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화
제90화
“산동과 먼저 붙는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다른 무관에 비해 섬서무관의 전력은 큰 피해가 없었다.
7기수 각신의 몸이 성치 않았으나, 풍월검진을 펼칠 때 각신이 없다고 한들 딱히 달라질 건 없었다.
검진에 대한 이해도는 섬서무관 생도들 모두가 높았다.
산동무관이라고 할지라도 섬서무관의 온전한 전력과 맞부딪쳤을 때는 감히 이기지 못할 터였다.
“비록 6기수 때는 패왕검진에 밀리긴 했지만, 이번엔 다르지.”
비무장 아래에서 준비하고 있는 생도들에게 여유로운 모습으로 다가온 제갈벽이었다.
섬서무관의 7기수들 역시 긴장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보였다.
“섬서의 생도라면 응당 가져야 할 자신감이지. 보기 좋구나.”
제갈벽은 7기수 생도들을 바라보며 독려했다.
“1진에 곡현기, 2진엔 구양표를 필두로 풍월검진을 펼쳐라. 자유로이 펼치되, 수진(數陣)과 방진(放陣)을 곡현기와 구양표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도록.”
검진을 이끌어 가는 이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그 이해도가 가장 높은 곡현기와 구양표를 내세울 필요가 있었다.
“공격과 대오의 밀집에만 신경 쓴다면 너희가 무너질 일은 절대 없으니, 자신감을 가지고 임하거라.”
“예! 알겠습니다!”
“깨부수고 오겠습니다.”
곡현기와 구양표의 위풍당당한 기세에 힘입은 생도들이 당찬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는 산동무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풍월검진과 같은 나약한 검진은 대번에 부숴 버린다고 생각하여라. 시작도 공격, 끝도 공격이다.”
산동무관의 중운은 개방에서도 알아주는 사결개의 신분이었다. 허리에 5가닥의 매듭을 두르고 있는 중운의 가능성을 알아본 방주는 그를 산동무관의 교관으로 보내 버렸다.
특히, 진법에 능통한 중운이라면 산동무관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고 그를 보낸 개방 방주의 과감한 판단은 제법 좋은 성과를 냈다.
작년 6기수의 검진 대결에서 산동의 패왕검진으로 섬서의 풍월검진을 찍어 눌렀기 때문이다.
“감히 패왕검진에 풍월검진 따위는 비할 바가 못 된다. 이미 내게 가르침을 받은 너희라면 그 누구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예! 물론입니다!”
“절대로 지지 않겠습니다!”
산동무관 생도들은 지금 굉장한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여태 사천무관이라는 버팀목이 있었기에 섬서무관에게 져도 꼴등이 아니었다.
늘 그래 왔고, 그건 시간이 지나도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사천무관이 비무 대결에서 1등을 차지했다니.’
‘상상도 할 수 없어.’
‘하필 우리 기수에서 꼴찌를 한다고?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꼴찌라는 오명은 1년간 계속 따라다닐 것이다. 아니, 1년뿐 아니라 어쩌면 졸업할 때까지 그 꼬리표가 계속 붙어 있을 수도.
한 기수에 1번밖에 기회가 없는 삼대 무관 비무대회에서 꼴찌를 하면 다시는 그 오명을 벗을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참가하고 싶다고 참가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러니까 꼭.’
‘이번에 이겨서 승부의 결과를 뒤집어야 한다.’
‘그리고 3차전에서 전심전력으로.’
심지어 대회 결과와 상관없이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천무관을 응원하고 있지 않은가. 황보권이 저지른 수치스런 행위로 지금 산동무관은 제법 많은 오물을 뒤집어쓴 상황이었다.
여기에다 꼴찌라는 결과를 낸다?
“……죽더라도 비무장 위에서 죽어라.”
중운 역시 그런 분위기를 읽은 터라 결연한 표정으로 생도들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 * *
섬서무관과 산동무관.
사천무관과 달리, 섬서무관과 산동무관은 지금껏 1위 자리를 두고 수없이 치열한 경쟁을 벌여 왔다. 그러다 보니, 서로가 서로에 대해 빠삭하게 잘 알았다.
“무식하게 힘밖에 없는 새끼들.”
“전략 따윈 깡그리 무시하고 그저 앞만 보는 새끼들.”
섬서무관은 산동무관을 그리 비난했고.
“얌생이처럼 치고 빠지기나 잘하는 새끼들.”
“대가리만 잘 굴리는 새끼들.”
산동무관은 섬서무관을 거칠게 깎아내렸다.
으르렁거리는 두 집단은 흡사 사생결단(死生決斷)이라도 낼 것 같은 모습을 보였다.
낄낄.
그리고 그 모습을 마치 강 건너 불구경이라도 하듯 옹기종기 모여 보고 있는 사천무관의 후보생들이었다.
“생도라는 인간들이 할 줄 아는 거라곤 서로 욕하는 것밖에 없네.”
“근데 우리는 이렇게 즐겨도 되는 건가.”
“어때? 원래 제일 재밌는 게 싸움 구경이랬어. 즐겨.”
암, 그렇고말고.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구경거리 중 하나가 싸움 구경이었다. 그것도 그냥 싸움이 아니라 개싸움.
그런데 그것도 잠시.
콰앙!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부딪친 두 검진, 풍월검진과 패왕검진의 싸움이 아주 격렬했다.
특히, 각 검진을 이끄는 이들의 실력이 돋보였다. 풍월검진의 곡현기와 구양표는 발군의 지휘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고, 패왕검진의 탁궁과 팽완은 적재적소에서 부족한 점을 메워 가며 검진을 훌륭하게 펼쳤다.
쾅!
탁궁이 이끌고 있는 패왕검진의 선두 일원들은 풍월검진의 후미를 맡고 있는 섬서무관의 생도들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었다.
“끄으으.”
“제기랄, 버텨!”
“버텨 내! 무너지면 끝이다!”
으르렁거리는 탁궁의 공격에 섬서무관의 후미를 맡고 있는 생도들은 몇 번이나 휘청거리며 이를 악물었다.
“네 이놈!”
선두에 집약된 패왕검진의 위력에 후미를 맡고 있는 곡현기는 힘이 빠진 생도들의 빈자리를 채우며 풍월검을 펼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탁궁의 기기묘묘한 공격은 곡현기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그 모습에,
“양표!”
“알겠다.”
곡현기는 선두를 맡고 있는 구양표를 향해 소리쳤다. 기다렸다는 듯 호명을 받은 구양표는 눈을 빛내며 풍월검진을 양분하여 탁궁과 팽완의 패왕검진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진득하게 파고들었다.
“패왕검진의 약점은 단 하나. 집약된 힘이 깨지면 검진 전체의 힘 삼 할도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점!”
제갈벽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팔짱을 낀 채, 비무장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단히 패왕검진을 연구한 결과였다.
6기수 비무대회에서 처참하게 깨지고 난 뒤, 연구하고 또 연구한 것을 풍월검진을 이끄는 곡현기와 구양표에게 가르쳤다.
그러니 당연히 승기를 잡을 수밖에.
“패왕검진이 지겠는데?”
“저렇게도 검진을 운용하는구나. 되게 변칙적이고 자유로워.”
감탄을 내뱉는 송무와 태강이었다. 둘뿐만 아니라 다른 후보생들도 검진과 검진의 대결은 생소했기에 말없이 지켜볼 따름이었다.
“흐랴아압! 감히 어딜!”
팽완의 거력이 구양표가 이끄는 선두 부분과 맞부딪쳤다. 그들이 파고드는 틈을 정확히 겨냥한 팽완의 움직임은 구양표의 발목을 잡았다.
“칫.”
구양표의 아쉬움이 담긴 짧은 한마디.
“후후. 제갈벽, 그리 쉬울 줄 알았느냐. 일자무식하게 그저 들이대기만 해서는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산동무관의 교관인 중운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6기수의 승리도 쟁취했지만, 7기수의 승리 역시 쟁취하는 것이 중운의 목표였다. 진법에 탁월한 능력을 지닌 중운은 이미 풍월검진의 약점을 쉽사리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장난 아닌데?”
“어. 쉽사리 안 끝나겠어.”
“두 검진 모두 완성도가 높아…….”
“사천검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야.”
“거기다 둘 모두 7기수라…….”
감탄이 절로 나왔다. 동시에 표정도 점점 굳어 갔다. 그저 싸움 구경을 한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즐길 수가 없었다. 치열한 양상으로 번져 가는 두 검진의 싸움에 사천무관 후보생들의 눈빛이 급격히 흔들렸다.
저 두 검진에 비해 사천검진은 그리 완성도가…….
“푸하하하하. 크켈켈켈!”
떼구르르 구르며 요절복통을 하는 한 인영.
“왜 저래?”
“미친 건가.”
“저런 거 한두 번 보냐. 그냥 무시해.”
한숨을 푹푹 내쉬는 후보생들의 옆에서 바닥까지 치며 웃음을 터뜨리는 천무린이었다.
“쿠, 쿠흐하흐합핫핫! 저, 저게.”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풍월검진? 패왕검진? X랄하네.
어디서 검진 이름만 그럴듯하게 붙여 놔서 기대하고 봤더니.
“……완전 개판이잖아?”
그렇다. 개판이었다.
수준 미달. 아니, 진법으로 함량 미달이라고 해야 하나.
저걸 진법이라고 지금 가르쳐 놓은 거냐.
“개판이라고? 아니, 누가 봐도 사천검진이 더 개판인데…….”
송무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에이, 사천검진은 당연히 답이 안 나오는 거고. 근데 별 차이가 없잖아.”
말 그대로였다.
섬서무관과 산동무관의 교관들의 수준이 그리 높지 않다는 뜻 아니겠는가.
“에휴, 저 정도면 충분하네. 뭐, 걱정할 것도 없겠다.”
“대체 뭘 걱정할 게 없다는 거야……. 너 말대로 검진의 수준이 뒤떨어진다고 해도 이해도가 다른걸.”
“이해도?”
물끄러미 패왕검진과 풍월검진을 바라보는 내 고개가 모로 꺾였다.
“……무슨 이해도? 저게 뭘 이해하고 펼치고 있다는 거지?”
“응? 저, 저기 애들이 펼치는 검진은 위력도 굉장하고, 전략적이고…… 또.”
“위력이 굉장? 전략이 뭐?”
갸우뚱.
정말 녀석들의 눈엔 그렇게 보이나.
근데 옛날 거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는데.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고 했다.
옛것을 익히고, 나아가 새로운 것을 깨달아 간다고.
“근데 옛것이 보이냐, 저기에서?”
“옛것도 좋지만 흐름에 맞게 새롭게 구성하는 게 더 적절하지 않을까. 무린이 너도 그랬다시피 군더더기가 없어야 한다고 했잖아.”
하여간 말은 잘해요, 말은.
“군더더기가 아니라 핵심이 빠졌는데? 성현들이 대가리가 없어서 괜히 진법들을 어렵게 만들었겠냐.”
어려움으로 따지면 소림의 십팔나한진이요, 완성도로 따지면 무당의 태극검진이고, 단신으로 해낼 수 없는 일을 해내는 것이 진법의 힘이 아니던가.
그에 반해.
“저기에 있는 건 그냥 병정놀이지.”
진법을 펼칠 때 중심을 잡는 역할.
선두와 후미를 나눌 것인가 말 것인가.
개진, 후진, 원진, 추행진 등 진법의 속성까지.
물론 다 중요하다.
근데.
패왕검진은 추행(錐行)진밖에 펼치질 않았고, 풍월검진은 원진(圓)밖에 펼치질 않았다.
더 할 말이 뭐가 있으랴.
“저렇게 검진을 만든 거야 뭐…… 이유는 뻔하겠지.”
애초에 저 검진이 만들어진 이유는 단 하나. 상대의 검진을 깨뜨리겠다는 목적으로 죄다 핵심은 빼 버리고 만든 반푼이 검진이다.
풍월검진은 패왕검진을, 패왕검진은 풍월검진을 깨부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고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유가 뭔데요?”
설화린이 다가와 묻는다. 그녀 역시 궁금했나 보다. 그렇게까지 자신하는 이유를.
“어차피 두 눈으로 보게 될 테지만, 굳이 말을 하자면.”
넌지시 꺼내는 내 말에 후보생들의 눈은 비무장에 고정된 채 귀만 쫑긋거린다. 아닌 척해도 나의 주옥같은 말은 피가 되고 살이 되었으니.
“내가 있기 때문이잖아?”
……정말 주옥같네. 줫같아!
가슴을 쭉 내민 천무린의 모습에 모두가 눈을 질끈 감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