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화
제62화
“지금부터 비무대회를 실시하겠으니 호명되는 이들은 안내에 따라 위치해 주시길 바랍니다!”
때마침 내공을 실은 음성, 그것도 아주 담백한 목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그 말에 7기 생도인 이백은 침음을 애써 삼켰다.
‘시작인가.’
가벼운 심호흡을 통해 긴장된 마음을 억지로 진정시키고 비무장을 둘러봤다. 수많은 인파의 시선이 오롯이 자신을 향해 있는 것만 같았다.
“제1 비무장! 사천무관의 이백! 산동무관의 황보권!”
“제2 비무장! 섬서무관의 하건욱! 산동무관의 모용강!”
“제3 비무장! 사천무관의 문호! 섬서무관의 공선!”
하후성은 구성된 대진표대로 호명했고, 이백은 자신이 첫 순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긴장을 털어 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천천히 비무장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푸흐흐, 이백이가 처음이었어?”
흠칫.
그를 떨게 만드는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뺨에서부터 턱 끝까지 길게 난 자상이 인상적인 청년, 진량이었다.
“이거, 제법 자존심 상하겠는데. 한 번에 제압 못 하면.”
그러면서 진량이 즐겁다는 듯 만면에 미소를 띠고 8기 후보생들이 있을 곳에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저놈들보다 못하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 되어 버리니까 말이지. 쿡쿡.”
그리고 이어지는 뒷말에 이백이 부르르 떨었다.
“알아서 해. 한 수에 제압 못 하면 어떻게 될지. 아랫놈들보다 못한 놈을 내가 굳이 데리고 있을 이유가 전혀 없잖아?”
진량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다 못해 싸늘했다.
꿀꺽.
“최, 최선을 다해 볼게.”
“최선? 아니, 단 한 수야. 한 수.”
그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임을 안다.
이백이 바라보고 있는 비무장 위에 걸어 나온 황보권의 풍채와 당당한 걸음걸이는 한눈에 보기에도 절대 만만하지 않은 상대라는 것을.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뭐 해? 호명하잖아. 안 가고.”
이놈은 그런 것을 봐줄 놈이 아니었다.
그저 제 마음이 가는 대로 행할 뿐.
“사천무관의 이백! 이백 없습니까! 셋 셀 동안 나오지 않으면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기권으로……!”
그렇게 이백은 자신의 이름을 한 번 더 호명하는 말에,
부리나케 올라섰다. 제1 비무장에.
올라선 그를 반기는 묵직한 음성.
“왔나? 사천무관 놈.”
황보권이 충혈된 두 눈으로 이를 아득바득 갈고 있었다.
어……. 왜 나를 철천지원수 대하듯 하는 거지.
이백은 자신을 노려보는 황보권의 반응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 솥뚜껑만 한 손이며 근육근육하는 온몸이 아주 위협적이었다.
아찔한 광경에 애써 검을 뽑으며 호흡을 다잡는 이백이었다.
‘최선을 다해 보여 줄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기수 열외?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진량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려면 실력을 인정받아야만 한다.
그러려면 1차전 탈락으로 인한 비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피해야만 했다.
모든 비무장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비무 시작!”
하후성의 일갈을 시작으로, 비무장에 있던 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검을 휘두르거나 땅을 박찼다.
“으깨 주마!”
황보권은 타고난 신력(神力)으로 늘 상대를 고꾸라뜨려 왔다. 산동무관에서도 손꼽히는 강자 중 하나가 아니던가!
‘그래, 그때는 아직 취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 어찌 그런 생도도 못 된 놈에게 기절을 당했겠는가!’
자신의 기억을 스스로 왜곡시키는 신공(?)까지 발휘하며 황보권은 주먹에 기운을 담았다.
쿠르, 쿠르릉!
그의 타고난 신력에 걸맞은 벽력신권(霹靂神拳)이었다.
황보가가 자랑하는 무공이기도 했고, 극성으로 펼치면 천둥을 동반한 권력(拳力)이 뿜어져 나온다고 알려져 더욱 유명해진 권공이었다.
이백은 벽력신권의 기세에 흠칫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점창파가 자랑하는 검법 중 하나인 유운검법(流雲劍法)을 펼쳤다.
피핏!
황보권의 팔뚝 여기저기에 핏물이 튀었다.
쾌속하면서 부드러운 검법인 유운검법을 통해, 뻗어 오는 거대한 권력에 맞서지 않고 그대로 흐름을 타기 시작한 이백은 정면으로 부딪히면 자신이 불리하다는 것을 깨닫고 보법에 신경을 썼다.
치명상을 입힐 수 없다면 최대한 시간을 끌며 빈틈을 찾는 수밖에!
타닥!
“이 쥐새끼 같은 놈이!”
피를 보자 흥분한 황보권의 권력은 더욱 강력해졌다. 벽력신권이 펼쳐지는 주변으로 풍압(風壓)까지 일어날 정도로 강력한 권격이었다.
‘……단, 한 대라도 맞으면 끝이다.’
이백은 보법을 펼치며 옆구리로 짓쳐들어오는 황보권의 벽력신권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냈다.
꿀꺽.
‘이런 놈을 단 일수(一手)에 제압을 했다고? 이런 멧돼지 같은 놈을?’
이백은 황보권을 단 한 수에 제압했다는 천무린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 황보권인데?”
“황보권!”
그리고 8기 후보생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한 명에게 꽂혔다.
“저런 놈을 한 방에 기절시켰다고?”
“대체 어딜 어떻게 공격해야 한 방에 기절시키지? 온몸이 근육인데?”
“뭔 소리야. 언제 저놈이 다른 데 공격한 적 있어? 그냥 정수리부터 쪼갰겠지.”
와구와구.
황보권을 단 일 수에 박살 내고도 천연덕스럽게 월병을 먹고 있는 천무린이었다.
그런 와중에 이백과 황보권 사이에서는 치열한 공방전을 오갔다.
콰가가강!
“와, 미친. 황보권이 저 정도였어?”
“한 대 맞으면 죽겠는데?”
“아니, 명진보다 더 근육 덩어리야. 저놈은 대체 뭘 처먹은 거야?”
그 말에 괜스레 발끈한 명진이 자신의 팔뚝에 힘을 잔뜩 준다.
“무슨 소리야! 내가 힘을 안 줘서 그렇지!”
“그래도 네가 졌어.”
여긴 근육 자랑하는 대회가 아니야. 이 새끼들아.
“누굴 응원해야 하냐.”
“그래도 사천무관을 응원해야 하는 거 아닐까?”
“뭔 소리야. 이기면 더욱 기고만장해서는 우리 쪼아 댈 게 뻔한데?”
같은 편을 응원하지도 못하는 처지라니.
“그래도 이겨야 기분 좋아서 덜 괴롭히지. 지면 얼마나 발광해 대겠어?”
황태의 말에 송무와 태강이 오묘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역시, 선수는 선수를 알아보는 거야?”
“그런 거지. 역시 이런 부류는 따로 있나 봐.”
“뭔 개소리야!”
나름 과거가 있는 황태의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소리쳤다.
“괜찮아. 원래 다 과거가 있는 거잖아? 이해할게.”
황태의 어깨를 두들기는 송무였다.
“으으, 이 새끼들이 진짜로.”
나름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조성된 가운데 천무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백의 검은 막힘이 없다. 막힘이 없다는 말은 곧 검에 대한 자신감이 있다는 뜻이다.
황보권의 기세가 당장이라도 그를 씹어 먹을 것처럼 달려들었지만, 이백은 집중력을 잃지 않은 채 공격을 흘려 내거나 보법으로 정확한 시점에서 회피하고 있었다.
산동무관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는 실력자 황보권을 상대로 저렇게 할 수 있다는 건.
‘꽤나 노력을 한 모양이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힐끔.
이백을 바라보며 뭐라고 소리치고 있는 진량이 보였다.
“뭔가 있군. 어린놈들이 뭐 이리 꼬인 게 많은지.”
보기만 해도 답답할 지경이라 죄다 쥐어 패 버리고 싶었지만…….
앓느니 죽어야지. 그냥.
쿠당탕탕!
“허억, 허억!”
땅바닥에 거의 무릎을 접다시피 한 이백은 비무장에 엎어진 황보권을 바라보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옆구리가 욱신거렸고, 울컥울컥 올라오는 피 맛이 느껴지는 게 권력을 검으로 흘려 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충격을 상쇄시키진 못했던 모양이다.
힘겹게 서 있는 이백의 상태를 훑은 하후성은 오른손을 번쩍 들며 내공을 실어 소리쳤다.
“제1 비무장 사천무관 이백의 승리입니다!”
첫 포문을 열어 준 시합에서 생각보다 생도들의 기량이 뛰어나자 관중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우오오!”
“멋지다! 사천무관이 첫 시합부터 승리를 하다니! 과연 황금 기수라고 하더니 다르긴 다른 건가!”
“이백! 이백! 이백!”
쏟아지는 환호성은 오롯이 이백에게로 향했고, 이백은 기분이 나쁘지 않은 듯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터벅. 터벅.
“좋냐.”
그런 기분 좋은 느낌을 한순간에 땅바닥에 곤두박질치게 만드는 음성.
“……진량아.”
“내가 한 수에 제압하라고 했는데 그걸 못 해? 이 새끼, 하여간 기회를 줘도 끝까지 말을 안 듣는다니까!”
진량의 말에 괜스레 울컥한 이백은 자기도 모르게 발끈하는 눈빛을 띠었다가 아차 싶어 재빨리 고갤 돌렸다.
그러나 그 모습을 놓칠 리 없는 진량이었다.
“어쭈, 이 새끼. 꽤나 반항적이네. 어제 그렇게 맞고도 정신을 못 차렸네. 따라와.”
그는 땅에 침을 뱉고는 불량스러운 걸음으로 비무장을 빠져나갔다.
“……하아.”
이백의 눈길에 다른 7기수들이 보였지만, 애초에 그들은 이백에게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 보였다.
“이 정도면 이미 기수 열외 아닌가 모르겠네.”
쓴웃음을 지은 이백은 아무도 자신의 부상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자신의 단짝 동기들인 문호과 구태현이 비무장에서 치열한 비무를 벌이고 있는 것을 힐끗 봤다.
‘오늘은 혼자 감내해야겠네.’
그렇게 걸음을 옮긴 곳에는 진량이 잔뜩 짜증이 어린 표정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리 인적이 드문 곳을 어떻게 찾았는지.
“야.”
이백이 들어서자마자 다가온 진량이 여느 때처럼 손을 들었다.
짜악!
“……응.”
“내가 만만해?”
“그럴 리가 있겠어.”
짜악! 짜악!
뺨이 홱홱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백은 맞은 뺨보다 마음 한구석이 더 아렸다.
“내가 이렇게 부탁하잖아. 이렇게나 부탁하는데, 친구 부탁을 들어주는 게 그렇게 어렵냐고.”
“아니…….”
다시 손을 드는 진량의 손길에 이백은 그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매서운 손바닥이 당장이라도 쇄도하려는 그 순간,
“아이고, 어린노무 새끼가 아주 찰지게도 때리네.”
낯선 음성이 둘 사이를 파고들었다.
“……8기?”
“8기라고?”
이백의 얼떨떨한 말에 진량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고갤 돌려 바라본 곳엔 질겅질겅 육포를 씹고 있는 녀석이 나타났다.
“천무린?”
“……아? 뭐야, 난 또 8기인 줄 알고 왔는데, 이거 7기 선배님들 아니십니까?”
그의 얼굴을 알고 있는 이백은 천무린의 이름을 꺼냈고, 천무린은 히죽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왜? 황보권 좀 깠다고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지? 내가 우습냐?”
진량이 살벌한 미소를 띠며 이백을 밀어내고는 천무린의 앞에 섰다.
“예?”
“예? 지금 내 말에 토 다냐?”
인상을 잔뜩 쓴 진량의 손이 번쩍 들어 올리더니 천무린의 뺨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데.
짜악!
“뭐야, 이 새끼.”
“……하하, 진량아. 아무리 그래도 후배들한테 손찌검은 좀…….”
이백이 천무린의 앞에 서서 대신 뺨을 맞은 채 애써 밝은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