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화
제88화
“두 번째 시합을 7기수 아닌 8기수로 출전시키자는 말인가?”
“예.”
“악 교관,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눈이 가늘어진 당백진이 자신의 앞에 놓인 나무 탁자 위에 지필묵을 건드리고 있었다. 섬서무관과 산동무관은 당연히 7기수들이 검진 대결에 참가한다는 이야길 들었다.
그런데.
“……숙고한 끝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번 대회에 생도와 후보생의 총책임자로 임명된 악교운이 저리 말을 하고 있으니.
본래 같았으면, 일언지하에 축객령을 내렸을 테지만.
8기수가 보여 준 성과는 곧 악교운의 성과. 충분히 그간의 공로를 인정하여 한 번 더 이야기를 들어 볼 요량이었다.
“당연히 그렇겠지. 허무맹랑한 이야기일랑 들을 생각이 없으니, 핵심만 간단하게 말해 보게.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당백진 역시 인정하는 바가 있었다.
성과는 8기수가 더 뛰어났다.
최후의 10인에 무려 8명이 진출한 것만 봐도 당연히 그리 판단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것은 8기수 후보생들과의 대결이 성사되었을 때 의미가 있는 이야기일 뿐.’
7기수는 검진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체계적으로 받는다. 생도가 되어서 가장 첫 번째로 받는 수업이 검진에 대한 이해와 수련이니까.
그런 7기수를 두고, 비무대회를 위해 급조하다시피 익힌 8기수의 사천검진을 믿으라니. 당백진이 악교운의 말에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먼저 7기수 생도들의 부상 정도가 심각합니다. 주력 인원들이 대다수 불참하게 될 것입니다.”
“더 있는가?”
“그리고…… 믿기 어려우실 수 있겠지만, 8기수들의 사천검에 대한 이해도가 더 뛰어납니다.”
그 말에 당백진이 쥐고 있던 지필묵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자네 말대로 그 말은 믿기 어렵군.”
결과적으로 7기수가 뛰어남을 증명하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무시 받을 정도는 아니다. 전체적인 수준으로 놓고 봤을 때는 더더욱.
기대에 못 미쳤지만, 사천무관에서 떠들어 댄 황금 기수라는 말이 괜히 나왔겠는가.
“자네.”
“예, 관주님.”
“기대한 이상으로 8기수는 저력을 보여 주었네. 인정하네. 그게 비단 8기 후보생들 중 특정한 한두 명이 아니라 모두가 내 눈을 의심할 정도로 수준 높은 모습을 보여 주었지.”
괜한 공치사가 아니라 당백진은 진심 어린 칭찬을 했다.
8기수의 수준은 그가 예상한 그 이상을 보여 주었다.
관주가 된 입장에서 아직 생도도 되지 않은 후보생들에게 얼마나 큰 관심을 쏟을 수 있었겠는가.
졸업을 해야 하는 4학년 생도들의 진로 문제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3학년 생도들의 교육에도 관여해야 하고, 거들먹거릴 수밖에 없는 2학년 생도들의 기도 눌러 줘야 하며, 1학년 생도들의 교육 방침을 지난 생도들의 교육 결과를 토대로 수정해야 하는 일까지.
수많은 일들이 당백진의 손을 거쳐 간다. 각각의 후보생을 그의 뇌리에 각인시키는 것보다 현실적인 일을 처리해야 하는 시간이 너무 많았다.
평생을 무인으로 살아온 당백진이 이런 행정 처리와 문서 더미 속에 갇혀 허덕이게 될 줄 그 누가 알았으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태 제대로 된 성과를 보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욱 욕심이 난다. 이 비무대회의 우승이.
검진 시합만 무사히 마치면 사실상 우승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당백진은 고민하는 것이다.
하물며 이번 대회만 잘 치른다면.
‘모두가 예상하듯이 이번 8기수의 결과로 다음 비무대회 우승까지도 충분히 노려볼 수 있다.’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는다면, 호랑이 등에 날개를 단 격이 될 터.
그 큰 날갯짓으로 여태 찌들었던 패배 의식을 깨끗이 털어 버리고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는 말일세. 꼭 8기수여야 하는가?”
“……그렇습니다.”
악교운이라고 어찌 모르겠는가.
그 역시 당백진을 모시면서 생도와 후보생들을 맡은 지 어언 8년 차다.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사천무관을 여기까지 끌고 오느라 각고의 노력을 했다. 매번 삼대 무관 중 최하위라는 오명을 뒤집어썼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다짐하며 악교운은 포기하지 않았다.
당백진과 의기투합해 오늘과 같은 영광의 순간이 찾아오기를 그동안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가.
8기수에 대한 악교운의 확고한 믿음에 당백진은 지필묵을 나무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어째서 7기수가 아닌 8기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누구보다 악교운을 잘 아는 당백진으로서는 그가 이만큼 확신을 갖고 말하는 일이 드물었기에 그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무관은 매번 대련을 시키고, 매 순간 평가하며, 서로를 경쟁자로 인식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게 우리의 방식이니까.”
가늘게 눈을 뜬 당백진은 악교운의 말에 의당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없이 경쟁하고 치열하게 부딪치며 거기서 살아남아야 한다.
그게 당백진의 지론이었다.
“네, 맞습니다. 관주님의 말씀처럼 그게 사천무관의 교육 지침이자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한차례 호흡을 가다듬은 그의 모습을 보고 당백진은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그가 말을 이어 가는데 문제가 없도록.
“8기수는 지난 반년 동안 그와 같은 경쟁에서 벗어나 자체적인 훈련을 거듭해 왔습니다.”
“경쟁만이 정답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겐가?”
“아닙니다. 하지만 굳이 우리가 나서서 경쟁을 붙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천무관을 졸업한 이들의 결과가 어떻습니까? 그들 사이가 돈독합니까?”
……돈독이라. 그것과는 거리가 먼 상황이었다.
“꽤나 감성적인 말을 하는군, 악 교관.”
“눈으로 본 결과를 토대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8기수는 이전 기수들과 다르게 수련해 왔고, 그 결과를 우리에게 보여 준 겁니다. 경쟁이 아니더라도, 날이 선 경계를 하지 않아도 스스로 발전할 수 있고 서로의 손을 잡고 끌어 줄 수 있음을.”
“…….”
침묵하는 당백진의 모습에 악교운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우리가 무관을 세운 이유는 이게 아니지 않습니까?”
「 이게 무관입니까. 이게 애들 훈련하는 곳이냔 말입니다. 죄다 한곳에 몰아넣고 평등, 공정 따윈 개나 줘 버리고 각자 잘사는 놈들끼리 뭉치고, 센 놈은 센 놈들끼리 뭉치고, 약한 놈은 눈치나 보며 쥐어 터지고 말입니다. 애당초 무관을 만든 목적이 이것이냔 말입니다. 」
“강호 무림에 나가서도 서로를 믿고 자신의 등을 맡길 수 있는 녀석들로 만들어야죠. 여태 그러지 못했지 않습니까.”
7기수만 봐도 그렇다.
이백이 우승해도 그를 찾아와 축하해 준 7기수 생도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과열된 경쟁으로 점철된 훈련 방식과 평가 방식이 이런 결과를 낳은 것이리라.
그러나.
“지금부터 되돌릴 겁니다. 관주님.”
지금의 8기수라면 가능하다.
물론.
“게다가 실력 역시 믿고 맡길 만한 녀석들입니다. 관주님이 8기수를 참가시키자고 하셨을 때, 미심쩍어했던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온실 속 화초보다 황야의 잡초가 더 낫다고.”
그 말에 당백진은 움찔했다.
그랬었군. 그랬었지.
“…….”
당백진의 눈이 심연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코앞에 우승을 바라보고 있다는 이유로 깜빡 잊고 있었다. 욕심에 잠깐 눈이 먼 것이다. 무엇이 중요한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재고해 주십시오.”
“자신 있는가.”
“예! 예?”
악교운은 갑작스레 태도가 변한 당백진의 말에 놀라서 반문하고 말았다.
“……자네가 이렇게나 말이 많은 사람인 줄은 몰랐군. 8년 만에 처음 보는 모습일세. 술판을 벌여도 좀처럼 말하지 않던 자네가 말일세.”
“그, 그게…….”
“됐네. 자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네. 그 덕에 나도 무엇이 중요한지 다시금 되새겼고 말이야. 그러니 자네의 뜻대로 하게.”
훈풍이 불었다.
당백진은 사천무관을 이끄는 관주로서 무게감이 있는 인물이다. 그런 그의 분위기가 악교운을 품었다.
따뜻한 기운으로.
“이번 대회가 끝나면 함께 술이나 한잔하지.”
그 말에 악교운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 * *
12인의 사천검진을 구성할 후보생들의 명단은 금세 결정되었다.
“전방에 나, 채종한, 진이간, 유역지, 호상윤, 후송. 이렇게 6명으로 간다.”
기존의 명단이 새롭게 바뀌었다.
“후미에는 신혁건을 중심으로 태강이 좌, 당지운이 우를 맡고 명진이 후방을, 전방에 낭소소와 진무양이 맡아. 개진하게 되면 기본적으로 전방에 있는 우리와 교차할 수 있도록 대비해야 한다.”
두 조를 각각 6인으로 나눴다.
“……그렇게 나누면 검진의 위력이 더욱 떨어질 것 같은데, 괜찮을까? 무린아.”
“당연히 떨어지지. 모든 것은 임기응변이야. 개진(開陣), 차륜(車輪), 연환(連環). 이렇게 세 가지만 기억해.”
태강의 물음에 천무린은 손가락 세 개를 펼치며 수신호를 정했다.
“개진과 동시에 두 조로 나눴다가 차륜이 되면 제각기 차륜진을, 연환이 되면 다시 합치는 방식으로.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그 말에 신혁건이 천무린과 눈빛 교환을 한 후, 후미 조와 함께 세 가지 인술진에 대한 흐름을 설명하면서 직접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마침 나타난 송무와 설화린, 백리무영, 백리후, 황태, 남사익을 비롯한 부상당한 이들 다수가 몸을 풀었다.
“하하, 다들 열심히 하네.”
“우리가 안 나설 수가 없지.”
몸을 푸는 녀석들을 바라본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갤 저었다.
“부상자들은 열외를 하지?”
“진법 펼치는 게 뭐 그리 힘들다고. 흉내 정도는 낼 수 있어.”
“우리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할 거면서.”
“그럼요. 우리가 필요하죠.”
몸도 성치 않은 놈들이 무슨 도움을 주겠다고.
하여간.
오지랖들은.
“낄낄, 가자.”
“제대로 해 보자고.”
“저쪽에서 7기수가 나오든 8기수가 나오든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 주라고!”
“콧대 눌러! 박살 내 버려!”
“쿡쿡.”
신혁건이 눈을 시뻘겋게 뜬 채 소리 질렀다.
“당연하지! 이번에 다 박살 낸다.”
그 반응에 후보생들이 웅성거린다.
“……별호 한번 받아 보겠다고 별 X랄을 다한다. 그렇지?”
“누가 아니래. 어휴.”
“속 보여. 속이 다 보인다, 정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보생들은 열악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하나로 단합되었다.
불가능하다고 소리치던 8기수들이 삼대 무관 비무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듯 또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해 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악교운과 당백진은 설핏 미소 지을 뿐이었다.
“우리가 낄 틈이 없겠어.”
“괜히 끼어서 눈치 없다는 소린 듣기 싫습니다.”
다시 한번 훈풍이 불었다.
따뜻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