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화
제61화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간 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천무린에게 다가온 악교운은 때아닌 위로를 하고 있었다.
토닥토닥.
“남들은 다 참가하고 싶어도 못 한다. 한 번의 기회조차도 받을까 말까 한데, 너는 제대로 보상을 받았구나.”
“위로인지 비아냥거림인지 하나만 정해요.”
“비아냥거림이라니 당연히 위로지.”
악교운의 손길이 따스하게 천무린의 어깨를 토닥이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위로로 보이지 않겠는가.
“……근데 이 양반아! 왜 이렇게 웃고 있냐고!”
광대에 걸린 입가는 내려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커, 커흠흠.”
“아니, 가서 말 좀 해 보쇼. 나 진짜 이런 거 관심 없다고. 애들 싸움에 나가서 얻다 쓰냐고.”
그 말에 악교운이 어깨를 으쓱했다.
“낸들 어쩌겠느냐. 무관주님의 말씀이다. 네가 무림맹주급이 되면 모를까.”
“으아아아아!”
당백지이인! 이 새끼가!
살의가 슬금슬금 피어올랐다.
그리고…… 이어지는 격통.
그 모습을 혀를 차며 지켜보는 악교운. 이제는 익숙했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아주 잘하는구나.”
떼구르르 구르는 천무린을 봐도 이젠 그러려니 하게 된 악교운이었다.
“기왕 참가하게 된 거 제대로 성적을 내보이면 될 것 아니냐.”
“……이 망할 무관 같으니!”
악교운이 피식 웃으며 다시 천무린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8기 후보생들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7기 생도들이 대부분 첫날 먼저 참가하게 될 것이다. 오늘은 관람을 하는 데 집중하고 마음을 다잡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도록. 참고로 대진표는 오늘 오후에 알려 줄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아이고! 나 죽네!”
“……저 녀석은 내버려 두면 괜찮아질 테니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걱정 마십시오. 저희도 뭐 딱히…….”
키워 봐야 다 소용없다더니. 격통을 참지 못해 소리를 지르는 와중에도 8기 후보생들을 노려보는 천무린이었다.
“저것 보십시오. 덜 아픈가 봅니다.”
“으흠, 그렇군.”
악교운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뭘 고갤 끄덕거려! 당백진 데리고 와! 당백진!
소리 없는 아우성에도 악교운은 몸을 돌려 7기수들을 바라봤다.
“곧 대회가 시작하니 어제 알려 준 대로 대진표에 맞게 움직이도록.”
“예!”
7기 생도들은 떼구르르 구르는 천무린과 8기 후보생들을 한심한 눈빛으로 한 차례 쏘아보고는 무심한 표정으로 지나갔다.
악교운까지 나가고 나서야 천무린을 부축하는 송무였다.
“괜찮아?”
“네 눈엔 괜찮아 보이냐!”
“……그래도 비무대회에 참여할 수 있는 인원이 제한되었던 게 풀렸잖아”
염X. 그래서 더 짜증났다.
기껏 선별해서 골라놨더니, 전체 참여가 왠 말인가.
“X랄! 누가 참가하고 싶대! 다, 당백……!”
두근!
살의가 멈출 생각을 안 했다.
끄륵.
결국 간만에 천무린은 혼절하고 말았다.
“……이건 대체 무슨 병이야?”
“화병(火病), 뭐 그런 거 아닐까? 왜 울화가 쌓여서 병이 생긴다고들 하잖아.”
“쯔쯧, 어린 나이에 어쩌다가 벌써.”
다들 하나같이 혀를 찼다.
* * *
쿠당탕탕!
“아! 좀! 그만 밀라고!”
“누가 어깨 잡고 올라타는 거야! 어떤 미친놈이야!”
“너만 안 보여? 어! 너만 안 보이냐고!”
비무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수많은 인파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삼대 무관에서 차출된 각 교관들이 나서서 통제를 해야만 비무대회가 정상적으로 진행될 정도였다.
“진짜 너무 많은데.”
“그러게 말이다.”
“저기 비무장 좀 봐라. 아주 단단해 보이는 청강석들일세.”
“정파 무림의 돈이 죄다 어디 갔나 싶었는데, 저리로 갔나 봐.”
송무의 말에 태강이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했다. 청강석으로 만들어진 비무장이 무려 서너 개가 더 있었다.
“저 많은 걸 다 쓴다는 거야?”
“참가하는 인원이 워낙 많다 보니, 저걸 다 써도 꽤 걸릴걸? 예선전만 해도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은데?”
혀를 내두르고 있는 두 사람에게 백리후를 비롯한 진무양, 명진, 낭소소가 팔짱을 낀 채로 나섰다.
“그렇다고 한들, 하루 이틀이면 7기수 예선전은 금방 다 치르지.”
“어디 한번 보자고. 7기수가 얼마나 잘하는지.”
“맨날 황금 기수, 황금 기수 노래를 부르던데.”
“시합 자체가 단순히 일대일 공방전도 있지만, 검진 시합도 있고, 심지어 세 번째 시합은 어떻게 진행될지 아직 밝혀지지도 않았어.”
네 사람의 말에 송무가 그 말을 이어 받았다.
“우리야 뭐 편하지! 7기수들 하는 거 보고 움직이면 될 테니까!”
비무장에 오르고 있는, 사천무관을 비롯한 삼대 무관의 7기수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형형한 눈빛으로 비무에 참가하려는 7기수들의 기세는 아주 의욕이 넘쳐 보였고, 언제든지 자신의 실력을 선보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지를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확실히 기세가 다른데.”
“그러게. 기세가 확실히 다르네.”
“조금 이상하게도…….”
슬쩍 7기수 참가자들을 본 8기 후보생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리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한번 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미친 건가?”
“아냐, 아냐. 명진. 너만 그런 생각이 드는 게 아니라…….”
냉철하고 가장 이성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백리후와 진무양마저 서로를 바라보며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결국 내뱉고야 말았다.
“확실히 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드는걸.”
“그 이유가 혹시.”
힐끗.
“아오! 좀 비켜 봐! 월병 좀 먹게! 거기! 새치기하지 말고!”
천무린은 수많은 군중과 월병 과자 쟁탈전을 펼치고 있는 장관을 선보였다.
“저 녀석 때문은 아니겠…… 지?”
누군가의 음성에 후보생들은 저도 모르게 흐뭇하게, 아주 흐뭇하게 웃고 말았다. 저놈 때문에 자신들이 겁대가리를 상실했음을 이제야 느낀 것이다.
그리고 군중 속에서 누군가의 외침에 시선이 모두 돌아갔다.
“저기 시작하려나 보다!”
터벅, 터벅.
비무장으로 시선을 옮긴 사람들은 발걸음 소리만으로 순식간에 입을 다물게 만든 인물에게 집중했다.
“사, 사천무관주 당백진!”
“만독암제(萬毒暗帝)!”
“사천당가의 태상가주!”
사천무관주이자 무림에서 강호행을 다닐 때는 ‘만독암제’라는 별호로 불렸고, 현재는 사천당가의 일에서 한 걸음 물러나 가주와 장로들에게 직언을 해 주는 최고 어른의 자리에 있는 인물.
바로 당백진이었다.
“사천무관주 당백진이외다.”
그리 크지도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목소리. 그러나 깊은 울림이 있는 목소리는 장내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또렷이 전달되었다.
모두의 시선을 단번에 모은 당백진은 찬찬히 장내를 둘러보았다.
그저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바라볼 뿐이었으나, 군중은 침음을 삼켰다. 정파 무림의 최고수 중 한 명인 그가 주는 무게감은 그토록 어마무시했다.
“먼저 자리를 빛내 주신 수많은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리며, 이번 비무대회가 원활히 진행될 수 있도록 힘을 빌려 준 동도들에게 그저 경의를 표할 뿐이외다.”
그러고는 비무장과 같은 높이로 한쪽에 마련된 단상을 향해 가벼이 미소를 띠었다.
“또한, 귀한 시간을 내주신 무림맹주님께 먼저 감사 인사를 드리며, 각 문파의 장문인들과 가주들까지 참석해 주신 점, 매우 감사히 생각하외다.”
그의 말대로 시선이 닿은 곳에는,
무림맹주 독고황이 가장 중앙의 자리에 위치해 있었고, 그 양옆으로 섬서무관주 혜공대사와 청강진인, 산동무관주 남궁도가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더 나아가 소림과 무당, 화산과 아미, 공동, 점창, 종남, 청성, 개방의 장문인들이 자리를 잡았고, 남궁가를 비롯하여 황보가, 하북팽가, 제갈가, 모용가, 사천당가의 가주들이 자리를 하고 있었다.
옛 역사에 새겨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모든 장문인들이 모여 있는 셈이었다.
어디 그뿐이랴.
“멀리서 걸음하신 새외이궁의 궁주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리오.”
그 말에 북해빙궁주 설종량과 남해태양궁주 남선이 가벼운 목례로 화답했다.
“이 자리가 정파 무림과 더불어 새외이궁과도 화합의 시간이 되길 기원하며, 서로 간에 묵은 감정이 있으면 털어 버리고,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소이다.”
지극히 권위적인 말투였다.
그럼에도 어느 누구 하나 그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사천무관주 당백진은 그래도 되는 인물이었으니까.
“아마 이번에 비무대회의 관계자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놀랐을 것으로 짐작되오. 진부해진 비무대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싶었을 뿐이니 혹여 그 재미가 반감되더라도 너무 노부를 욕하지 말았으면 좋겠소이다.”
그러고는 가벼이 장내를 향해 목례를 해 예우를 갖춘 후 그는 걸음을 옮겼다.
짝! 짝짝짝!
“와아아아아!”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성이 사천무관주 당백진의 인사말을 반겼고, 곧 삼대 무관의 교관들이 각 비무장마다 시합을 중재하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한 명의 인물이 올라왔다.
“안녕하십니까. 이번 비무대회에 왕림해 주신 각 문파의 관계자분들과 관중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저는 하후성이라고 합니다. 사천무관주님과의 개인적인 친분으로 부탁을 받고 이리 비무대회의 진행을 맡게 되었습니다. 많이 부족하더라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깔끔하고 담백하게 말하는 하후성이었으나, 담담히 밝힌 그의 정체로 인해 장내가 다시 한번 술렁였다.
“하후성이라고?”
“십 년 전 마도와의 전쟁에서 가장 많은 공로를 내세웠다는 십인(十人) 중 한 명이 아닌가!”
“천성검협(天星劍俠)!”
정마대전에서 가장 많은 공로를 세운 무인들 중 가장 젊은 자로, 여전히 정파 무림을 이끌어 갈 대들보로 칭해지는 인물.
그가 바로 하후성이었다.
그의 등장에 모두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장내가 크게 웅성거렸다.
“와, 미쳤다. 미쳤어.”
“무림맹주에다 각 파의 장문인, 거기다 하후성까지?”
낙양에 들어섰을 때보다 더 큰 충격을 받은 후보생들은 당최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릴 뿐이었다.
“……염X, 나한테 일초지적도 안 됐던 주제에. 뭐?”
응?
“우물우물, 천성검혀업? 천성검협 좋아하네! 으휴! 으휴!”
어디서 이상한 음성이.
설화린이 고갤 돌리자, 보이는 한 명의 인물은 역시나.
“왜 그리 불만이 많은 표정이에요?”
“뭐가!”
빽! 하고 소리치는 음성에 설화린은 자신의 귀를 막아야만 했다.
“……다 튀었어. 입에 있는 것 좀 제발 다 먹고 말해요! 제발!”
더러워 죽겠어. 아주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