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제86화
천년 소림이라 불린 곳에서 태어날 때부터 각고의 노력을 통해 수련을 했고, 무관에 들어와서도 소림의 배분 높은 이들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그런데도.
천무린은 그저 자신의 발길질을 막아 낸 각원을 신기하게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다.
저자에게는 이게 당연한 것이다.
……감히 오만해도 되는 놀라운 실력을 갖췄다. 소림의 제자 앞에서 저토록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어도 된다.
그러나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가슴으로는 이해하지 못했던 각원이.
“……아미타불.”
내려놔야 한다. 내려놓고 초심으로 돌아가 저자를 바라봐야 한다.
“후우우.”
처음으로 도전자이자 약자의 마음가짐으로 심호흡을 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천무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법인데.
흔들리는 마음을 금세 다잡고, 쓸데없는 잡념을 바로 털어 내다니.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쉬운 일 역시 아니었다.
특히,
‘소림이라는 허울 안에 갇힌 녀석이라면 더더욱.’
대반야능력을 익힐 정도로 뛰어난 녀석이라 이건가.
천무린이 하늘 위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웬일로 땡중과 닮은 녀석이 나타났네.’
허울 따윈 벗어던지고 소림의 그 누구보다 무공에 진심이었던 천각대사를 떠올렸다.
「 ……아니, 그러니까 나중에 소림한테도 자비 좀 베풀어 주시오! 시주! 」
「 넌 그게 천마신교 교주에게 할 말이냐? 」
「 그런 경계는 누가 만든 것이오! 허허, 나무아미타불. 」
어처구니없는 녀석이었는데, 참.
그리고 녀석을 바라봤다.
부동심(不動心).
마음을 다잡은 각원이 비무를 시작할 때 취했던 반장을 한 채, 굳건한 자세를 잡았다.
그 모습에, 천무린의 발길질에 밀려난 각원을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던 혜공이 설핏 미소를 지었다.
“아미타불.”
각신보다도 각원이, 그리고 수많은 소림의 제자들보다 각원이 대반야능력을 익힐 수 있을 정도의 뛰어난 재능을 보인 것은 다름 아닌.
‘부동심.’
부동심이라는 단 하나의 마음가짐 때문이었다.
강호에는 수많은 변칙과 변수가 존재한다.
또, 압도적인 강자들이 많고 무수한 기인들이 많았다.
단순히 힘만을 겨루기만 하는 강호였다면, 수십 년간 수련을 한 이들만이 최고가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
수십, 수백 년을 쌓은 내공과 무공에 대한 이해도가 월등한 이들이라도 한없이 약한 자들에게 무너지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아주 작은 변수, 말도 안 되는 변칙에 흔들리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무너지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각원은 그 누구보다 뛰어난 부동심으로, 중심을 잡고 초심으로 돌아가 올곧게 바라보는 그 능력이 아주 탁월했다.
그런 점을 잘 알고 있는 혜공은 반개한 눈으로 각원의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약간 재수 없으려고 하네.”
어처구니가 없네.
천각대사가 아니었으면 진작에 날려 버렸을 것이다.
벌써 이 나이에 부동심을 저리 잘 이해하다니. 말도 안 되는 재능이긴 했다.
쓱 둘러보자 사천무관의 8기 후보생들이 보였다.
“저런 코흘리개들 중에서는 어째 이 정도의 재능이 없는 건데!”
“……시주?”
혼자 중얼거리며 짜증을 내는 천무린을 각원이 눈을 가늘게 뜬 채 바라봤다. 비무 도중에 대체 무얼 하는 건지.
“됐고.”
천무린이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그 자세는 각원도 익히 잘 아는 자세였다.
“……나한권?”
각원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지금 자신을 놀리는 건가. 부동심을 깨뜨리려고.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시주, 장난이 지나치시오.”
“장난이 아니야. 그리고 자세가 이렇다고 해서 모두가 나한권인 것도 아니지.”
……그게 무슨?
단단한 청강석의 바닥을 찬 천무린이 땅으로 푹 꺼지듯 환영처럼 사라졌다.
“흡!”
순식간에 그를 놓친 각원은 대반야능력을 끌어올려 천무린의 기세를 쫓았다.
……찾았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곳에 금강복마권을 펼치는 각원이었다.
“호, 제법이야.”
짧은 감탄사를 내뱉은 천무린은 무심한 눈으로 금빛에 물든 금강복마권을 향해 주먹을 마주 내질렀다.
그 주먹에는 금빛 서기도, 별다른 내력도 없었다.
꽈앙!
동시에 두 사람이 물러났지만.
너무도 상반되는 반응을 보였다.
대반야능력까지 끌어낸 각원은 무려 여덟 걸음이나 뒤로 물러나서는,
“쿨럭.”
터져 나오는 핏물을 참지 못하고 땅바닥을 적시며 주저앉았고.
고작 두어 걸음을 물러난 천무린은.
“이게 아니었나?”
자신의 주먹을 바라보면서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당최 어떻게 생겨 먹은 인간이 저럴 수 있단 말인가.
쿨럭, 쿨럭.
몇 번이나 핏덩이를 뱉어 내고서야 각원은 겨우 설 수 있었다.
바들바들.
“……아미타불.”
“오, 또 일어났네. 몸뚱이 하나만큼은 단단하구나.”
태연자약한 얼굴로 말하는 천무린의 모습을 보고 각원은 자신의 무복을 적시는 피에 신경 쓸 여력도 없었다.
얼마나 큰 차이가 나야 이처럼 대비되는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순간, 모골이 송연해지는 각원이었다.
“……뭐야, 쫀 거야? 에이, 그럼 안 되지. 그 땡중한테 미안해지잖아.”
그게 무슨.
땡중은 무슨 말이고, 미안해진다는 건 또 무슨 뜻인가.
어리둥절해하는 각원을 바라보며 천무린은 손을 털면서 가벼이 말했다.
“아직 제대로 못 봤을 테니, 제대로 한 번 봐.”
이 녀석에게 가르침을 주면 한 단계 진일보할 것이다.
굳이 소림에게 좋은 일을 시켜 줄 필욘 없지.
그러나.
「 시주! 날 봐서 소림 좀 잘 봐 달란 말이오! 」
저, 저 땡중 같으니라고. 내가 뭐라고 소림을 키우고 어쩌고 하는 건 말도 안 될뿐더러.
8기 후보생들을 쭉 훑는 눈에 벌써 피로함이 어렸다 사라졌다.
저 코흘리개들 키우는 것만 해도 나는 벅차다.
각원이 보여 주는 부동심과 자세로 보아 그는 다음 소림을 이끌어 갈 녀석이 틀림없었다.
그런 녀석에게 선물 하나 정도는 줄 수 있었다. 천각대사를 생각해서라도.
각원의 귓가에 울리는 말은.
「 나한권, 복마권, 금강복마권, 아라한신권…… 백보신권마저도. 」
‘전음입밀?’
오로지 각원에게만 전달되는 전음을 펼치는 천무린이었다.
놀란 각원과는 달리, 허리춤에 자리 잡은 천무린의 오른손은 평범하기 짝이 없게 주먹을 천천히 쥘 뿐이었다.
「……모든 마를 무너뜨리라는 달마, 그놈의 깨달음을 표현한 이는 천각 그 양반 단 한 명뿐이었지. 그 심득을 평생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노력해라. 그 뜻에 다가가게 되면 비로소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이해하게 될 터이니. 」
쿠웅!
진각의 울림이 각원의 온몸을 짓눌렀다.
꾸국. 꾸구국!
각원의 두 다리에 들어간 힘이 무색할 만큼 청강석을 파고들 정도로 막대한 중압감이 느껴졌다.
쿠웅!
“무, 무슨 중압감이!”
중심을 잡느라 고갤 들지 못했던 각원이 이를 악다물며 천천히 고개를 들자, 눈앞에 쏟아지는 거대한 권의 형상.
이것은 흡사.
부처의 손바닥이라는 여래신장(如來神掌)을 주먹의 모습으로 나타낸 것이 아닌가.
“마음만 먹으면, 네가 뻗는 모든 것을 부처의 뜻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거대한 권(拳)의 형상이 각원을 덮치는가 싶더니 이내 그것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파아앙!
그저 비무장을 가득 메운 파공음이 스쳐 지나가며 각원의 몸이 주춤하더니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털썩.
“끄으윽.”
직접적인 타격은 각원에게 닿기도 전에 사라졌으나, 그 기운과 동시에 나직한 천무린의 한마디, 한마디가 각원의 전신을 휩쓸었다.
아직은 그가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의 기운과 깨달음.
파공음과 동시에 사라진 그 기세는 각원의 전신을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두 무릎을 꿇은 각원의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크나큰 충격에 눈과 귀, 코와 입에서 핏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저 천무린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 그는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금빛의 기운은 온데간데없어지고 힘없이 스르륵 무너져 내릴 뿐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본 천무린이 호흡을 불어 냈다.
그와 동시에.
꿈틀.
천무린의 단전에서도 역근경의 기운이 꿈틀거린다.
‘……대반야능력에 반응한 것인가.’
역근경이 그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닌 데도 움직이는 경우는 여태 단 한 가지 경우밖에 없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금제가 발동했을 때만 움직이던 녀석이.’
하긴.
역근경을 익힘으로써 얻은 깨달음을 전해 주었으니 움직였을 수도.
별다른 이상함을 느끼지 않은 천무린은 가벼이 몸을 푼 것처럼 서 있을 따름이었지만, 비무장 위를 바라보는 이들은 달랐다.
“…….”
그 광경을 황망하게 바라보는 비무장의 관중들 사이에서는 무거운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거대한 풍압이 각원을 휩쓸어 버리는가 싶더니 무너지는 각원의 모습을 보고 말았다.
이게 무슨. 당최 무슨.
“…….”
각원이 보여 주는 금빛 기세에 환호하던 관중들은 어느새 침묵으로 일관한 자세를 취했다. 결코 바라던 결승의 장면은 아니었기에.
어찌 보면 백리무영 때보다도 소란 없이 끝나 버린 경기.
발길질 한 번, 주먹질 한 번.
그리고 몇 마디 나누는가 싶더니 허무하게 끝나 버린 시합.
누가 이것을 결승이라고 생각하겠는가.
무거운 정적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 이 정적을 깨 주기만을 바랄 뿐.
마침내 그 정적을 깬 것은 비무장 위에서 벌어진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본 책임감 있는 한 사람이었다.
“……제1조 비무장, 사천무관 천무린 승리.”
하후성이었다.
그의 말 한마디에 사람들은 그제야 가출했던 정신을 애써 붙잡으며.
짝, 짝, 짝짝짝!
짝짝짝짝짝짝!
하나둘 박수 소리와 함께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아아아! 천무린! 천무린!”
“사천무관이 또 우승을 가져갔다!”
“사천! 사천! 사천!”
7기수의 사일검룡 이백.
8기수 천무린.
결국 두 기수 모두 사천무관이 우승을 따냈다.
만년 꼴찌에 불과했던 사천무관의 눈부신 약진은 관중들에게 가슴 뛰는 설렘과 기쁨, 환호를 가져다주었다.
매번 같은 결과로 진부하고 시시하게 느껴졌던 비무대회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떠나가라 사천무관과 천무린을 연호하던 관중들을 보고 후보생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말이야. 왜 무린이는 아직도 별호가 안 생긴 거지?”
“원래 유명해지면 생긴다고 하지 않았나?”
“심지어 우승자인데.”
“신기하네.”
여전히 그의 별호는 딱히 없었다.
사실 천무린은 그 어떤 비무에서도 제대로 된 무공을 펼쳐 보인 적이 없었으니까.
사일검법으로 맹공을 펼쳐 이백처럼 사일검룡이라는 별호를 붙일 수도.
매화의 정수를 보인 백리 성씨의 형제처럼 매화쌍절 같은 별호를 붙일 수도.
송무와 남사익처럼 자신들의 무공으로 저력을 보인 별호로 부를 수도 없는.
애매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어설프게 별호를 붙였다가는 되레 그를 욕하는 꼴이 된다.
그것을 아는 호사가들이 몇 가지의 별호를 붙이기는 했지만, 그 파급력이 그리 크진 않아 보였다.
거기다.
“별호오오오? 그딴 게 왜 필요해? 쓰잘머리도 없는 거! 차라리 곡료나 돈을 줘!”
낙양에서의 두몽 사건 이후, 금전에 대한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은 천무린은 대놓고 금전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미친, 정파의 협치를 자처하는 녀석이 불량 식품이나 돈을 달라고 한다고?”
황태의 말에 설화린이 고개를 젓는다.
“미친놈 맞아요. 결승전에 나가기 전에 곡료만 4병을 입에 털어 넣고 나갔으니까.”
“와하하, 그걸 또 왜 말하고 그러냐, 넌. 쑥스럽게!”
칭찬 아니야! 이 미친놈아!
쑥스러워하는 천무린을 바라보면서 기가 막혀 입을 떡 벌리는 후보생들 뒤로.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곡료라고?”
노기를 띤 음성에 머리를 긁적이던 천무린이 딱 굳었다.
끼긱.
어색한 표정으로 고갤 돌려 바라본 곳에는.
본래의 별호인 야차(夜叉)의 모습을 한 악교운이 몽둥이를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으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