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화
제73화
“소승은 섬서무관의 각신이라 합니다. 아미타불.”
“사천무관의 이백입니다. 각신 생도를 만나 영광입니다.”
후보생을 거쳐 1학년 생도가 되면 그래도 각자의 무관에서 누가 강한지 정도는 귀동냥으로 듣는다.
이백 역시 각신에 대해서 들은 것이 없지 않았다.
섬서무관 1학년 생도의 수업 도중에 등장한 흑도의 무리를 단 두 주먹으로 와해시켜 버린 각신이라고.
“흑사채를 단 두 주먹으로 와해시킨 이야기는 사천까지 흘러 들어와 제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 적이 있습니다.”
그 말에 각신은 길고 가는 눈꼬리를 휘며 처음으로 얼핏 미소를 보이고 포권을 취했다.
“소승 역시 이백 생도와 같은 검호를 만나 영광입니다. 부디 후회 없는 비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둘은 서로에게 언제 덕담을 나눴냐는 듯 금세 공격 자세를 취했다.
왼손으로 반장(半掌)을 취한 각신은 오른손을 허리춤으로 가져다 댔다.
각신은 준비 자세마저도 단단함으로 메워 빈틈없는 모습을 보였으며, 당장이라도 무쇠 같은 주먹을 뻗어 보일 듯 맹렬한 기세를 뿜었다.
그와 반대로,
스르르릉.
느긋하게 검을 뽑는 이백은 평소의 매서운 기세와는 달리 마치 송풍(松風)처럼 유연한 기운을 사방에 퍼뜨렸다.
단단하기 짝이 없는 바위와 같은 기세에 맞서 살랑이는 바람에 그 단단한 바위마저 아우르는 기운이 맞물렸다.
“……너무 무르지 않아요?”
설화린은 단숨에 짓이겨질 것 같은 이백의 기세가 위태로워 보였다. 각신이 단련해 온 저 주먹은 바위도 단숨에 부숴 버릴 기운을 담고 있었으니.
“……제법인데.”
“예?”
“제법이라고.”
“당신이 생각해도 그런가요? 역시 이백 선배보단 각신 생도가…….”
그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천무린은 턱짓으로 비무장을 보라고 가리켰다.
“흥, 불친절하긴.”
“떽떽거리지 말고 지켜봐. 너희도 봐 두면 좋아.”
8기 후보생 모두가 지켜봐야 할 비무였다.
비무가 왜 비무인가.
비무(比武), 즉 무예를 비교한다는 뜻이다. 일종의 대련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데, 그보다는 조금 더 넓은 범주의 표현으로 특히 지금과 같은 비무대회에서의 비무는 일반 비무와 그 궤를 달리한다.
서로에 대한 존중이 기반이 된 비무는 살의를 담지 않으며 서로의 무예를 깔보지 않으면서 최선을 다해 상대를 꺾는 것이다.
그것이 한없이 약한 약자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비무라는 게 진짜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명확히 볼 수 있을 테니.”
8기 후보생들은 천무린의 진중한 음성에 더 한층 진지한 표정을 한 채 비무장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이백의 검이 서서히 들어 올려지나 싶었는데,
움찔.
각신의 오른쪽 어깨가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후우우웅!
어느새 맹렬한 주먹에 담긴 기세가 쏟아져 이백에게 뻗어 왔다.
“……!”
검을 들자마자 뻗어 온 각신의 주먹은 겉으로 보이는 단단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마치 번개처럼 쾌속했다.
그 주먹에서 뻗어 나온 기세는 단순히 정직하게 일로직진이 아닌, 주변을 어그러지게 만드는 기운을 담고 있어 이백은 가까스로 검면으로 그것을 흘려보냈다.
“크읏.”
‘과연 철권. 권에서 뻗어 나온 단순한 압력만으로도 이토록 강인한 기세를 담고 있다니.’
팽완과의 비무를 돌이켜보지 않았다면, 아마 이 무지막지한 권세에 그대로 들이박았을 이백이었겠지만.
“후웁.”
호흡을 고르는 이백의 기세는 여전히 누그러져 있었고, 각신은 이백에게 숨쉴 틈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 맹렬히 몰아붙였다.
그 주먹에 담긴 기운은.
“……어떻게 돼먹은 인간이 벌써 뻗은 주먹에 저토록 강한 풍압이 동반되는 건데!”
“미쳤지. 미쳤어. 죄다 괴물들뿐이야!”
“저러다 죽을 거 같은데……?”
“뭐가 비무야. 저게 말만 비무지, 그냥 조금만 까딱 잘못하면 이 세상 하직하는 거 아니냐고!”
8기 후보생들이 아우성을 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런데도 이백은 이전 시합보다도 못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미치고 팔짝 뛸 수밖에.
“나한권(羅漢拳) 하나는 기가 막히게 익혔네. 너희들도 잘 봐. 소림의 권법 중 기본이 되는 저 나한권 하나만 미친 듯이 파니까 단순한 주먹질에도 저 정도의 힘이 담기잖아.”
물론 기본기 중의 기본기이지만, 실린 내력이 8기 후보생이 감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높다는 것은 비밀이었다.
“……저래도 지켜봐야 할까요? 처참하게 질 모습을요?”
“처참하게 질 패배라도 보면 나름 득이 될 테지만…….”
천무린은 이백의 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웃는다.
“적어도 이번엔 아닐 거 같은데?”
“에?”
매 순간마다 핵심은 말해 주지 않고 빙빙 돌리는 모습에 화딱지가 나지만, 어쩌겠나.
설화린은 미간을 좁히면서 이백의 아슬아슬한 시합을 눈여겨봤다.
주르르륵.
권세를 검면으로 막은 이백은 뒤로 주르륵 밀려나며, 한 움큼 피를 토했다.
“커억.”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검을 들어 상단세를 취했다.
“……후우.”
콰직!
비무장의 단단한 청강석 바닥을 박찬 각신은 높게 도약하였다. 동시에 반장을 취하고 있던 왼손마저도 굳게 주먹을 쥐며 뻗어 냈다.
압박감 역시 배가되어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위험한데.’
하후성은 각신이 펼치는 주먹에 실린 기세를 읽고 이백이 이를 막아 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으리라고 판단했다. 어쩌면 이것이 이백의 무인 인생을 망칠 순간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판단까지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힐끗.
‘……허, 제법인데.’
웃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짓이겨질 듯한 저 주먹에 담긴 기운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정말이지 맹랑한 생도이자 검호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하후성은 들던 손을 멈추고 당찬 사천무관의 생도를 지켜봤다.
그런 그의 기대를 충족이라도 시켜 주듯 이백은 검을 상단세로 취하다가 그 권세에 몸을 던졌다.
질끈.
“어엇!”
“억! 안 돼! 이백 선배! 이 미친놈아!”
“꺄악!”
당장이라도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피를 토하며 무너질 이백의 모습이 눈앞에 절로 그려졌다.
그런데.
……왜 아무런 반응도 없지.
눈을 질끈 감았던 8기 후보생들이 서서히 눈을 떴다.
어?
푸콰아아!
이백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 각신의 온몸이 난자되어 허공에 피를 흩뿌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보법이 참으로 기묘하군요.”
각신은 온몸에서 피 보라가 뿜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표정은 크게 변하지 않았고, 두 주먹은 불끈 쥐어져 있었다.
“유운보법이라 합니다.”
“유운보법이라……. 그 이름과 같이 움직임 역시 참으로 기묘합니다. 그대가 쓰는 검법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듯한데도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것은 아마 깨달음을 얻어 그런 듯하니, 대성(大成)을 축하드립니다.”
각신은 진심을 담아 이백을 칭찬했다.
“감사합니다. 얻은 것이 작아서 대성이란 말을 듣기에도 부끄럽습니다만.”
표정을 찡그리는 그는 호흡을 이어 갔다.
“이것 참, 비장의 한 수였는데 짧은 순간에 임기응변까지.”
비무장을 적신 혈흔은 오로지 각신만의 것은 아니었다.
“쿨럭! 정말 대단합니다.”
한 움큼 뱉어 낸 이백의 복부에는 정확하게 꽂힌 주먹의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게다가 갈가리 찢긴 무복까지. 그의 복부에 틀어박힌 철권의 흔적이었다.
이백은 쓰디쓴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유운보법. 그것은 오로지 유운검법을 보완하기 위해 이백이 철저하게 익혔던 보법이며, 검술의 부족한 부분을 갈고닦기 위해 함께 익혔던 것이다.
그러나.
천무린과의 담소 이후 얻은 깨달음으로 인한 한 가지 생각.
사일검법의 강맹함에 유운보법의 부드러움을 담을 수 있다면.
매 순간 사일검법을 펼쳐 몸을 극한으로 몰아붙이지 않고 오로지 필사의 순간에 시기적절하게 단 한 번의 일격으로 끝내는 방식이라면 어떻게 될까.
그래서 아쉬웠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그 효력을 더욱 극대화시켰을 것이고, 깨달음을 체득하여 눈앞에 있는 각신에게 더욱 치명적이고 강력한 한 수를 뽐낼 수 있었을지도.
하지만.
‘그조차도 내가 감수해야 할 몫이고 그 어떤 상황도 내게 맞춰 주지 않는 것이 세상의 이치. 진짜 실전에서는 어떠한 변명도, 핑계도 용납되지 않는다.’
이백의 마음속에 다시금 불꽃이 맹렬하게 불타올랐다. 아쉬움보다는 눈앞에 있는 상대에게 최선을 다한다.
“후우, 후우.”
이백의 검이 팽팽하게 끌어당겨졌다.
호흡을 고르며 마치 궁사의 궁술을 연상케 하는 자세는 각신에게 불쾌감을 주었다.
“……내게 한 번 보였던 초식을 또 선보일 생각을 하다니 실망입니다, 이백 생도.”
곽도하와 붙으면서 펼쳐 보였던 사일검법 중 ‘후예사일’ 초식의 강맹함을 모르지 않는 각신은 이미 그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 두고 있었다.
왼손으로 오른쪽 손목을 잡으며 몸 쪽으로 바짝 끌어당긴 그는 익히고 있던 권법 중에서도 금강복마권(金剛伏魔拳)을 전심전력으로 준비했다.
한쪽은 검을, 한쪽은 권을 서로가 허리를 회전시키면서까지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와 같은 기세를 끌어모은 두 사람이었다.
후우웅!
우웅!
소용돌이치는 기운이 맞부딪치더니 공기 터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팡! 파아앙!
그리고 누구 먼저랄 것도 없이 바닥을 박차는 두 사람이었다.
검 끝이 강궁의 화살처럼 쏘아 가던 이백의 기세에도 불구하고 금강복마권을 펼치는 각신의 움직임에는 흔들림조차 없었다.
다리는 굳건하게, 어깨는 유연하게, 손목과 팔은 강인하게.
그 기세에 휘청이는 이백의 모습은 매우 위태로워 보였다.
츠츠츠츠!
금강복마권에 검 끝이 닿은 각신은 그 순간, 자신이 이겼음을 직감했다. 검 끝에 담긴 기운은 생각한 것보다 미약하기 짝이 없었고, 단숨에 짓눌려 버릴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촤라라락.
검 끝이 닿는 순간, 굽이치는 강물처럼 여섯 번의 변화가 일어났다. 뻗어 가는 각신의 오른손을 휘감기 시작하는 검의 파도.
“……이, 이게 무슨!”
각신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몸을 틀면서 각신은 금강복마권의 기세로 단번에 뚫으려고 주먹에 더욱 힘을 실었다. 금강복마권이 가진 특유의 파마(破魔)의 기세로 주변에 산재되어 있는 모든 것을 깨부수기 위해 더욱 공력을 실었다.
그러나.
사사삭.
서거걱. 서걱.
금강복마권을 펼쳐 가는 각신의 팔을 타고 전신에 검 끝이 스쳐 지났고, 다시 한번 각신의 몸을 마구 난자했다.
푸슛, 슈숫!
겨우 지혈을 해 뒀던 각신의 전신 요혈에서 피가 솟구쳤다.
털썩.
“……비장의 한 수라더니, 여섯 번의 변화를 일으키는 검이라니.”
서서히 쓰러지는 각신의 몸에.
챙그랑.
타탓!
그대로 검까지 내려놓으며 달려와 각신의 몸이 땅에 처박히지 않도록 부축하는 이백이었다.
“구곡전척(九曲箭剔), 원래는 9번의 변화여야 하나 아직 부족하여 6번의 변화밖에 일으키지 못하였습니다.”
“……하하, 그렇다면 육곡전척(六曲箭剔)이 되겠구려. 다음에는 아홉의 변화에도 지지 않을 생각입니다.”
“기억해 주신다니 영광입니다.”
이백은 혼절하는 각신의 전신에 새겨진 요혈에 지혈을 했다.
각신의 출혈이 멈춘 것을 느끼고 나서야.
“푸화아악. 쿨럭, 쿨럭.”
고갤 돌려 입에 머금었던 핏물을 쏟아 내는 이백이었다. 원체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이백이었고, 잔부상도 아닌 나한권을 정통으로 맞은 그가 아니던가.
그런 그를 바라보던 하후성이 생글거리며 각신을 둘러 업었다.
그러고는.
이백을 일으켜 세우더니 그의 오른손을 번쩍 든다.
“……사천무관 이백의 승리로 7기수 최종 승자는 사천무관입니다!”
이윽고.
“와아아아아! 멋지다!”
“대체, 대체! 마치 산을 쪼갤 듯이 날아간 검이 중간에 몇 번의 변화를 일으켰는지!”
“3번 아니었나!”
“3번은 무슨! 4번이오!”
“3번이면 어떻고! 4번이면 어떠며! 5번이면 어떻소!”
폭발적인 환호성과 뜨거운 반응은 이백이 보여 준 열정과 패기에 대한 보답이었다. 매 순간이 치열했고 전신전력을 다했으며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어휴, 시끄럽네.”
“……그런 것치고는 너무 웃는 거 아니고요?”
“아픈 사람을 어떻게 패겠어. 그냥 이겨서 다행이라 생각해야지. 안 패고 넘어가서 얼마나 좋아.”
허얼…….
뜨거운 환호 속에서도 패겠다는 말부터 나오는, 이 종잡을 수 없는 천무린이라는 남자에게 그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설화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