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화
제79화
익숙한 선매청고 초식이다.
백리무영도 수십, 수백 번 펼쳐 온 초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찰나의 순간에 뻗어 오는 매화의 결에 담긴 선매청고라는 초식을 백리무영은 다르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같은 검법, 같은 초식을 익혀도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고 이해하는 것이 다르며 펼쳐 내는 것 또한 다르다.
은연중에 가볍다고 생각했던 매화의 결이 내려치는 순간, 심장을 옥죄는 압박감과 동시에 백리무영을 휩쓰는 매화의 바람.
수십 개의 매화는 이내.
스스스슷!
수십 개의 검영으로 변화해 빠져나갈 구멍조차 없게 만들었다.
백리후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그 순간,
파앙! 팡! 파파파팡!
십사수매화검법(十四手梅花劍法).
매화란구주(梅花亂九州).
좁혀 들어오는 백리후의 모든 매화가 일시에 공기 터지는 소리와 함께 터져 나갔다. 마치 방벽에 부딪혀 튕겨 나오는 것처럼.
벌떡.
매진산이 일어나 두 눈을 크게 떴다.
“……매화란구주라고!”
매화란구주(梅花亂九州).
십사수매화검법 중 정수이자 오의라고 불리는 초식. 얼떨떨한 표정을 보이는 매진산의 모습처럼 다른 이들 역시 감탄을 토해 냈다.
그 초식을 펼치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저토록 변형하여 펼쳐 내다니.
이게 무슨.
백리후가 검을 다시 잡은 찰나,
파앙!
공기 터지는 소리가 백리후의 귀를 먹먹하게 만든다고 느낀 순간,
후우웅!
턱.
포탄처럼 쏘아진 백리무영이 어느새 백리후의 앞을 점하며 검을 툭 하고 그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정말 죽을 뻔했네.”
준수한 모습이 온데간데없어진 그는 단정하게 묶여 있던 머리가 산발로 흩날렸고, 온몸은 매화의 검결에 찢기고 베이고 상처가 나서 흡사 광인(狂人)처럼 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상처 하나 없는 백리후와 대비되는 모습의 백리무영이 조용하게 말했다.
“아슬아슬했다.”
그 말에 백리후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바득.
졌다. 비긴 것도 아니고 패배했다.
이기기 위해서 그토록 미친 듯이 노력했건만.
손바닥이 터져 핏물이 배어도 검을 휘둘렀고, 또 휘둘렀다. 백리무영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생각한 그 순간부터 노력만큼은 절대 그에게 지지 않겠다고 그토록 다짐했는데.
꽈악.
이를 가는 백리후의 모습에 백리무영이 조용히 검을 납검(納劍)했다.
백리무영은 백리후의 모습에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았다. 패배의 쓰라림은 혼자 이겨 내야 하는 것이니까.
어설픈 동정은 되레 큰 상처만 줄 테니까 말이다.
“……제2조 비무장, 사천무관 백리무영 승리!”
백리후는 아무 말이 없었고, 백리무영은 담담히 걸어 내려왔을 뿐이었다.
* * *
“……으음.”
뒤척이며 눈을 슬며시 뜨는 설화린이었다.
일어나 보니 침상의 옆에 엎드려 곤히 자고 있는 인영이 보였다.
“……소소?”
낭소소였다.
꿈틀.
인기척에 비척대던 낭소소가 졸려 보이는 눈을 비비며 크게 하품을 했다.
“일어났어?”
“소소가 왜 여기에 있어요?”
“무리한 널 걱정해서 악 교관님이 네 옆에 있어 주라고 부탁하셨지.”
“아……. 그랬군요. 고마워요.”
“고맙긴 뭘.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하암.”
하품으로 인해 졸린 눈가에 맺힌 이슬을 닦아 낸 낭소소는 양팔을 쭉 앞으로 당겨 크게 기지개를 켰다.
“……아직 비무대회가 끝난 건 아니죠?”
“아, 아냐. 이제 남궁호랑 송무가 붙을 텐데. 당지운이랑 각원도 붙을 거고.”
“그래요?”
정말 얼마 안 됐네.
고개를 끄떡이던 설화린이 침상의 이불을 걷어 내며 낭소소와 함께 천천히 비무장으로 향했다.
“너 그렇게 쓰러지고 다들 얼마나 놀란 줄 알아? 남사익은 지가 그렇게 만들어 놓고도 어쩔 줄 몰라 하더라니까.”
“져서 아쉬운 걸요. 그렇게 노력했는데.”
“그랬어? 근데 어느 정도 목표한 바는 이룬 거 같은데.”
“네? 그게 무슨…….”
“아니, 뭐. 그냥……. 호호, 근데 아무것도 기억 안 나는 거야?”
“뭐가 말이에요?”
“응? 여기 올 때 무린이한테 업혀 왔잖아.”
에?
원래 훅 들어오면 사람은 말문이 턱 막히는 법이다.
말문이 막힌 얼굴로 우물쭈물하는 그녀를 바라보던 낭소소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답 안 해도 돼. 표정으로 이미 다 말했네. 나 참, 너무 노골적이어서 모른 척할 수도 없겠어.”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아무튼. 너 쓰러졌을 때 제일 먼저 뛰어 올라온 녀석이 그 녀석이야.”
“설마?”
“설마는 무슨 설마야. 천무린, 그 녀석이 너 쓰러지고 업고 와서 여기 눕혀 놨는데 기억 안 나?”
기억이 날 리가.
그저 기억나는 것이라곤 마지막 온기 정도뿐.
“……그 사람이 왜요?”
“모르지. 네가 너무 노골적으로 쳐다봐서 그런 건 아닐까?”
노골적이라니.
설화린이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 낭소소를 바라봤다.
그 표정에 낭소소가 기가 찬다는 듯 말했다.
“……혹시, 정말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네.”
“너 전혀 티가 안 난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모르는 사람이 없어. 네가 무린이 좋아하는 거.”
화아악.
그 말에 설화린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시뻘겋게 변했다.
터질 듯이 붉어진 얼굴에 화등잔만 해진 두 눈, 벙찐 표정.
삼박자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설화린의 모습에 낭소소는 그만 혀를 찼다.
“정말 가관이다, 정말로.”
“……제, 제가 무슨, 그 사람을 좋아한다고 그, 그래요?”
“왜 그렇게 떨어. 안 잡아먹으니까 천천히 말해 봐.”
낭소소가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호흡하는 모양새를 띠었다.
“……진짜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어. 난 전혀 티 내지 않았다고.
그리고 내가 무슨 그 사람을 좋아한…… 다고.
“내가 그 인간을 뭘 좋아하냐며 마음속으로 부정하고 있지? 에휴. 쯧쯧.”
낭소소의 말에 설화린이 화들짝 놀라며 한 걸음 물러났다.
“그, 그걸 어떻게?”
“생각해 보자, 우리. 훈련받을 때부터 조별 과제에, 대결 평가, 비무대회 때까지 혹시 네가 무린이 옆에 없었던 적 있어?”
“당연히 있……!”
그런 적 없다. 그러니까 옆에 없었던 적이 없었다.
……어쩌다 이렇게 치명적인 일을.
눈을 질끈 감는 설화린이었다.
진짜 어쩌다.
이제 동기 후보생들의 얼굴을 대체 어떻게 보라고.
* * *
하아암?
중원 무림에서 가장 낙천적이고 태평한 작자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8기 후보생들은 당연히 눈앞에 있는 사람을 지목할 거다.
“왜 또 날 쳐다보는데?”
“곧 비무대회 결승인데, 긴장도 안 되냐.”
“긴장은 무슨. 조금 있다가 돈 가지러 갈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돈? 무슨 돈?”
그런 게 있어, 인마. 어린놈들은 몰라도 돼.
낄낄.
광대가 승천하는 천무린과 달리, 어두컴컴한 곳에 있는 공야찬과 조수강은 저도 모르게 오한이 들었다.
“다음 경기는 누구라고?”
“송무랑 남궁호. 그리고 당지운과 각원.”
“이야, 재밌겠는데?”
태연자약한 천무린의 말에 태강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정말로 송무가 이길 수 있을까? 창천검룡 남궁호인데…….”
“황태까지 꺾였지. 손도 제대로 못 써 보고.”
“송무가 아무리 강해도 황태를 단숨에 제압하진 못하잖아.”
태강의 말에 진무양과 명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겠지?”
“뭐, 배운다 생각하고 말겠지. 송무도.”
후보생들의 대화 사이를 파고드는 신경질적인 음성.
“쯧. 배우긴 뭘 배워. 여기가 무관 훈련이냐? 배우게.”
천무린이었다.
“뭔 검질을 한다는 놈들이 벌써부터 합리화 같은 거나 하고 자빠져서는 납득하고 있어? 남들은 안 해 주는데 스스로 말이야. 그렇지?”
“응?”
“지면 두 다리 뻗고 자는 게 참 쉽다. 그렇지?”
태강은 천무린의 손등에 핏줄이 솟는 걸 보고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아직 그걸 모르는 진무양과 명진은 의아해하며 바라봤다.
“상대가 좀 강할 거 같으니까 꽁무니 빼는 게 참으로 합리적이야. 그렇지? 저렇게 해도 나쁘진 않아.”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신혁건이 온몸이 누더기가 된 채 쓰러져 있었다.
“혀, 혁건아?”
쟤는 왜 저러고 있담.
설마.
“어휴, 아주 그냥 무관 가서 제대로 손봐 주려고 했더니 화딱지가 나서 못 참겠더라고.”
“…….”
그래서 그냥 패 버렸다고?
신혁건이 비무장에서 고의적으로 패배했다고.
“만약에 기권이라도 했었어 봐. 저렇게 때리는 걸로는 안 끝났지.”
목 안에 가시가 걸린 듯 진무양과 명진도 그제야 분위기를 깨닫고 한 걸음씩 물러났다.
“그런데 말이야. 다행인 줄 알아. 오늘은 내가 저 녀석 때문에 넘어가 줄 거니까.”
응? 저 녀석?
천무린의 시선을 좇아 세 사람의 고개도 빙글 돌아갔다.
저벅, 저벅.
……어?
송무였다.
“송무야!”
“며칠 못 봤는데, 왜 이리 홀쭉해졌어?”
“야윈 거 같은데?”
세 사람의 반가운 목소리에 송무가 마주 웃었다.
“나도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는지 몰랐어. 눈 깜짝할 사이에 가더라고.”
그렇게 말하던 송무는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찾았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황태는 어때?”
그 와중에도 황태 걱정부터 먼저 하는 송무였다.
“괜찮아. 그 녀석 아까 비무도 구경하고 잠시 쉬러 갔어.”
“멀쩡하니까 걱정 말아.”
황태를 찾는 송무를 기꺼워하는 태강과 진무양이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그들에게도 송무는 대단한 녀석이었다.
비록 천무린으로 인해 바뀌었다고 하나.
다년간 괴롭힘을 당한 것을 용서했을 뿐 아니라 실력으로 황태를 꺾어 그의 사과를 받아 냈다. 말이 쉽지 누구나 쉬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이제는 황태를 걱정해 그의 안부를 묻는다.
……정말 대단하다고 말할 수밖에.
황태의 상태가 호전되었다는 소식에 송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태강과 진무양, 명진에게 미소를 보였다.
그 와중에,
“……제1조 비무장, 사천무관 송무! 산동무관 남궁호!”
하후성의 육합전성이 비무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나, 다녀올게.”
그렇게 말하는 송무의 시선이 천무린과 마주했다.
호오, 제법인데?
“……곧 네 차례다. 집중 잘하고 다녀와.”
천무린의 말에 송무가 싱긋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다녀올게.”
저벅, 저벅, 저벅.
비무장으로 올라가는 송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천무린은 절로 새어 나오는 미소를 굳이 숨기지 않았다.
“……보여 주고 와. 종남의 검을.”
천무린은 송무의 뒷모습에서 정마대전 당시 종남의 장문인 종남검성(終南劍聖) 진곤의 모습을 떠올렸고, 동시에 늘 자신과 함께 전장을 휩쓸었던 전우도 함께 떠올렸다.
「 절대 포기하지 않소. 」
「 다녀올게, 무린. 」
종남의 개파 이래 당시 검술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고 할 정도로 강력한 검술을 구사하던 진곤의 의연한 모습이 보이다니.
다 컸네. 자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