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제47화
나는 아주 마음에 든다는 표정으로 백리무영에게 말했다.
“넌 정말로 된 놈이야. 역시 화산파가 도가였어. 벌써 세상 이치를 그리 깨닫다니, 역시는 역시인가.”
후보생들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당최 저놈의 머릿속엔 무엇이 들어 있기에 그리 해석이 된단 말인가.
무엇이 세상 이치고, 무엇이 역시란 말인가.
“그러하니 너는 오늘 다시는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지 못할 것이다.”
그리 말한 백리무영은 작심한 표정으로 신혁건에게 눈빛을 보냈다.
“무영, 이건 정파인으로서의 도리가…….”
신혁건은 죽어도 싫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백리무영은 나직이 말했다.
“욕을 먹더라도 내가, 책임도 내가 다 질 테니 이 싸움에 집중하자. 언제 어떻게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매번 정도의 길을 추구하는 네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번만큼은 날 위해 싸워라. 혁건.”
그 말에 신혁건이 나와 백리무영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곤 창대를 잡으며 내게 입을 옴짝달싹했다.
“……미안하다.”
“별로?”
정말로 아무렇지 않았다.
아니, 난 백리무영의 상황 판단 능력에 오히려 감탄했다. 백리무영은 객관적으로 판단한 것이다. 혼자서 괜히 자존심을 부리다 질 바에 둘이 덤벼 이기는 방법을 택했다는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판단이고 상대를 허투루 보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그렇게 백리무영이 먼저 땅을 박차며 공중으로 도약했고, 그에 따라 신혁건이 저돌적으로 돌진해 왔다.
여전히 낭창거리는 창술은 더욱 낭창거리며 쾌속해졌고, 사각으로도 피할 수 없이 넓은 범위를 대번에 좁혀 들어오며 창대를 뻗어 왔다.
공중으로 도약한 백리무영의 검격은 내 머리를 찍어 눌러 왔고, 검면에 은은히 서린 자색 빛이 화산파 특유의 자하기(紫霞氣)가 스며들었음을 알려 주었다.
백리후보다는 확실히 반수 위로 보였다. 몇 분 차이로 태어났다는 백리후와는 다르게 살초와 허초를 섞어서 변초를 펼칠 줄 아는 데다 깨달음도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을 보니.
‘제법인걸.’
백리무영에게 짧은 감탄을 보내고, 자연스레 신혁건에게도 시선이 간다.
무신이며 천마신교의 교주였던 나라고 해서 동시대에 살던 모든 은거기인을 다 알 수는 없었다.
뭐 한 번씩 심심풀이 땅콩 삼아 숨어 있는 것을 잡아다가 족치고 뚝배기를 깬 적이 왕왕 있긴 했지만.
아무튼 신혁건의 스승이라 불리우는 신창(神槍)이라는 놈은 아주 작심하고 신혁건을 키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낭창거리는 창술은 흡사 연검을 연상케 할 만큼 유연했으며, 뱀의 꼬리처럼 표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대에 담긴 힘은 무거우리만치 단단하다.
그리고…….
“합격술이 제법인데.”
몇 번이나 손발을 맞췄던 건지. 아니면 보지 않아도 어디서 어떻게 공격할 줄 알 정도로 친밀한 정도가 예상을 뛰어넘은 것인지 두 사람의 연수합격은 제법 칭찬해 줄 만했다.
“어디 가서 먹힐 만한 공격이야. 하지만.”
내가 아니라는 전제하에 말이다.
신혁건은 창끝이 천무린의 옆구리에 쇄도하는 것을 느낀 순간,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휘청.
휘청대는 것처럼 비틀거리며 허리가 뒤로 탄력 있게 넘어가는 천무린의 움직임에 신혁건의 눈이 크게 떠졌다.
동시에 취한 사람의 움직임과도 닮은 발걸음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가 다시금 한 걸음 내딛는다.
그 간단한 움직임에 짓쳐들어오는 창끝을 아슬아슬하게 흘려 낸 이후, 다시금 걸음을 내디뎌 짓쳐들어오는 백리무영의 검격을 유려하게 피했다.
취팔선보(醉八仙步).
연속해서 창끝을 찔러 가는 신혁건이었지만, 비틀거리는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고 잡힐 듯 말 듯한 짧은 움직임만으로 뻗어 오는 창끝을 잘도 피해 냈다.
창끝을 피할 때면 백리무영 역시 화산파의 낙화검과 칠매검을 펼치면서 거리를 좁혀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승 절기이자, 둘은 전혀 본 적 없는 불규칙적인 보법에 제대로 된 공격 한번을 맞출 수가 없었다.
보통의 보법이라 함은 일정한 규칙이 있거나 흐름이 있기 마련이다.
‘……어떻게 된 걸음이.’
‘저렇게도 자유분방할 수가 있단 말인가.’
본 적도 없는 움직임에 두 사람의 눈빛이 급격하게 흔들렸지만, 이내 중심을 잡고 뒤로 물러서는 백리무영과 신혁건은 호흡을 고른다.
두 사람의 눈빛이 교차하며 어떻게 나아갈지 눈을 마주치는데, 동시에 내가 히죽 웃었다.
“뭐, 공격은 니들만 할 줄 아나 본데 선공을 양보했으니 이번엔 내가 먼저 간다.”
내 말에 두 사람은 재빨리 방어 자세를 잡는데, 그 어떤 준비 자세도 없이 나는 땅을 박찼다.
“……엇!”
신혁건은 헛바람을 들이켜며 저도 모르게 창대를 휘돌렸다.
무려 오장을 뛰어 들어오는 천무린의 모습에 신혁건은 마치 공간이 접히는 듯한 착각을 느끼며 놀라서 창대를 휘두를 수밖에 없었다.
“건아! 정신 차려!”
막무가내로 창대를 휘두르려던 신혁건의 정신줄을 바로잡아 주려고 소리친 백리무영은 앞으로 세 걸음을 나서며 검을 뻗었다. 동시에 그의 검에서 펼쳐지는 수십 개의 검영이 분리되어 환영과 변화를 일으켰다.
화산이 자랑하는 변화와 환영의 묘리를 깨우친 검결이 자하기를 담아 나타났다.
‘무관의 후보생이 생도가 될 때, 평균적으로 이류 극의(極意)에서 일류 초입(初入)이라 했던가.’
세간에 나타난 평가로 비교했을 때, 이미 이 둘은 일류 초입에 다다랐다. 충분히 그것만으로도 뿌듯하게 여겨도 될 정도겠지.
그러나 절정이라는 벽에 곧 부딪힐 것이다.
정파인들이 절정이라는 경지에 오르는 것은 비교적 어려운 일이다.
마도인이었던 내겐 절정이라는 경지에서조차 벽을 느낀다는 게 새삼 어색한 기분이었다.
마공으로 절정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온갖 탁기와 마기, 잡기까지 모아다가 몸속에 축기를 시키니 당연히 그 속도가 정파인에 비해 월등히 빠를 수밖에.
질보다 양을 택하는 마공은 기하급수적으로 절정까진 쉽게 오르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단순히 비교하자면 정파인이 정화된 기운으로 차분히 상승 곡선으로 올라설 때, 마도인들은 절정의 경지에서부터 점차 하락 곡선을 탄다고 볼 수 있으니.
어쨌건.
현재의 나 역시 정도의 무공을 익히고 있지 않은가.
정파의 무공을 익히고 있는 내게 이 둘은 상당히 뛰어난 이들로 보였다. 이 정도 재능에다 좋은 스승을 둔다면 앞으로 시간이 흐르면 정파에서 나름 손꼽는 인물들이 될 수도 있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수히 두드려 줄 필요가 있었다.
“맞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법.”
나는 허공에서 그대로 박차며 한 번 더 몸을 회전시켜 뻗어 오는 검결을 구렁이 담 넘어가듯 피해 냈다.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
곤륜이 자랑하는 절세의 신법이었다.
허공에서 무려 8번의 움직임을 펼칠 수 있다는 운룡대팔식을 펼쳐 낸 나는 백리무영의 어깨를 발로 차서 앞으로 넘어뜨리면서 추진력을 받은 상태로 그대로 벙쪄 있던 신혁건에게로 성큼 다가섰다.
“싸우는 도중에 얼이 빠지면 쓰나.”
그리고 나는 정수리를 쪼개듯 검을 내리찍었다.
그 기운 속에 담긴 무겁고 패도적인 기운은 신혁건이 여태껏 한번도 느껴 본 적 없던 거대한 기운이었다.
동시에 천무린의 검이 무려 다섯 배는 커지며 다가오는 듯한 착각 속에 빠졌다.
눈을 질끈 감은 신혁건은 순간 고통조차 느끼지 못한 것을 생각했다.
‘……죽으면 그 고통조차 잊게 된다더니 과연 그러한가.’
그러나 이후에 느껴지는 파공음과 파열음이 신혁건의 귓가에 타고 흘렀다.
콰아아아앙!
번쩍!
그대로 검격이 신혁건이 서 있는 옆을 스쳐 지나가며 땅을 쪼갠다.
검 끝이 그대로 땅에 꽂히다 못해,
끄드드득.
그대로 두 동강이 나며 제 역할을 못 할 정도로 위력적인 검세였다.
“으음, 아직 좀 어색하네.”
……하늘의 기운과 제왕의 기운을 맞물려 담는다는 패도적인 검법.
남궁가의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이었다.
“에휴, 아직 나도 멀었네.”
무신 2회 차면 뭐하냐고. 고작 이따위로밖에 못 펼치는데.
으휴, 앓느니 죽지.
언제쯤 옛날의 무위를 회복하려나.
혼자 혀를 차며 고개를 젓고 있는데.
“응? 너희들 뭐 하냐?”
두 사람이 얼이 빠진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놈은 앞으로 엎어진 채로 우스꽝스러운 몰골로 나를 바라보고 있고.
또 다른 한 놈은 자신의 옆을 비껴간 검격에 그만 얼어 버린 듯 우두커니 선 채 눈만 돌려 나를 바라보고 있다.
“……왜 저래?”
근데, 비단 두 사람만 그런 게 아니었다.
8기 후보생들 전원이 입을 떡 벌리다 못해 침이 흐르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로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그러니까 왜 그러냐고.
나만 모르나?
* * *
비무대회 날짜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동안에 크고 작은 변화들이 있었다.
크고 작은 변화들 중 대표적인 것은.
“……으음, 신고식이 있었다고?”
“예.”
“……그러니까 그 신고식 결과가.”
악교운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하나둘! 하나둘!”
“야, 이씨! 빨리 뛰어! 늦는 새끼들 오늘 저녁밥 없을 줄 알아!”
으르렁거리는 한 후보생의 외침에 무려 오십여 명이 넘는 후보생들이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어 뛰었다.
“제 딴에 의리 챙긴다고 다른 놈들 챙기다가 늦는 녀석들 중 뒤에서 10명은 밥 못 먹을 줄 알아!”
그 말에 후보생들의 단합력이 단번에 깨지며 저녁밥을 위한 치열한 경쟁이 시작되었다.
“얼씨구? 동료들 버려? 너희들은 정신 상태가 썩어 빠졌어! 어? 밥도 좀 굶고 그러는 거지! 이런 개인주의 새끼들!”
……어쩌라고!
악다구니를 쓰며 움직이고 있는 인물들 중에 악교운의 시선은 세 사람에게 꽂힌다.
“백리무영, 신혁건, 당지운.”
“예. 저 세 사람도 저렇게 함께하게 되었군요. 허허.”
부교관 고윤의 말에 악교운은 저도 모르게 흐뭇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왔을까.
저 뒤에서 후보생들을 야단치며 조금이라도 늦는 녀석들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녀석을 보며.
“……저놈이 소야차(小夜叉)라고.”
악교운은 이제부터 자신을 야차라고 부르는 이들에게 특히 엄벌을 주리라 생각하고야 말았다.
암만 그래도 저놈과 자신이 동일한 별호를 쓴다는 게.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