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제57화
“……네가 지금 이러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산동무관의 생도 중 모용세가의 모용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기세 좋게 외쳤다.
“제법 한 수가 있는 모양인데, 고작 후보생 따위가 우리 세 사람을 도발하고도 무사히 살아남아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으냔 말이다. 그것도 고작 사천무관의 후보생 따위가 말이다!”
대체 당백진, 이 새끼는 사천무관을 어찌 키웠길래 걸핏하면 사천무관 따위라는 말을 듣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당백진을 보면 정말 한 소리 해 주고 싶었다.
마도관을 키워 천마신교의 최전성기로 이끌었던 내가 직접 비결을 알려 줘야지.
아무튼 그건 그거고.
“네놈들이 나랑 같은 삼대 무관 출신이라는 게 부끄럽다. 이 새끼들아.”
내 말에 멀쩡한 세 사람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모욕을 받은 그들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고, 검집에 있는 검을 뽑아 들기까지 했다.
이미 사고 친 마당에 더 못 칠 게 무엇이 있으랴.
이판사판이었다.
그런데 그때.
“끄윽! 아, 안 돼요…….”
설화린이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 호리한 몸에 배만 툭 튀어나온 모습이 과음……, 아니 과료를 한 모양이었다.
“이, 이 이상은 안 돼요.”
두 팔을 쭉 뻗으며 이 이상은 안 된다고 소리치는 그녀는 여전히 소화를 시킬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곡료에 취하여 기분 좋은 느낌을 몰아낼 생각까지도 못 하는 듯 보였다.
“하아……?”
그 모습에 세 사람 역시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여기서 비키지 않으면 소저 역시 다치는 수가 있소!”
“얼른 비키시오!”
“대산동무관을 무시한 죄를 달게 받으라!”
세 사람의 말에 설화린이 한숨을 푹, 하고 내쉬고는 그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까 저를 희롱했던 발언, 다 기억하는데……. 으윽, 배불러. 그래도 계속하실 건가요……? 우웁!”
그 말에 산동무관의 세 생도가 흠칫하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스르릉.
검집 속에 검을 다시 집어넣은 그들은 아직까지 혼절해 있는 황보권을 부축해 데리고 나갔다.
“운이 좋은 줄 알아라! 비무대회에서 반드시 손을 봐주겠다!”
대표로 모용강이 천무린에게 마지막까지 소리치는 것을 잊지 않은 채 말이다.
그렇게 한 차례 폭풍우가 지나가고서야 객잔 안의 분위기는 고요해졌다.
다행히 점소이가 튀어나와 객잔에 있는 수많은 손님들을 차분히 내보냈다.
아마 내일쯤이면 삽시간에 소문이 퍼져 있겠지.
사천무관과 산동무관이 부딪혔다는 소문.
거기다 사천무관의 인물이 산동무관의 황보권을 찍어 눌렀으며, 그가 해 온 행위가 소문을 타고 더욱 부풀려져서 널리 퍼져 나갈 것이다.
점소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저어…… 소협.”
“응?”
“괜찮으신 겁니까?”
“뭐가 말입니까?”
“지금이야 사람들의 눈 때문에 물러갔지만…… 해코지하려고 다시 올 텐데요.”
“후후, 걱정해 주시는 겁니까? 걱정은 고맙습니다만, 그럴 새가 없을 것이오.”
“예?”
내 말에 점소이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당장 해코지를 걱정해도 모자랄 판에 저토록 여유로운 모습이라니.
“우리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을 것이오. 만약 아까 나를 제압했다면 객잔 내 손님들에게 협박을 해서라도 입을 봉했을 테지만, 이미 수많은 객들이 보고 가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점소이가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하지 않습니까. 아마 끝없는 불길을 진화시키느라 그들은 여기저기 바쁘게 다녀야 할 겁니다.”
내 말에 점소이가 감탄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어린 청년이 갖고 있는 무력도 무력이지만, 심계까지 대단하다. 이미 거기까지 내다봤단 말인가.
“저는 그저 낙양 한 객잔의 점소이일 뿐이지만, 소협의 존함을 꼭 알고 싶습니다. 알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점소이의 말에 나는 짧은 고민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을 해 주어선 안 될 것이다. 어차피 비무대회도 안 나가려고 하는 마당에 이름까지 알려 주어 뭐 하겠는가.
그렇게 다짐하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아직 제 이름을 알려 드리기엔 많이 미욱하니 더욱 성장한 뒤에 그때 말해 드리…….”
“무린아아, 천무린! 뭐 해애! 빨리 곡료 한 병 더 안 시키고오.”
이 눈치 없는 새끼.
아까 그 난리가 났는데도 눈치도 없이 인사불성이 된 표정으로 곡료를 한 병 더 시킨다는 송무였다.
내가 만약 한 번 더 이놈들이랑 뭘 마시면 내 손에 장을 지지고 말리라 마음먹었다.
“……천 소협이셨군요!”
점소이가 해맑은 얼굴로 내 이름을 곱씹듯 중얼거렸다.
하아, 빌어먹을.
* * *
다음 날, 천무린이 예상한 대로 낙양은 비무대회가 열리기도 전에 사천무관과 산동무관이 한바탕 맞부딪쳤다는 소식으로 벌써 뜨거워졌다.
“벌써 두 무관이 맞부딪쳤다지?”
“산동무관의 황보권이라면 황보세가의 일원이 아닌가! 상대가 당연히 박살 났겠구먼!”
“이 사람아! 그게 아닐세. 소문을 제대로 듣고 온 게 맞는가?”
“무슨 말인가?”
“황보권이 단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지 뭔가?”
“허어! 황보권을!? 사천무관이 이번에야말로 걸출한 생도를 배출해 내는 데 성공했나 보구먼!”
“그런데 황보권을 단숨에 제압한 인물이 사천무관의 후보생이라는 말이 있다네!”
“후보생이라고? 생도가 아닌 후보생 말인가?”
“그렇다니까!”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후보생과 생도의 실력은 하늘과 땅 차이이지 않은가?”
“크으, 그러니 말일세! 그리고…… 더 중요한 게 있네.”
“무엇인가? 어서 말해 보게.”
“내 자네에게만 몰래 말하는 것이니 절대 소문내면 안 되네.”
“누구 숨넘어가는 꼴을 보고 싶은 겐가! 빨리 말해 달라고 하지 않는가!”
“황보권이 산동무관 후보생 시절에 다른 여후보생을 겁탈하려다 실패하였는데, 그걸 황보세가에서 입막음하려고 권력을 남용했던 모양이야!”
“허어어! 어찌 그런 일이! 명문가 중 명문가라고 불리는 황보세가가 말인가?”
“그렇대도! 그리고 그 자리에 사천무관의 여후보생까지 희롱한 모양이야!”
“에잉! 쯔쯧! 산동무관은 인성도 제대로 안 가르친단 말인가! 내 귀가 썩어 버릴 지경이군그래!”
“아닐세. 조금 더 들어 보란 말일세.”
“더 있는가?”
“그런 황보권의 치부를 낱낱이 드러냄과 동시에 사천무관의 동기 여후보생을 희롱하던 황보권과 다른 산동무관의 생도들에게 협과 의를 가르치며 크게 호통을 친 인물이 있었다네! 심지어 네 명이 동시에 겁박과 협박을 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말일세!”
“서, 설마 그 후보생이 황보권을 단숨에 제압했다는 바로 그 후보생인가!?”
“후후, 눈치챘는가?”
“허어, 어찌 젊은 나이에 그토록 멋을 갖고 있단 말인가. 협이 무엇이고 의가 무엇인지 아는 자로다. 진정으로 정파의 홍복이로구먼!”
“어디 그뿐이겠는가! 무려 4명이 동시에 덤벼들어도 전혀 굴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니까! 심지어 객잔에 파손된 모든 기물과 손님들을 배려해 배상까지 했다니 이 어찌 칭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실력과 인성을 모두 겸비하다니……! 산동무관의 어떤 파락호 같은 놈들과는 아주 비교가 되는구먼!”
“사천무관의 복이자 정파 무림 전체의 복이 아닐 수 없지 않은가.”
“그, 그래서 그 후보생의 이름은! 이름을 얼른 알려 주시게!”
“후후, 이름조차도 놀라지 않을 수 없네.”
“왜 이리 뜸을 들이는가! 정말! 화병으로 내 죽는 꼴을 보고 싶은 겐가!”
“바로 천무린 후보생……. 아니, 소협일세.”
“천무린 소협! 가만, 천무린? 천무린이라고 하면!”
“그래! 무려 10년 전 거악(巨惡)인 천마신교의 교주 이름이 아니던가!”
“마교의 천무린이 가고, 정파 무림의 한 줄기의 빛이 천무린이라는 이름을 가졌다니! 기이하도다! 정말 기이해!”
정말로 발 없는 말은 낙양 전체를 금세 휩쓸었다. 어딜 가도 천무린의 이름이 오르내렸고, 황보권과 산동무관은 졸지에 아주 죽일 놈들이 되어 있었다.
산동무관의 총교관인 팽교환은 갈수록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가는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산동무관의 모든 인물을 풀어서 소문의 진화에 나섰다.
그러나.
이미 천무린은 정파 무림의 한 줄기 빛이 되어 있었고, 황보권과 산동무관은 악의 무리로 둔갑해 있었다.
“으아아아아아! 황보권, 이 새끼 어디 간 게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황보권을 찾는 이는 다름 아닌 팽교환이었다.
팽교환은 산동무관 7기 생도와 8기 후보생의 관리 및 지도를 맡은 총책임자로서 산동무관의 명성 또한 책임져야 하는 인물로, 지금 이 상황을 겪는 그로서는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잠깐 콧바람 쐬라고 밖으로 내보냈다가 대체 이게 무슨 꼴인가.
소문을 빨리 진화하지 못하면 자칫 자신이 옷을 벗어야 할 판이었다.
산동무관의 총책임자가 되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던가. 그런데 생도들의 헛짓거리 때문에 그 모든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지경이었다.
절대 그럴 순 없었다.
소문을 진화하지 못하면 반드시 비무대회에서 우승하여야만 한다는 선택지밖에 남지 않은 팽교환이었다.
그렇게 절망하고 있는 팽교환과 산동무관의 인원들과 달리.
“……천무린 소혀어업?”
“천 소혀어업? 정파 무림의 한 줄기 비이잋?”
“산동무관이라는 악의 무리에 맞서 싸운 의와 협을 아는 천무린 소협 아니십니까?”
“천 소협! 천 소협! 여기 한번만 봐주세요!”
“와……. 혼자 아주 할 건 다 했네.”
“그러니까 말이야. 아니라고 잡아떼고, 또 잡아떼더니.”
“비무대회로 명성을 얻으려는 게 아니라 지나가다가 죄다 뚝배기 깨면서 명성 얻으려고 했던 거였네.”
곡료 실컷 마시고 기분 좋게 잠들었다 눈떠 보니 이 천둥벌거숭이에다가 취미로 사람 뚝배기를 깨기 위해 몽둥이를 쥐고 다니던 이놈이.
멋진 영웅이 되어 있었다.
그런 만큼 송무와 설화린, 신혁건과 황태는 천무린을 바라보며 온갖 비아냥이란 비아냥은 모두 쏟아냈다.
언제 천무린을 이렇게 놀려 보겠는가.
만면에 웃음꽃을 피운 채 속이 부글부글하는 천무린을 바라봤다.
“흐즈 믈르그, 이 새끼들아아!”
뭐, 당사자는 쑥스러운지 놀리지 말라며 몽둥이를 붕붕 휘두르고 있었지만.
“푸흐하하! 무린이 다시 봤네! 곧 죽어도 세간에 자신의 이름은 안 알리려고 그렇게 노력하더니만!”
송무의 해맑은 말에 천무린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누구 때문에…….”
“응?”
“누구 때문에 내 이름이 밝혀졌는데!”
붕붕붕!
몽둥이를 휘두르며 천무린이 송무에게 성큼 다가왔고, 송무는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기 바빴다.
“왜! 왜 그러는데에! 나한테 또 왜!”
“이 새끼야! 그냥 죽어! 죽어어!”
“아아아악! 정파 무림의 한 줄기 빛이 나를 죽이려 든다아아! 사람들! 여기 보세요오!”
“콱 씨! 그 입 안 다물어?”
아까 두몽을 몽둥이로 두들기는 거 보니까 아주 개 패듯이 패던데.
그런 광경까지 다 본 마당에 송무는 나 살려라 하고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안 그러면 정말로 죽을지도 모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