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화
제64화
점창파 장문인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진궁의 위세는 실로 대단했다.
그런 그가 자리를 잡은 지 불과 1년여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그를 인정하듯 삼대 무관 비무대회에서도 진궁에게 직접 초대장을 보낼 정도였다.
“하하하! 진궁 장로님! 이제부터 우리들의 세상입니다.”
“그간 마음고생이 심하셨지요? 이제 훌훌 털고 봄날을 만끽하시지요!”
진궁과 함께 일을 도모했던 삼장로와 사장로가 씨익 웃으며 축배를 들었다.
만면에 미소를 띤 진궁은 함께 축배를 들다가도 금세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허나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점창을 더욱 강성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이리 일을 도모한 만큼 앞으로도 절치부심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으하하하! 당연하지요! 당연하고말고요!”
“이거이거, 점창의 홍복은 다름 아닌 진궁 장로님이 아닐까 합니다!”
아주 달콤했다.
그간의 고생이 보람으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점창의 수좌를 차지하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부단히 노력했던가. 점창의 장문인인 관평도를 끊임없이 핍박하고 압박했다.
그의 무능함을 사사건건 꼬집었고, 사소한 실수라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끄덕 없을 것 같던 관평도였지만 결국 진궁의 집요함에 못 이겨 무너졌고, 현재는 장문인의 집무실이 아닌 점창의 폐관동에 갇혀 있었다.
“푸흐흐, 앞으로 점창의 앞길은 창창하기만 할 것입니다!”
“암요! 당연하고말고요!”
“이번 비무대회에 진궁 장로를 초대하지 않았습니까. 이건 이미 전 무림이 진궁 장로를 장문인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허허허, 사장로도 참. 그리 얼굴에 금칠을 해도…….”
“아니, 제가 뭐 없는 말을 했습니까. 거기다 비무대회에 진량이도 참가한다지요?”
“허허허, 아직 많이 부족한 아이입니다.”
“어허, 이거 겸손이 지나치십니다! 진궁 장로님! 부족한 아이가 어찌 사일검법을 벌써 5성까지 익힌답니까.”
제 아들을 칭찬하는 데 어떤 아비가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커흠흠. 거 점창에 제법 많은 아이들이 있는데 어째 진량이만 아끼겠습니까.”
진궁의 말에 삼장로와 사장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띤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다른 아이들이 무에 그리 중하다고. 재능이 뛰어나지도 않는 이들보다는 진량이에게 더 신경을 쓰는 것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그렇지요. 암요, 그렇고말고요. 괜스레 다른 이들이 나서서 점창을 망신시키는 것보다야 그게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거기다 진궁은 제 아들을 유독 아끼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그게 비록 뒤틀린 사랑일지라도.
“허허허허! 이거야 원! 안 되겠소. 내 오늘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시겠소이다. 삼장로, 사장로도 준비가 되었다면 얼른 잔을 드시오!”
“그럴 줄 알고, 내 좋은 술이란 좋은 술은 죄다 가져왔지요!”
“어허! 어디 술만 필요하겠습니까. 자아! 들어오너라!”
사장로의 손뼉 부딪히는 소리에 급히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들은 다름 아닌 여인들이었다.
얇디얇은 한 겹의 천으로 가려야 할 곳만 가린 여인들은 기루의 여인들과 다를 바 없었지만, 사장로는 개의치 않고 어서 들어오라며 손짓으로 다그쳤다.
“빨리들 오지 않고 뭣들 하는 게냐. 어서 자리를 잡거라!”
제각기 손에 중원 무림의 명주라고 일컬리는 여아홍과 금존청을 든 여인들은 진궁과 두 장로의 옆에 사뿐히 앉았다.
“허허, 이와 같이 기쁜 날에 꽃 한 송이를 따다가 옆에 두고 술을 한잔 걸치는 것이 무어 그리 대수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삼장로.”
“그렇지요! 그렇지요! 허허허, 참으로 사장로는 사내로서의 즐거움을 아는 이구려!”
두 장로의 말에 진궁 역시 옆에 앉은 여인의 미소에 흠뻑 취한 채,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들었다.
* * *
“진궁 장로!”
매서운 일갈에 퍼뜩 정신을 차린 진궁이 눈을 끔뻑거렸다.
역팔자로 꺾인 눈썹과 으르렁거리듯 말을 내뱉는 악교운이 바로 눈앞에서 진궁을 노려보고 있었다.
‘……불과 그때가 얼마 지나지 않았거늘.’
“말해 보시오. 정녕 사천무관에 입관한 이들에게 무공에 대한 제재를 가한 것이 사실이오?”
야차(夜叉).
사방으로 풍기는 악교운의 기세는 매섭다 못해 절로 주춤거리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절정의 극의에 올랐다는 그의 경지가 거짓이 아니라는 듯 이 공간 내에 있는 이들은 악교운의 기세에 그만 숨이 턱 하고 막혔다.
무공만큼은 악교운보다 절대 아래가 아닌 진궁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그가 풍기는 기세에 그의 머릿속이 마구 헝클어졌다.
현 7기와 8기의 총책임자이자 사천무관주 당백진의 대리로 삼대 무관 비무대회의 감독을 맡고 있는 악교운이다. 즉, 지금 이 비무대회 동안 악교운의 권위는 당백진 바로 다음이라는 소리였다.
누구보다 셈이 빠른 진궁이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었고.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 같소. 악 대협.”
그의 말 한마디가 자칫 자신의 아들 진량에게 치명타가 되어 돌아올 수 있었기에 최대한 조심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오해라고 했소?”
“그렇소, 오해요. 절대 오해요.”
“무엇이 오해라는 말이오?”
“내가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제자들을 핍박한단 말이오.”
현재 삼대 무관에 속하지 못한 문파는 세간의 관심을 잃고 결국 봉문할 수밖에 없는 신세로 전락한다. 그 예로 한때는 구파일방에 속했던 곤륜파가 있다.
소림과 무당, 두 거파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곤륜파가 삼대 무관에 들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 어떻게 되었는가.
무림으로부터 철저하게 단절돼 상단과 표국과의 거래도 일시에 끊어졌고, 결국 곤륜파는 봉문(封門)을 하지 않았던가.
삼대 무관의 눈 밖에 나서 봉문을 하는 점창파라니, 이보다 끔찍한 결과는 없을 듯했다.
“……절대 그런 일은 없소.”
악교운이 무시무시한 기세를 거두며 이백과 문호, 구태현을 바라본다.
“다름 아닌 비무대회다. 내 너희가 사일검법을 익힌 사실을 모르지 않는 바, 왜 펼치지 않는지 똑바로 대답하도록.”
물음을 촉구하는 말과 동시에 진궁을 압박하는 기세를 거두지 않았다. 혹여 세 생도에게 영향을 주지 않도록 말이다.
그 모습에 입이 바싹바싹 말라 가는 것은 진궁이었다.
혹시라도 세 사람이 있는 그대로 털어놓는다면?
‘……끝이다.’
마음이 조급해진 진궁은,
“악 대협, 내 말 좀……!”
“사일검법만이 점창의 검이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다급해진 진궁의 말을 끊고 들어온 것은 담백한 이백의 목소리였다.
담담한 말에 진궁은 말을 하다 말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유운검법도, 사일검법도, 또 다른 점창에서 익힌 모든 검이 제 검의 근본이 됩니다. 어찌 사일검법만이 점창의 검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는 거짓이 아니라 사실대로 고해도 된다. 절대 너희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겠다.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마.”
악교운은 담담하게 말하는 이백을 바라봤지만, 이백은 그저 고개를 저을 따름이었다.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총교관님. 그러나 제 말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지그시 이백을 바라보던 악교운은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고, 진궁을 다시 노려봤다.
“아니라니 참으로 다행이오. ……잠깐의 오해가 있었던 것 같으니, 진궁 장로는 노여움을 푸시오. 총.교.관이라는 자리가 워낙 신경을 예민하게 하는지라.”
눈빛은 매서웠으나 기세가 누그러진 악교운의 모습에 진궁은 언제 당황했냐는 듯 금세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하하하, 그럴 수도 있지요. 수많은 생도를 이끄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래도 오해가 풀려 천만다행입니다.”
“……수 없어.”
응?
허허로운 미소를 짓던 진궁은 낯익은 목소리에 고갤 돌렸다.
자신의 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진량이었다.
“진량아, 뭐라고?”
“……인정할 수 없어! 사일검법! 사일검법을 못 쓰게 해야 해!”
“뭐, 뭣!”
진궁의 두 눈이 화등잔이 되어 악다구니를 쓰는 진량을 바라봤다. 기껏 상황을 다 무마시켜 놨더니.
“……저 새끼들 전부 사일검법 못 쓰게 해 줘! 어? 아버지! 금지령 절대 풀지 말라고!”
진량은 이대로 참을 수가 없었다. 이백이 다시 사일검법을 쓴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일검법만큼은 안 된다.
사일검법만큼은.
사일검법을 익힌 이백을 상대로 단 한 번도 이겨 본 적 없던 진량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비등비등했던 이백과의 경쟁에서, 점창이 가진 검의 정수라는 사일검법을 익힌 순간부터는 모든 이목이 이백에게로 향했다.
진량은 그때 그 순간을 떠올리면 절로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그래서 아버지 진궁이 점창을 차지하는 순간, 진량은 이백이 다시는 사일검법을 쓸 수 없도록 아버지께 간곡하게 부탁했다.
그랬는데, 그래서 다시는 이백이 자신을 향해 고개를 들 수 없도록 만들었는데.
“……이노오오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게냐!”
걸음을 멈춘 악교운, 그리고 모든 광경을 지켜보는 이백 일행과 8기로 보이는 후보생들까지.
“금지령이라니! 내 언제 그런 것을 내렸단 말이더냐!”
조용히 넘어갈 수 있는 것을 이리도 까발리다니.
너무 오냐오냐 키웠다. 오냐오냐 키워서 이리도 생각 없는 행동을 저지르는 것이다.
당장이라도 진량의 입을 꿰매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것을 나무라기 전에 먼저 상황부터 수습해야 했다.
“악 대협……! 이 녀석이 무언가를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소. 허허.”
난처한 표정을 짓는 진궁이었지만, 악교운이 고갤 돌려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진짜 아니오! 정말 한번만 믿어 주시오!”
악교운은 어깨를 으쓱였다.
“진궁 장로.”
“말하시오…….”
“진짜 아니라는 말 믿겠소. 허나.”
뚜벅. 뚜벅.
진궁에게 바짝 다가온 악교운이 조용히, 그것도 아주 나직하게 말했다.
“두 번의 기회는 없을 것이오. 사천무관에 입관한 순간부터 졸업할 때까지 모두가 무관의 생도라는 점을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라오.”
그 말에 진궁은 침만 꼴깍 삼킬 뿐이었다.
경직된 진궁에게서 시선을 거둔 악교운은 천무린을 비롯한 이백 일행과 8기 후보생들에게 말을 꺼냈다.
“……모두들 자리로 돌아가라. 치료를 마친 이백과 문호, 구태현 세 사람 역시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도록. 예선전이 끝났으니 내일부터 본선이 시작될 것이다.”
“예!”
“감사합니다!”
자리를 털고 돌아가는 이백과 문호, 구태현에게는 환희의 눈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천무린과 송무, 태강이 느릿한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
“근데 왜 점창파는 장문인이 아니라 대리인이 나오신 거야? 장문인은 어디 아프신가?”
“각 문파마다 속사정이 있는 거겠지.”
송무와 태강이 한마디씩 나눴고, 천무린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원래 속이 엉큼한 놈들일수록 헛짓거리를 많이 해. 혹시 알아? 그간 키워 준 은혜도 모르고 뒤통수를 친 것일지?”
“에?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들 하지.”
“쉿, 쉿! 누가 들을라!”
남겨진 진궁과 진량에게는 쓰디쓴 그림자만이 반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