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화
제52화
“아니, 사천무관에서 주관했으면서 왜 사천이 아니라 딴 지역을 가는 건데?”
귀찮아 죽겠다.
“……귀찮아하지 마요. 당신, 아무것도 안 하잖아요.”
마차 위에 올라가 따스한 햇살을 받으면서 저렇게 툴툴대다니.
설화린은 구시렁거리는 천무린에게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안 하다니? 누구 때문에 이리 귀찮은 짓을 하고 있는데! 내가 너희 총책임자라니 이게 말이야, 방구야? 아무리 보낼 사람이 없어도 그렇지.”
천무린은 마차에 타고 있는 몇몇 인원을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비무대회라면 아직 나흘이 남았다.
이를 바드득 갈아붙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당한 것 같다.
떠나기 전.
「먼저 출발하여 자리를 잡도록. 낙양에 도착하면 사천무관 소속 숙소로 알아서 안내해 줄 이가 마중 나올 것이다.」
「아니, 제가 왜!」
「어쩌겠나. 지금 남아 있는 인력이 없는 것을. 죄다 파견 나가 있는 와중에 숙소 잡으라고 다시 불러올 순 없는 노릇이잖나.」
그 말도 맞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니, 그럼 7기수도 있다면서 왜 날 보내는 건데요?」
「나는 강요한 적 없네만, 저길 보겠나?」
송무를 비롯한 후보생들의 눈이 반짝이고 있다.
「자기들한테 기회를 주면 안 되겠냐고 아주 내 바짓가랑이를 잡기에 먼저 말을 꺼내 본 건데, 싫은가?」
「당연히 누가 그런 귀찮은……!」
찌릿.
후보생들이 천무린을 매섭게 노려본다.
후보생들에게 매일 작은 무림, 작은 테두리 속에 갇혀 있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친 게 누군가.
거기다 낙양이라니!
5년간의 합숙 생활에 지친 이들에게 하루라도 빨리 강호를 볼 수 있다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달콤한 보상이 아닌가!
그런데 그것을 마다하는 미친놈이 있다니!
……아, 있구나. 그런 미친놈이.
후보생들의 입이 하나같이 으르렁댄다.
「등증 흐긌다고 믈흐르(당장 하겠다고 말해라)…….」
「죽여 버릴 거야. 못 가면…….」
왜 말끝이 늘어지는데, 무서워.
나도 모르게 움찔하며 악교운을 바라봤다.
악교운은 날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쩔 거냐는 표정으로 어깨까지 으쓱하네.
열. 받. 게.
「……갈게요.」
「진작에 그리 말할 것이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기분인가. 매번 날 패고 싶어 하는 이유를 몰랐는데, 이런 거였구나.
아무튼.
그래서 팔자에도 없는 마부 한 명이 모는 삼두마차 한 대에 마차 안엔 설화린, 송무, 신혁건, 황태가 탔다.
“참 조합도 이상해.”
“뭐가요?”
“그렇게 티격태격할 땐 언제고.”
“싸우면서 크는 거라면서요”
어휴, 이 쥐방울만 한 게 한마디를 안 지네. 한마디를.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햇빛을 받으며 드러누웠다.
사실 나 역시 1년간, 작디작은 연무장에 갇혀서 매일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다 보니 콧바람을 쐬고 싶긴 했다.
또, 사천에 비해 낙양에 가면 더욱 많은 정보를 얻을 수도 있을 터였고.
‘정마대전 이후, 마교가 이리도 잠잠할 리 없는데. 대체 왜 그런지 알아봐야겠어.’
겸사겸사 낙양으로 가서 그간 쌓인 궁금증을 모조리 해결할 생각이었다.
차라락.
마차의 문을 열어젖힌 송무가 바깥공기를 흠뻑 들이마셨다.
“흐으으읍! 바깥공기가 너무 좋아. 싱그러워.”
송무의 잡담을 시작으로 설화린과 황태, 신혁건이 모두 공감한다는 듯 피식 웃었다.
“뭐가 그리 다른지 모르겠지만, 다르긴 한 것 같다.”
넷 모두 문파의 자랑이거나 혹은 스승의 전언으로 무관에 들어온 이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태어나서부터 다른 곳에 눈 돌릴 틈도 없이 오로지 무공 수련에만 몰두해 왔다.
매일 들리는 풍문과 온갖 소문, 추측으로 난무한 강호 무림에 정작 한 번도 나가 본 적 없이 살아오다 보니 무관 밖에 나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마치 별천지를 보는 듯했다.
“우리 술도 마셔 볼까?”
“술……?”
“그래! 술! 우리도 이제 곧 성년식을 치를 나이잖아. 술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신혁건과 황태, 송무가 서로를 바라보더니 은근한 눈빛을 교환한다.
혈기왕성한 세 사람은 죽이 척척 맞았다.
“교관님 오시면 우리에게 어디 그럴 기회나 있겠어? 이럴 때가 아니면.”
“그건 또 그렇지.”
“후후후, 난 찬성이야.”
그러면서 세 사람의 시선이 설화린에게로 모였다.
“……왜 봐요?”
“화린이도 동참할 거지?”
“그게 무관 후보생이 할 소리예요? 무관 규칙에 음주는 필히 징계 대상이라고 적혀 있는데 말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마셔야 하는 거지. 안 그래? 무린아?”
그렇게 고개를 올려다보는 송무가 잠시 침묵했다.
움푹 파인 두 눈으로 침을 줄줄 흘리는 한 녀석이 마차 위에서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린아?”
“……술, 술을 마음대로 못 마신다고.”
“무린이 상태 왜 이래?”
술 이야기가 나오자 급격히 상태가 나빠지는 천무린이었다.
술.
전생에서 마시고 또 마시고 원 없이 또 마셨던 술이다.
그런데.
「뭔 어린 노무 새끼들이 벌써부터 술 생각을 하고 자빠졌어! 헛짓거리 하다가 술 마시는 거 들통이라도 나면 바로 퇴관이다!」
“왜긴요. 악 교관님한테 진즉에 박살 났죠. 이미 여러분들보다 한 수 빠른 저 인간도 저러고 있는데 술 생각이 나요?”
설화린의 말에 모두가 흠칫하며 천무린을 바라봤다.
하기사…….
“저 녀석도 저러고 있는데 우리가 먹었다간…….”
“악 교관님 눈 돌아가는 거 보고 싶진 않은데.”
황태와 신혁건이 놀라서 입을 벌린 채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허구한 날 염불 외더니 결국 술로 악교관님한테 한 소리 들었네.”
“아이고, 소림에서 보면 딱 칼 맞아 죽기 좋겠다! 여기요! 여기! 얼른 잡아가세요!”
X랄.
소림 새끼들도 술 다 마셔!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이!
소림의 천각대사와 함께 대작했던 일이 생각나네.
「허허, 거 어지간하면 그쯤 하시지. 땡추!」
「무슨! 내 이래 봬도 고금 제일의 술꾼이 될 것이오!」
「부처께 미안하지도 않냐!」
「부처도 이런 날에는 이해해 주실 것이오!」
한창 천마신교에서 주가를 올리고 있을 때, 한 차례 칼부림을 하고 지쳐 버린 그 땡추와 대작했을 때 술맛이 아주 기가 막혔지.
“……나 다시 돌아갈래.”
으흑흑,
내 주지육림이여.
내 무릉도원이여.
그때는 무엇이 내 앞을 막을쏘냐! 였건만.
지금은…….
한낱 술 한 병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다니.
울적해지는 천무린이었다.
“그런데 악교관님 말은 참 잘 듣네.”
“안 들을려야 안 들을 수가 없지 않을까.”
“하긴. 그렇죠? 누울 자릴 봐 가며 다릴 뻗으라는 말도 있잖아요.”
아니, 다른 놈들은 다 이해하겠는데 설화린 너까지 왜…….
“그래도 낙양에 가면…….”
지금이야 술을 구할 방법도 없을뿐더러 눈치가 보인다지만 낙양이라면 가능할지도?
그런 생각이 드는 후보생들을 보고 천무린은 배를 까고 벌러덩 누워버렸다.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뭐, 이것까지 생각하고 허락해 준 거겠지?
악 교관이 이런 것까지 예상 못 했을까.
그렇게 낙양의 선두행은 평화로웠다.
아니, 가끔씩은.
“하하하하! 요놈들아! 가진 것을 모두 내놓으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끌끌끌! 어린 아해들이니 내 이번만은 편히 넘어가 줄 터이니 마차를 두고 품에 있는 것도 모두 내놓도록.”
듬성듬성 난 수염을 자랑하며 거친 패검으로 위협하는 작자들이 우르르 몰려나온 경우도 있었고.
“키히, 후흐흐, 보물을 건졌구나. 내게 오겠느냐? 영롱한 은발하며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천하일미(天下一美)가 따로 없구나!”
설화린의 미모에 눈이 돌아간 놈들이 질척거리다가.
쩌저적!
빙백장을 맞고 얼어붙어 버린 이들도 제법 있었고.
“푸흐흐흐, 이놈들아! 우리가 바로 사천삼호(四川三虎)이니라! 아무리 세상 물정을 몰라도 이 별호는 들어 봤겠지!”
범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튀어나온 산적 놈 세 명이 험악한 얼굴을 들이미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낄낄낄! 삼호? 삼호라고? 낄낄낄.”
“푸하하핫! 황태야! 혹시 너네 삼촌이야? 삼호래! 삼호!”
낄낄대던 나와 동시에 송무가 바닥을 치며 웃어 젖혔고.
“푸훕.”
웃음을 참지 못한 설화린이 고개를 돌렸으며.
“크, 크흠.”
신혁건이 다가와 황태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럴 수도, 프, 흡, 그럴 수도 있는, 푸흐흐흡……. 있는 거야, 황태……. 푸흐흐하하하! 도저히 참을 수가 없네.”
그러다 결국 참지 못하고 모두 웃음보가 터지는 작디작은 사고도 있었다.
“이런 X발!”
잠잠하던 황태의 양아치 본능이 폭발하여 검집째 삼류 산적들을 흠씬 두들겨 팼다.
“오호, 역시 진또배기 삼호는 어디 안 가? 큽, 크크큭.”
나는 자지러지듯 웃어 젖혔고, 다른 이들 역시 한동안 황태를 놀리느라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이런 작디작은(?) 사건 사고들도 있어 나흘이란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 * *
둥! 둥! 둥!
정파 무림의 이목이 죄다 쏠려 있는 삼대 무관 비무대회라는 명성에 걸맞게 축제의 시작은 가슴을 떨어 울리는 풍악 소리였다.
흥을 자아내는 풍악 소리는 비무대회에 참가하는 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고, 어마어마한 비무대회의 규모로 정파 무림이 아직도 건재하다는 사실을 만방에 과시하였다.
또한, 정파 무림이 얼마나 화합하고 사이가 돈독한지도.
참가하는 이들에게는 웅심을,
참관하는 이들에게는 흥분과 열기를.
성세를 누리게 될 정파의 새로운 기둥들의 면면을 보는 재미에 흥분과 기이한 열기가 뒤섞여 벌써부터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왁자지껄한 낮의 분위기는 식을 줄 모르는 태양처럼 뜨거웠고, 밤이 되어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낼 때쯤엔 다음 날에 이어질 새로운 국면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미쳤다. 여기가 낙양이야?”
“믿기지가 않네요. 낙양이란 곳은 이야기로만 들었는데.”
“스승님이 모로 가도 낙양만 가면 된다고 하셨는데.”
입을 쩍 벌린 채 황태와 설화린, 신혁건은 낙양을 처음 본 감상을 늘어놓기 바빴는데, 왠지 좀 어색했다.
가장 감탄하고 놀라 자빠져야 할 녀석이 말이 없었던 것.
고갤 돌려 바라보니.
“…….”
송무가 창백해진 표정으로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뭐야, 소피 마렵냐. 왜 그래?”
녀석에게 말을 걸고 있는데, 저 멀리서 상인 밥을 제법 먹었을 것으로 보이는 사내의 손에 ‘사천(四川)’이라는 명패가 쥐어져 있었다. 능글맞은 표정에 느끼한 콧수염까지.
전형적인 얍삽이 상이었다.
“혹 사천무관에서 오신 분들이십니까?”
숙소까지 안내해 준다는 그 인간인가.
쥐 상인 얼굴도 그렇고 뒤에 호위 무사까지 주렁주렁 달고 있는 꼴을 보니 딱히 엮이고 싶지 않았지만, 뭐 상관이 있으랴.
숙소만 안내 받으면 그만이겠지.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숙소 안내해 주러 오셨나 보죠?”
“예예. 맞습니다. 두몽이라고 합니다.”
자기소개를 한 두몽의 양손이 공손했다.
뭐 자세는 제법 되었군.
“가시죠.”
“예! 제가 아주 기똥찬 숙소를 잡아 놨습죠.”
내 말에 두몽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껏 몸을 숙인 채로 우리 일행을 안내하다가 말고,
“아, 그 전에.”
“응?”
“혹 선금부터 받을 수 있을까요? 저희가 먼저 계약금을 납입하긴 했지만, 또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여……. 헤헤.”
그 말에 나는 코웃음을 쳤다.
하여간 상인 새끼들이란.
“알겠수다. 송무야, 계산해라.”
그 말에 송무가 얼어붙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뭐 해?”
“그, 그게 말이야, 무린아.”
그 반응에 나 역시 표정이 점차 굳어진다.
“……설마 아니지?”
삐거덕거리는 내 고개가 천천히 돌아가는데, 마주한 두몽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진다. 얍삽하게 한껏 낮추던 자세는 어디 가고 허리가 서서히 펴졌다.
어? 하하, 제법 키가 크신 분이었네.
제가 몰라봐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