이게 뭐라고 박수갈채까지 터져 나온다.
“아니, 글쎄 사천무관 애송이들이 1차전에서 이겼다고 아주 기고만장해하지 않겠어? 가뜩이나 우리 기분은 안 좋은데 말이야.”
“그렇지, 그렇지.”
“그래서 혼을 내줬지 뭔가.”
“어떻게?”
“어떻게는! 일부러 싸움을 유도해 여럿이서 혼을 내주는 거지!”
“오호, 일부러 시비를 걸고. 여럿이서?”
“옳지! 2차전 검진 시합에 어딜 올라오려고!”
……그 말에 천무린의 눈은 이제 싸늘하다 못해 냉기를 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호, 검진 시합에? 역시, 그것을 지시한 이가 누구던가?”
“딸꾹. 뭘 알면서 묻는 겐가! 그놈들은 건방졌어. 시건방을 너무 떨었단 말이야.”
말을 하던 섬서무관의 생도는 딸꾹질을 하면서도 헤헤거리는 것이 아주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 모습에 한숨을 푹 하고 내쉰 천무린은 서늘하기 그지없는 음성으로 섬서무관의 생도들을 쭉 훑어본다.
“제갈벽이겠지. 지시한 놈이.”
“그거야 당연……. 응?”
신나게 떠들던 섬서무관의 생도 중 하나인 하건욱은 뭔가 이질감을 느끼고 고갤 들었다.
제아무리 취해 있어도 제갈벽이라는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그에게 위험 본능을 일깨웠다.
“……너, 이 새끼 뭐야?”
“확답이 안 나와서 아쉽긴 한데, 뭐 거의 확답을 받은 거나 다름없군. 그놈이 맞긴 하구나?”
“너 새끼 뭐냐고!”
검은 복면인, 누가 봐도 수상하지 않은가.
하건욱이 순식간에 취기를 몰아내며 주향을 풍기자, 나는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대체 얼마나 처마신 거야.
그나저나.
고갤 돌려 지화루를 쭉 둘러보니.
없다. 소강도, 손님도, 주방장도. 인기척이 지화루 밖에서 느껴지는 걸로 보아 소강이 아주 잘 해낸 모양이다.
“……고놈, 참 똘똘하군.”
“이 새끼가! 사람 말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야야, 다들 일어나 봐.”
하건욱은 취해서 널브러진 친구들을 깨우며 경계의 날을 세웠다.
야야, 이제 와 애들 깨우면 뭐가 달라져?
천무린은 천천히 지화루의 입구이자 유일한 출입문을 향해 걸음을 느릿하게 옮겼다.
‘제갈벽이라.’
독고황을 비롯한 삼대 무관 관계자들과 함께 사천무관 후보생 습격 사건에 대한 회의를 하던 중, 제갈벽을 유심히 바라보던 천무린의 눈에 포착된 것이 하나 있었다.
미세하리만치 움찔거린 사소한 동작. 입가가 비틀렸다 금세 돌아온 그의 행동은 천무린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보지 못했고, 아무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을 터였다.
섬서무관의 생도들이 자발적으로 이런 일을 했을 리가 없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이들이 대다수이니까.
심지어 섬서무관주인 혜공대사와 청강진인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고, 그저 당백진을 정치적으로 몰아붙이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다면 결론은 단 하나. 독단적으로 누군가 생도들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는 단 한 사람.
제갈벽.
설마설마했으나 섬서무관의 생도가 인정한 이상, 결론은 났다. 제갈벽이 범인이라는 심증이 이제 확증으로 바뀌는 순간, 마음을 굳혔다.
입구에 도착한 천무린은 자연스레 문을 잠그는 걸쇠를 바라보며 손을 올렸다.
“……예절이.”
철컥. 철컥.
“사람을 만든다…….”
철컥.
크으,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멋진 말이다.
자화자찬을 한 천무린은 몸을 돌렸고, 주독(酒毒)을 완전히 몰아낸 섬서무관의 생도들이 살벌한 기세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음을 알게 됐다.
“뭐야. 나 안 멋있어?”
“저 미친 새끼가!”
“죽여 버린다.”
“어디서 꼴값 떨고 있어!”
스르릉. 스르릉.
하나같이 허리춤에 있던 검을 빼 든다.
“혜공이랑 청강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당백진은 그래도 사람 새끼가 되었는데 말이야. 하긴, 사람 새끼가 안 된 걸로 따지면 남궁도가 제일 심한가?”
섬서무관의 생도란 놈들이 부끄럼을 전혀 모른다. 한 명을 상대로 다수가 스스럼없이 검을 빼 들고 이리 겁박하다니.
정파란 새끼들이 어떻게 이렇게 부끄러움을 모를까.
“어차피 네놈이 우리의 소속과 이 일을 안 이상, 편히 돌려보낼 순 없다. 그러니 방정맞은 네 입을 자책하거라.”
하건욱은 살벌한 기운을 폭사하며 한 걸음 내디뎠다. 그의 눈빛은 이미 작심한 듯했다.
‘……이 사실이 밝혀지면.’
하건욱을 비롯한 섬서무관의 생도들은 퇴관을 당할지도 모른다. 어디 그뿐이랴.
제갈벽 역시 무사하지 못할 테고, 나아가 섬서무관의 이름에 먹칠을 하게 될 것이다.
심지어 제갈벽의 뒷배경인 제갈세가가 섬서에 뻗치고 있는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절대 그분께 누를 끼쳐서는 아니 된다!’
이를 빠득 갈면서,
‘여기서 저 녀석을 살인멸구(殺人滅軀)한다면, 그리고 지화루 주변 사람들의 입막음을 제대로 시킨다면 문제 될 건 없다.’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하건욱이 내린 결론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앞에.
불쑥.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해?”
“흡!”
흡사 공간을 접었다고 착각할 만큼 놀라운 경공을 펼쳐 눈 깜짝할 사이에 천무린은 하건욱의 눈앞에 나타났다.
검을 휘두르려는 하건욱의 공격을 피해 그의 품에 성큼 다가선 천무린의 어깨가 하건욱의 가슴팍을 밀쳤다.
“흥! 감히.”
내공을 집약하여 복부로 이어질 충격을 막아 내고 검 끝으로 천무린을 찌르려던 하건욱은.
콰앙.
더 이상 생각을 이어 갈 수가 없었다.
“……콰앙이라고?”
“……!”
가벼운 어깨 밀치기로 낼 수 있는 소음이 아니었다.
그와 동시에 하건욱의 신형이 날아가 지화루의 구석에 처박혔다.
그것을 바라보던 섬서무관의 생도들과 후보생들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말도 안 되는 광경에 그만 눈이 휘둥그레졌다.
“골치 아픈 녀석 한 명 해결.”
졸도해 버린 하건욱을 향해 성큼 다가선 천무린은 눈웃음을 지으며 발을 슬며시 올렸다.
콰직.
“아, 내가 살인은 할 수 없는 몸이라서 말이야. 그냥 단전만 부셨어. 괜찮지?”
하건욱의 주변에 있던 섬서무관의 생도들이 놀라서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평생을 쌓아 온 단전을 부순 천무린의 해맑은 눈웃음을 보고.
……쨍그랑.
모두 얼어붙고 말았다.
“왜 그래, 다들? 전문가답지 못하게. 우리 애들 건드려 놓고 이 정도 각오도 안 했단 말이야?”
씨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