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화
제75화
사천무관 건립 8주년이다. 그동안 말썽을 피우는 후보생이나 생도, 말도 안 되는 패악질을 부리는 이들이 어디 한둘이었을까.
심지어는 제 뒷배경을 믿고 까불던 생도도 더러 존재했다.
그럴 때마다.
사천무관주 당백진은 모조리 찍어 눌렀다.
서슬 퍼런 그의 기세에는 그 어떤 뒷배경도 하잘것없었고, 의미 없었다.
당백진이라는 이름 석 자만으로 정파 무림에서 그를 손가락질하고 비난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무림맹주 독고황 정도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 그에게.
“……무, 물질?”
허허, 정파 무림인으로서 협객행을 치르며 의와 협을 중시해야 할 덕목으로 반드시 갖춰야 하는 후보생의 입에서 지금 물질적인 것을 내놓으라는 말이 나오다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재능을 믿고 너무 오냐오냐해 줬더니 이런 오만방자한 발언을 서슴없이 하는 거 아닌가…….
당백진은 압도적인 실력으로 8기의 승리를 이끌던 천무린에게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보여 줌으로써 겸손이라는 덕목을 가르치려 했다.
그것이 이 후보생의 앞길을 더욱 창창히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허허허.”
그래서 웃음기를 머금었지만, 그의 몸에서 솟구친 기세는 오로지 한 곳을 향했다.
악교운마저도 그 기세에 짓눌리면 찍소리도 못 하는 기운 중 일부를 말이다.
그런데.
천무린은 아무렇지 않은 듯 그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음?
좌중을 압도하는 기세 중 일부를 쏟아 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웃고 있다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나다, 이건가.’
상상 이상이다. 오만해도 될 정도라고 여겨지는 당백진이었다.
그러나 이런 당돌하고 제 잘난 맛에 사는 놈이라면 제대로 찍어 눌러서 초장부터 버르장머리를 고쳐야 했다.
꾸욱. 꾹. 꾸욱.
천무린의 전신을 감싸는 중압감이 더욱 배가되어 그를 찍어 누르기 시작했다.
후후.
이젠 숨도 쉬기가 어려울……. 어?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다.
고작 17세의 후보생이 만독암제 당백진의 기세에도 전혀 굴하지 않는다고?
“괘, 괜찮은 겐가? 자네.”
혹여 걱정되어 천무린에게 말을 걸었더니.
“……응?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아, 혹시 무관주님이 고작 17살 후보생에게 훈계한답시고 막 기세를 퍼뜨려서 찍어 누르려고 했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지요?”
……이 새끼, 가 아니라 이놈은 대체.
당백진의 눈이 당혹감으로 물들어 갔다.
‘아니, 이 새끼가 노망이 났나. 지금 17살한테 이 정도 기운을 내뿜는 게 말이나 돼?’
제아무리 천무린이라고 할지라도 정파 무림 최고수인 당백진의 순수한 기세를 맨몸으로 받아 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다만 그 기세를 몸 전체로 받아 내는 것이 아니라 기운을 그저 흘려보내는 정도는 가능했다. 물론 그조차도 기의 운용이 천부적으로 타고난 이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이미 기의 운용과 내공에 대한 이해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무린이 아니던가.
무언의 기운에 대한 압박감에 심장이 짓눌리는 것 같았음에도 불구하고 태연하게 그 기운을 운용하여 발바닥을 통해 땅에 분산시켜 버린 천무린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모르는 당백진으로서는 천하제일의 기재처럼 보일 수밖에.
무림에 입문하여 정파 최고의 고수가 되기까지 온몸을 내던져 가며 집념을 불사른 당백진이 만난 고수가 몇 명이었고, 생사투를 벌인 이가 몇 명이었겠는가.
못해도 수백은 족히 넘었을 터였다.
그중 말도 안 되는 괴물들과 천재들도 만나 왔지만.
‘이건 궤를 달리한다. 내 예상이 한참 빗나갔어.’
7기수 우승자인 이백 역시 혀를 내두를 만큼의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방금 천무린이 보여 주는 이 모습은 말 그대로 초월적인 재능을 가진 이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했다.
“그래서 이제 시험은 다 끝난 건가요?”
“크흠……. 시험이라니. 그보다 물질적인 것이라 함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지 들어나 볼까?”
볼수록 탐났다.
악교운이 누누이 이 후보생에 대해 거론했고, 자신 역시 무관 때부터 관심은 가지긴 했지만, 그래도 그것은 관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건만.
거기다 남들이 가진 뒷배경도 없었다. 그래서 더욱 탐이 났다.
그래, 자신의 제자가 되면.
내 제자로 키울 수만 있다면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은 이미 따 놓은 당상이 아닌가.
사천당가는 외인을 제자로 키우기에는 거쳐야 할 관문이 매우 많았다.
기본적으로 당씨 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외인은 당가의 비전절기는 물론이거니와 제대로 된 무공 체계를 학습할 수 없었다.
그것은 비단 사천당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오대세가 전체가 갖고 있는 특성이자 규율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규율마저도 깨부술 생각을 하고 있는 당백진이었다.
당백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지도 모른 채 천무린은 그저 생글거리며 제 할 말을 할 뿐이었다.
“음, 뭐 무관주님은 사천무관의 관주이기 이전에 당가의 태상가주님이 아니십니까?”
응? 당가?
안 그래도 당가에 관심이 있을까 했건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이 녀석도 당가에 흥미가 있었던가. 그렇다면 오히려 말하기가 편하지.
사천당가의 위대함을 알려 주고 태상가주의 제자가 된다면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는지 알려 줘야겠다.
그러면 어느 누가 마다하겠는가.
“그렇지. 내가 바로 현존하는 대사천당가의 태상가주지. 커흠.”
“오호! 역시. 사천당가라 하면 전에 오대세가 중에서도 수위를 다퉜고, 구파일방과도 비견해도 전혀 손색이 없지 않습니까.”
제 가문을 칭찬해 주는데, 어떤 이가 좋아하지 않을 리 있겠는가.
당백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러하다. 네 말대로 사천당가는 사천에서뿐만 아니라 정파 무림, 더 나아가 중원 무림에 크나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 어떠냐. 관심이 가느냐?”
지금 이 순간, 당백진의 눈동자에 뜬 열화(熱火)는 오로지 한 후보생에게 향해 있었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악교운은 묘한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천무린의 자질과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본 것은 악교운이었다.
그리고 비무대회를 통해 그의 모습에 확신이 생겼고, 추후에 언제든지 그를 품어 단독으로 그를 가르칠 생각이었다.
물론 천무린이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예, 관심이 가죠. 사천당가에.”
여하튼, 당백진이 저토록 관심을 보이고 천무린마저도 관심이 간다고 말하니 악교운에겐 더 이상 기회는 없을 듯 보였다.
분명 그런 줄 알았건만.
“제가 아까도 말했지만, 원래 독 다루는 곳이 영단도 기가 막히게 만들잖아요? 영초도 잘 다루고.”
으응? 영단이 거기서 왜 나와.
“……무슨.”
물론 당백진의 제자가 되겠다는 투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악교운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입을 벙긋거리려고 하자, 천무린이 어깨를 으쓱인다.
“영단만큼 확실한 보상이 어딨겠어요?”
히죽 웃는 천무린이었다.
“설마 우승까지 하는데, 영단 하나 보장 못 해 줄까.”
천무린이 8기 후보생들을 쭈욱 훑었다.
조기 진급한 3인방과 다수 접점이 있어 천무린이 직접 손을 봐준 몇몇을 제외한 대다수가 이류 극의에 머무른 녀석들.
녀석들에게 부족한 것은 사천검법에 대한 이해도, 사천심법으로 인한 성장 따위도 아니었다.
순식간에 탁기(濁氣), 잡기(雜氣)를 몰아내면서 내공 증진을 시켜 줄 영단이 필요했다.
왜 송무와 태강이 8기 후보생들 중에서도 강한 축에 속하겠는가.
귀구의 알을 입에 하나씩 넣어 줬을 뿐인데도 그 차이를 여실히 보여 주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사천당가에 관심이 있는 이유가 고작 그런 영단 때문에?”
내가 아니라?
이놈아, 지금 사천당가에 대해 자랑했듯이 네가 희망만 한다면 모든 어려움을 무시하고 내가 너를 제자로 받아 주겠다니까!
자존심상 차마 입 밖으로는 내뱉지 못하고 그저 속으로 끙끙 앓는 당백진이었다.
그러나.
“쩨쩨하게 녹독단(綠毒團) 같은 거 말고, 청독단(靑毒團) 정도는 줍시다. 적독단(赤毒團)이면 더욱 좋고.”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하는 천무린이었다.
심지어는 사천당가에만 있다는 영단들을 줄줄이 읊는 천무린의 말에 절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정말 사천당가에 대한 관심이 영단뿐이더냐.”
당백진이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음? 영단 말고 또 뭐가 있나요?”
괜히 맥 빠지는 당백진이었다. 사천당가의 태상가주를 눈앞에 두고, 사천당가가 별 볼 일 없는 가문이 아니냐고 말하는 천무린의 해맑은 웃음이라니.
“허허.”
어질어질한 당백진 앞에 천무린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박수까지 친다.
“아아, 물론 저 그렇게 허술하게 거래하자고 하는 사람 아니에요. 거래 하나는 확실히 해야죠.”
천무린이 엄지와 중지를 들어 보이면서 이를 씩 보였다.
“2번째 시합, 검진(劍陣) 대결에서 역시 이기면 이미 비무대회 전체 우승은 따 놓은 것일 거고요.”
2번째 시합은 악교운이 말해 준대로 각 무관에서 자랑하는 검진의 대결이 될 것이었다. 섬서, 산동 역시 자신들만의 기본 공과 기본 검법을 필두로 마련된 검진으로 나서게 될 터였다.
“……첫 번째 시합에 이어 두 번째 시합까지 완벽하게 이기게 되면 뭐, 말할 것도 없이 청독단은 준비해 주시겠죠?”
청독단. 이름 그대로 푸른색 독단이다. 먹는 순간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무공을 익히지 않은 범인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일 뿐. 무인에게는 내공의 증진으로 이어진다.
물론 독의 기운을 중화하다 보니, 사천당가 무인들이 얻는 효력보다는 현저히 뒤떨어지겠지만 후보생들에게는 그나마 하늘에서 내려오는 동아줄이었다.
독을 다루는 데는 천하제일이라 일컬어지는 사천당가는 독에 대한 내성과 면역을 연구하다가 이제는 의술마저 따라올 자가 없을 만큼 뛰어나게 되었다.
그렇다 보니 사천당가 무인들에게 좋은 방향으로 연구를 거듭한 결과, 수십 가지의 독단과 영단을 제조하였다.
그 과정에서 탄생한 결과물이 녹독단, 청독단, 적독단, 백독단이었다.
“백독단? 아니, 적독단은 바라지도 않아요. 근데 사실 녹독단이나 청독단은 차고 넘칠 거 아니에요. 그러니 적독단 주면 더 좋고.”
악교운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토록 대놓고 영단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다니.
어지간히 미치지 않고서야……. 아, 미친놈이지. 참.
당백진은 천무린의 표정과 반응에 벙쪄 있다가 금세 정신을 차렸다.
그러곤.
“……후우, 좋다. 청독단이라 했느냐.”
“적독단이면 더욱 좋고요.”
“영단을 그리 잘 아는 녀석이라면 적독단의 가치가 얼마인지는 알고 있을 텐데.”
“쳇.”
당백진의 말처럼 적독단은 청독단에 비해 수십, 수백 배는 만들기가 어렵다.
아니, 암만 그래도 사천무관주에 사천당가의 태상가주쯤 되면 적독단 몇십 개는 꿍칠 수 있는 거 아닌가.
쩨쩨한 새끼.
속으로 욕을 많이 했지만, 사실 청독단 수십 개만 해도 금전적으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값어치다.
제아무리 값어치가 떨어지는 영단이라 할지라도 항상 내공 증진에 목말라 하는 무림인들이다. 못해도 청독단 하나에 눈이 멀어 칼부림을 일으키는 이들도 꽤나 있을 테니까.
사천당가가 암기와 독으로 오대세가의 수좌를 다투었겠는가.
의술과 영단을 빚는 기똥찬 방법까지 있으니 내력으로는 어딜 가도 밀리지 않는 문파여서 그렇다.
……이왕 사천무관에 들어왔고, 관주 놈이 당백진인 이상 탈탈 털어서 먼지 하나도 나오지 않게 해 주마.
이 새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