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제76화
“……아미타불.”
쓰러진 각신에 대해 혜공은 평소에 볼 수 없었던 침음을 흘렸다.
소림이 졌다는 게 충격이 아니라, 진 게 각신이라서 충격을 받은 혜공이었다.
철권(鐵拳) 각신은 소림에서도 밀고 있는 유망한 후기지수였으니, 혜공이 받은 충격은 아주 컸다.
“무량수불, 믿기 힘든 결과로군요.”
청강진인의 말에 섬서무관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러나.
“……아미타불, 이 또한 지나가리라 믿습니다. 각신 또한 이를 통해 얻은 것이 있겠지요. 나아가려면 어찌 풍랑 없이 성장할 수 있겠습니까.”
혜공은 역시 혜공이었다.
“과연.”
청강진인은 혜공의 말에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릇 무인이란 고난과 역경을 헤쳐 나가야 비로소 진정한 무인으로서 성장할 수 있다. 온실 속 화초로 자라난 무인이 어찌 진정한 무인이 될 수 있겠는가.
앞을 가로막는 벽을 느끼고 절망하면서도 다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힘을 깨우치고, 그 벽을 허물어 깨달음을 얻어 가는 것.
그것이 진정 무인의 길이 아니던가.
“……삼라만상(森羅萬象)의 뜻이 혜공 대사의 말에 모두 담겨 있는 듯하니, 저는 다시 한번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 같은 청강진인과 혜공 대사의 모습을 바라보던 남궁도는 그만 갑갑함을 느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러니 나와 맞질 않지. 말을 해도 도가 왈, 불가 왈 해 버리니 나 원 참. 당 관주는 당최 어디 갔는지 모르겠구려.”
호방하고 걸걸한 남궁도의 입장에서는 매사에 진중하고 알아듣기 어려운 말만 골라서 하는 혜공과 청강진인보다는 당백진과 어울리는 편이 차라리 나았다.
그래도 당백진은 저리 답답하게 굴진 않았으니까.
“세 관주께서는 참으로 여전하시구려.”
“호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잘 오셨소. 당 관주.”
때맞춰 등장한 당백진이 반가운지 남궁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니, 글쎄. 생각해 보시오. 언제부터 도가와 불가가 그리 친했다고 저리도 서로를 이해하고 돈답니까.”
그러면서 자신의 말이 맞지 않느냐는 듯 턱을 치켜드는 남궁도였다. 그 모습에 당백진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그저 어깨를 으쓱일 따름이었다.
“친하진 않아도 서로에게 득이 됐지 실이 되진 않을 관계 아닙니까.”
“허 참, 갑갑한 소릴. 됐고, 7기수가 우승하여 기분이 좋으시겠소.”
직설적이고 도발적인 말투에 당백진은 잔잔한 미소를 유지하며 눈앞에 놓인 차를 홀짝였다.
“전체 우승도 아니고 고작 1차전에서 이긴 걸 가지고 좋다고 거들먹거리겠습니까. 이제 시작인 것을.”
“……허, 전체 우승? 아니, 당 관주가 이번 시합으로 인해 자신감이 아주 많이 붙은 모양이오?”
기가 차다는 남궁도의 표정에 당백진은 너스레를 떨었다.
“자신감이 아니라 증명해 낸 것 아니겠습니까. 8기수만 하여도 그렇소만.”
8기수 역시 사천무관 후보생들이 최후의 10인에 대거 진출했음을 지적한 말이었다.
그 말에 남궁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이내 코웃음을 친다.
“흥! 과연. 내 손주에게는 미치지 못할 것이외다. 이래 봬도 손주만 한 놈은 본 적이 없기에.”
남궁호를 언급하는 남궁도는 그저 손주를 사랑하는 팔불출 같은 할아버지에 불과했지만.
당백진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남궁도를 바라본다.
“허어, 남궁 관주. 다른 섬서무관의 후보생들과 산동무관의 후보생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까?”
그러면서 은근슬쩍 청강진인을 바라보는 당백진이었다.
그 시선에 들어온 것은 남궁도의 말에 불쾌감을 드러내는 청강진인의 모습이었다.
“……아니, 그게 무슨!”
“무량수불, 남궁 관주의 눈에는 들지 못한 섬서무관에는 종리삭 후보생도 있었구려.”
종리삭. 무당파의 종리삭 역시 천무린의 한 방에 나가떨어져서 그렇지, 본선에 오르기까지는 완전무결한 태극검을 보여 준 후보생이었다.
그런데 지금 남궁도의 발언으로 수많은 후보생들이 무시를 당한 셈이 되었다.
당백진은 그 점을 정확히 짚었고, 그에 청강진인은 숨기지 않고 불쾌감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었다.
어찌 보면, 8기 후보생 중에 최후의 10인에 진출한 인원들 중 무당과 관련된 인원만 쏙 빠져 있지 않은가.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자신이 실언했음을 깨닫고 당황하는 남궁도의 옆에서 쉴 새 없이 말하는 당백진이었다.
“산동무관의 탁궁 후보생, 팽한월 후보생…… 수없이 많은 후보생들이 우승 후보로 점쳐 졌는데 말입니다. 참으로 안타깝소. 아직 꽃도 피우지 못한 후보생들도 꽤 많을 텐데 말이오.”
“……당 관주.”
남궁도는 자신이 당백진에게 당했음을 깨닫고 한 소리 하려 했으나,
“8기수 시합이 시작되려나 보오. 참으로 기대되는구려.”
그 말을 대번에 끊어 버리는 당백진이었다.
부글부글.
이 독사 같은 놈.
내 손자에게 모두 처참하게 밀리고 나서도 그리 여유로울 수 있는지 두고 보자!
속에서 열불이 나는 남궁도였다.
* * *
“8기수 최후 10인의 시합을 시작하겠습니다. 제1조 비무장, 사천무관 설화린, 사천무관 남사익!”
……첫 번째 시합부터 아주 볼만하겠는데?
“어이! 사랑싸움도 비무대회에서 하면 공공연하게 알려지는 건 아니고?”
“와아! 사익이 봐라. 좋아서 죽으려 한다. 비무인데, 왜 저렇게 좋아하는 거야?”
후보생들 사이에서는 이미 남사익의 순애보적인 짝사랑은 아주 유명했다.
물론 따라다니는 남사익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설화린 역시 유명했고 말이다.
“이번엔 꼭 사랑을 쟁취해라!”
“그냥 비무장 위에서 고백해 버려!”
“푸하하하!”
8기 후보생들은 남사익에게 소리치며 응원했고, 남사익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해맑은 얼굴로 비무장에 올라섰다.
타오르는 적발과 탄탄한 몸, 그리고 남자답게 생긴 얼굴까지 남사익은 자신에게 부족함이 전혀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고, 이번에야말로 설화린의 마음을 훔쳐 오리라 다짐했다.
“……설 소저.”
아련한 눈빛을 보내는 남사익의 반대편에서는 설화린이 풀어헤친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있었다.
“그놈의 소저란 호칭은 빼라고 했죠. 여긴 모두가 동일한 무관에 입관한 후보생이에요.”
“하하, 설 소저. 설산 속에 피어난 꽃 한 송이는 아름답기 마련이오. 괜히 그대에게 빙화(氷花)라는 별호가 붙은 건 아니지 않겠소. 태초부터 남해와 북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이지 않소. 이제 그만 내 마음을 받아주고 내게 오는 것이…….”
스르릉.
청산유수처럼 이어지는 남사익의 말에 설화린은 조용히 검을 빼 들었다.
“저는 저보다 약한 이에게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어요.”
단호하게 일축해 버리는 그녀의 냉담한 반응에도 남사익은 여전히 여유로운 반응을 보였다.
“호오, 그 말대로라면 내가 그대에게 이기면 내 마음을 받아주겠다, 그 말이오?”
“……내가 당신에게 질 것 같나요?”
설화린은 검을 고쳐 잡으며 자세를 잡았다.
그런 그녀의 시선은 비무장에 있는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곁눈질로 열심히 찾았으나, 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흥, 다른 후보생들 비무는 잘도 지켜보면서 이럴 때만 없다니.
괜스레 아랫입술을 꽉 깨무는 설화린의 모습에 남사익은 두 손을 불끈 쥐었다 펴면서 자신감을 내비쳤다.
“내가 숙녀에게는 손을 쓰지 않지만, 그대의 마음을 차지하기 위해 오늘만 손속을 과하게 써 볼 생각이니 부디 양해해 주시구려…….”
능글거리는 말투의 남사익에게 설화린은 검 끝을 세웠고, 준비된 두 사람의 모습을 본 하후성은 곧바로 비무를 시작하라고 외쳤다.
카강!
그리고 그 모습을 단상 위에 앉은 두 사람이 흐뭇한 얼굴로 지켜봤다.
설화린을 꼭 빼닮은 신비로운 은발에 나이가 들어 주름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꽃중년 같은 인물과, 남사익의 붉은 머리칼과 꼭 닮아 누가 봐도 남해태양궁의 인물임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자리에 나란히 앉아서 호탕하게 웃고 있었다.
“참으로 기껍기 짝이 없소. 저토록 장성하여 검을 맞대고 있는 모습을 보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소.”
“저 또한 그렇소이다.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 아닌가 싶소. 두 사람의 뜻이 맞는다면 사천무관을 졸업하기 전에 혼인을 올려도 무방할 듯하오.”
“허허, 좋소. 두 사람의 뜻을 들어 보고 함 추진해 봅시다.”
북해빙궁의 궁주 설종량과, 남해태양궁의 궁주 남선은 설화린이 들었다면 복장 터질 소리를 하면서 흐뭇하게 웃으며 비무를 관전할 따름이었다.
채앵!
비무장에서는 쇳소리가 울려 퍼지며, 설화린의 검에 차가운 한기가 서렸다.
쩌저적!
빙백신공이 설화린의 검에 담기며 빙백검을 펼치는 그녀였다.
북해빙궁의 직계만이 익힐 수 있는 빙백신공과 빙백검은 그녀가 펼칠 수 있는 최고의 무공이었다.
남사익은 절로 오한이 드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녀의 성취에 탄성을 내질렀다.
“좋소, 아주 좋소. 빙백신공이 5성의 성취를 이루어야 검에 냉기를 품을 수 있다고 들었소. 그대의 성취에 실로 크게 탄복하는 바이오. 그러니 나도 숨김없이 최선을 다해야 그대에게 이길 수 있을 듯하구려.”
그리 말하는 남사익의 검은 검 끝에서 검면에 이르기까지 조금씩 붉은 기운을 띠었다.
설화린의 것이 서늘하다 못해 모조리 얼려 버릴 듯한 빙공(氷功)이라면, 남사익의 것은 모든 것을 태워 버릴 열공(熱功)이자 화공(火功)이었다.
두 사람의 기운이 비무장 위에서 서로 뒤엉키며 이를 지켜보는 관중의 감탄을 자아냈다.
“과연, 새외이궁! 북해빙궁과 남해태양궁의 무공 또한 대단하이.”
“암, 그렇고말고. 절로 감탄하게 되는구려. 심지어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 대비되니 북해와 남해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것 같소.”
“신비롭다 못해 경이로울 지경이라오.”
설하린의 귀에는 남사익과 관중들의 순수한 감탄이 일절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가 빙백신공을 5성 경지까지 도달하기 위해 죽어라 노력하고 고생한 이유는 단 하나.
인정받기 위해서였다.
누구에게?
단상 위에 있는 아버지인 설종량?
아니었다.
오로지 한 사람.
사람이 원체 무식하게 구는 데다 예의도 없고 말도 경박하고 할 줄 아는 거라곤 무공밖에 없는 듯하지만, 그 누구보다 마음이 깊고 하해(河海)와 같은 사람.
고갤 돌려 바라보니,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비무장에서 내려오면서 태연하게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한 사람.
‘……저 사람도 시합 중이었구나.’
그래서 보이지 않았던 건가.
비무를 하면 한다고 미리 말이라도 해 주지.
설화린은 괜스레 그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고 자꾸만 그를 찾게 되는 것이 아직 그에게 실력을 인정받지 못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 그에게 인정받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인정받을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