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제89화
“……아미타불.”
불호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무량수불.”
불호에 이어 도호가 울려 퍼지는 전각이었다.
왠지 허망한, 또 한편으로는 처량한.
삼대 무관의 개관(開館) 이후, 이처럼 불호와 도호가 동시에 울려 퍼진 적이 있었던가.
혜공대사와 청강진인이 자리하고 있는 전각 내에 섬서무관 총책임자인 제갈벽이 정적을 깨뜨렸다.
“……무엇이 그리 걱정입니까, 두 관주께서는.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왔다고는 하나 두 번째 시합부터 차근차근 바로잡아 가면 될 일 아니겠습니까.”
불호와 도호를 외우는 두 관주에 비해 제갈벽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냉정하게 비무대회를 바라보는 인물이었다.
부처 말씀이니, 선대의 말씀이니.
그런 비현실적인 이야기보다는 지금 처해 있는 현실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런 고로 따져 보면.
‘변수가 있긴 했어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섬서무관의 기초 검인 풍월검(風月劍)과 풍월검진(風月劍陣)은.
소림의 굳건함을.
무당의 유연함을.
화산의 화려함을.
종남의 쾌속함을.
제갈가의 변칙적인 요소까지 두루 섭렵해 짜여졌다.
얼마나 고심하고 고안해 낸 것인지 제갈벽은 잘 안다.
그런 반면, 이름부터 허접한 사천검과 사천검진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그나마 신경에 거슬리는 것이라면 산동무관의 초패검(楚覇劍)과 패왕검진(霸王劍陣)이었다.
“……그래 봐야 풍월검진에 전혀 상대가 안 됩니다.”
섬서무관이 검진 대결에서 승리를 거머쥐고, 이어지는 세 번째 시합까지 이긴다면 대회의 승패는 달라질 것이다.
제갈벽은 이미 그 너머까지 내다보고 있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검진 대결에서 섬서무관이 우승해야 한다.
그게 설령 정당한 방법이 아닐지라도.
혜공과 청강은 지극히 이성적으로 말하는 제갈벽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한마디 거들었다.
“……제갈 공께서는 너무 방심하지 마시오.”
“무량수불, 기세는 흐름을 타는 것이니.”
눈꼬리가 축 처져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혜공과, 속 편한 소리만 늘어놓는 청강의 말에 제갈벽은 형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관주의 직을 차지하고 있는 이는 이 두 사람이지만, 실질적으로 섬서무관을 이끌어 가는 사람은 제갈벽 자신이었다.
그의 탁월한 수완이 없었다면 섬서무관이 이토록 유기적이고 원활하게 운영되진 못했을 터.
그래서.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천의 7기수 대다수가 부상을 입었기에 대대적인 개편이 필요할 것입니다. 혹은 8기수가 나온다고 할지라도 비무대회에서 좋은 성과를 보인 이들 역시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할 것이고, 혹 출전한다고 할지라도 크게 걱정할 부분은 아니지요.”
그래 봐야 8기수다. 그들이 검진을 익혀 봐야 얼마나 익혔을까.
제갈벽이 이리 자신만만해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삼대 무관의 교육 방침은 대체로 비슷비슷하다.
매년 초 삼대 무관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모이는 자리에서 각 무관의 교육 방침, 교육 방식을 밝히고, 무엇을 타개하고, 무엇을 바꿔 나갈지 논의했다.
연말에는 비무대회를, 연초에는 무관 논의를 진행하는데, 섬서무관의 실질적인 책임자인 제갈벽은 그런 행정적인 부분을 모조리 꿰고 있었다.
“반드시 승리를 쟁취하여 돌아오겠습니다.”
고작 하루 뒤면 시작될 검진 대결에 대해 두 관주에게 보고를 마친 뒤, 제갈벽은 전각을 떠났다.
휑하니 자리를 비운 그의 모습에도 그저 자애로운 미소로 화답하는 혜공이었다.
자신만만한 제갈벽의 모습에 혜공과 청강은 서로 시선을 마주하였다.
염려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단순한 노파심 때문일까.
“혹여 위험한 짓을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걱정하지 마시오. 설마 그런 우둔한 마음을 먹으려고요.”
“……아미타불. 뜻대로,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는 것이 세상사가 아님을 아셔야 할 텐데 말입니다.”
“무량수불. 언젠가는 깨닫게 되는 날이 오겠지요.”
두 사람의 공허한 외침만이 빈 공간을 채울 뿐이었다.
* * *
검진 시합을 준비하는 기간은 금방 지나갔다.
“허억, 허억.”
“어디 또 부러진 거 같은데.”
“저 새끼, 저거 너무 진심이야.”
황태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덜렁거리는 자신의 팔을 바라봤다. 겨우 붙여 놨더니, 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덜렁거린다.
“……연습은 실전처럼, 실전은 전장처럼.”
“X랄, 그냥 너 이번에 눈이 삔 거잖아. 어떻게든 이기려고. 별호에 눈이 멀었냐! 이 미친놈아!”
창을 휘휘 돌리며 멋있는 자세를 취하는 신혁건의 반응에 눈을 부라리며 쏘아붙이는 황태였다.
“이번에 활약하면…… 진천창룡 혹은 선풍객. 뭐 이런 별호가 붙지 않을까 싶은데.”
환상에 취해 함박웃음을 짓는 신혁건의 모습에 후보생들은 그만 혀를 찼다.
“명성에 미치면 사람이 저렇게 변하는구나.”
“그냥 돌아 버렸는데?”
“어휴, 이래서 사람이 욕심을 버리고 살라고 하는 거구나. 추하다, 추해.”
온갖 비난이 신혁건에게 쏟아졌지만, 전혀 개의치 않은 모습으로 창을 돌리는 신혁건이었다.
“실컷 떠들어라! 추풍검? 적화객? 매화쌍저얼? 흥! 어림도 없지.”
송무와 남사익, 백리 형제를 쭉 훑어본 신혁건이 가슴을 쭉 내밀며 이미 관중들의 심리를 꿰뚫은 사람처럼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열 뻗치는데, 저 새끼 팔다리 부러뜨리고 출전시키지 말까?”
“너도 그렇게 생각했어?”
“너도?”
“응, 나도.”
“아니, 그리고 쟤가 왜 별호가 생겨. 생기더라도 무린이가 생기겠지. 명성은 제일로 높은데, 아직까지 그런 이야기가 없잖아?”
“……그건 맞지?”
“풉, 꼴좋다. 제발 이기고도 아무런 별호도 안 생겼으면 좋겠다.”
검진 훈련을 마친 후보생들이 막간을 이용해 웃고 떠들며 긴장을 풀고 있는데 천무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또.’
몸속에서 역근경의 기운이 꿈틀거린다.
각원과의 비무 이후, 또 움직이는 역근경의 기운이라.
이번엔 소림의 무공을 익힌 이도, 대반야능력을 익힌 이도 없다.
그렇다는 건.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
이유 없는 행위는 없다.
심지어 내공은 더더욱 심각하다.
내공이 자신의 의지를 벗어나서 움직인다는 것은 그만큼 심각한 의미를 지닌다.
철저한 통제 아래에 있어야 할 내력이 혼자 움직인다는 것은.
‘주화입마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처음에는 개의치 않았으나, 불과 이틀 간격으로 또 움직이다니.
혹여 살의에 반응한 것인가 하여 기억을 떠올려 보았으나, 근래에는 딱히 살의를 느낀 적이 없었다.
……대체.
상념에 젖어들려고 할 때쯤.
“준비는 다 되었는가?”
얼굴을 들이민 이는 악교운이었다.
“예!”
“그렇습니다!”
후보생들의 담백한 기합과 동시에,
“다 죽여 버리겠습니다아아아!”
우렁찬 외침이 악교운의 고막을 때렸다.
신혁건이었다.
“……화통을 구워삶아 먹었는가. 왜 이러는 건가?”
“……자기 혼자 별호가 없다고 아주 발악하는 중입니다.”
“미친놈인 거 같습니다.”
“돌아이인 것 같습니다.”
“교관님! 저 녀석은 배제시켜도 좋을 거 같습니다.”
다수의 후보생들이 혀를 차며 신혁건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악교운이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갤 절레절레 저었다.
“명성은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생기는 덧없는 것이다. 명성이 생김으로써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은 좋으나, 그에 따른 책임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게을리 하지 말고, 늘 정진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지.”
“암, 그렇고말고.”
“물론입니다.”
“더더욱 일로정진해야지요.”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명성이란 그런 것이다.
명성이 생긴 후부터는 어찌 보면 의무와 책임도 함께 생기는 것이다.
그저 의식 없이 했던 행동도 이젠 누군가의 시선을 신경 써야 하고, 정파 무림인으로서 명성을 지니게 되면 더욱더 도덕적 의무를 다해야 한다.
“……예! 잘할 자신 있습니다! 에헴.”
신혁건이 가슴을 들이밀며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자, 악교운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잘도 하겠다.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거 같은데.
하긴.
누가 명성을 얻는 것을 싫어하겠는가. 누구라도 명성을 얻고 자신의 실력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할 것이다. 그게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존감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면 의당 그럴 수 있다.
더군다나 이들은 후보생의 신분이지 않는가.
미래가 창창하다. 지금부터 별호가 생길 정도로 명성을 얻어 찬란한 미래를 가꾸어 나간다면 더 좋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런 이들에게 그저 해 줄 말은.
“최선을 다해라. 그러면 원치 않아도 사람들이 알아줄 것이다. 절로 따라오는 명성에 연연했다가는 그 명성과 더욱 멀어질 수 있으니 최선을 다하여 누가 봐도 너희들이 노력했다는 것을 인정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드디어 내일이었다.
두 번째 시합, 검진 대결이 진행되는 날이.
* * *
휘잉!
을씨년스러운 날씨로 관중들의 팔뚝에는 오소소 닭살이 돋았다.
“……으, 갑자기 왜 이리 바람이 분담.”
“햇빛도 가려져 더욱 그렇구먼.”
“마치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말일세.”
“하하, 여기에 무슨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하여튼 쓸데없는 걱정은.”
어느새 비무장을 가득 채우고 다닥다닥 붙어 앉은 관중은 비무대회 두 번째 시합인 검진 대결에 대한 기대로 자못 들뜬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대감을 충족시켜 줄 인물이 비무장 위로 올라왔다.
“하후성입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하후성의 인사말 한마디가 관중들의 가슴에 작은 불씨 하나를 심어 주었다. 그리고 그 불씨는 금세 열렬한 환호로 바뀌었다.
“우와아아아아! 하후성이다. 천성검협! 천성검협!”
“하후성! 하후성! 하후성!”
하후성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듬직한 마음이 절로 드는 관중들의 이 같은 반응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신진 고수의 등장과 후기지수와의 만남도 기쁜 일이나, 하후성처럼 정파 무림을 이끌어 나가는 유명 인사를 보는 맛도 나름 좋았다.
이럴 때가 아니면 어디 얼굴이나 볼 수 있겠는가.
수소문하여 찾아가도 그의 그림자도 보기 힘들 터였다.
“익히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번 시합은 검진 대결이며, 무관주님들과 대진표를 구성한 결과를 공표해 드리겠습니다.”
촤르르륵!
하후성의 주변에 서 있던 교관들이 돌돌 말려 있던 한지를 쭉 펼치자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쓴 글자가 나타났다.
섬서무관(陝西武官)
산동무관(山東武官)
“먼저 시합을 치르게 될 무관은 섬서와 산동입니다.”
“오오, 바로 섬서와 산동의 대결인가.”
“그것 참 흥미롭군그래!”
“허어, 어쩌다 두 무관이 먼저 붙는 건가! 산동이 이번엔 제대로 칼을 갈지 않았겠는가.”
“에헤이, 이 사람아! 진법 하면 섬서이지! 속해 있는 문파만 봐도 격이 다르니 말일세!”
“예끼! 격이 다르다니! 그래서 사천에게 그리도 개박살이 났는가?”
관중들의 기대감은 더욱 커졌다.
검진 대결에서의 승부가 곧 대회의 승패를 가를 수 있음을 그들도 알고 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