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화
제43화
“……내가 졌다고.”
갈비뼈가 몇 대가 나간 건지 숨을 내쉴 때마다 고통스러웠지만.
사실 고통보단 정신적인 충격이 더 큰 황태였다.
그런데.
“그래서 날 놀리려고 온 거냐? 이제 나 따윈 아무것도 아니라고?”
황태의 앞에 있는 사람은.
“……그럴 리가.”
다름 아닌 송무였다.
“넌 정말 강했어. 아마…… 운이 좋아서 내가 이긴 게 아닐까.”
그 말에 황태는 저도 모르게 울컥했다.
“……X발.”
황태의 그런 반응에 송무가 움찔하며 그를 바라봤다.
“운이 좋아서 이겼단 소리 할 거면 집어치워. 그딴 말이 날 더 비참하게 만든다는 걸 모르는 거냐?”
“진짜야. 난…… 정말로.”
송무는 고개를 떨궜다.
황태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분노가 치밀다 못해 죽여 버리고 싶어야 했다.
그래야만 했는데.
어째서인지 화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널 쓰러뜨릴 거야. 쓰러뜨려서 네게 사, 사과를 받을 거야. 네, 네게 지난 과오가 그저 물 흘러가듯!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지나치지 않도록. 네게 진심 어린 사, 사과를 받을 거야.」
대련 도중 했던 송무의 말이, 그 한 마디가 황태의 마음속에 차츰차츰 되새겨진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된 건지.
……그래. 그 녀석이 발단이었지.
천무린.
갑작스레 강해진 천무린에게 깨지고 황태의 세상은 점차 바뀌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몇 번의 망신을 당하고 나서야 자신이 행해 온 일들이 나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을 따르던 녀석들이 하나둘 떠나고 다른 녀석들과 어울리며 더욱 행복해하는 표정을 보고.
허울뿐이던 시간이 모두 깨어지고 나서야 황태는 심경의 변화가 생겼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이 녀석.
“흐윽, 흐윽.”
잘못은 하나도 없는데 왜 내 앞에서 울고 있는 것인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황태의 눈가가 파르르 떨린다.
지난 5년간 해 온 행위가, 과오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치졸한 행위들이 황태의 머릿속을 훑고 지나간다.
반항하면 짓눌렀고, 마주하여 달려드는 이들을 힘으로 제압했으며, 강압적이고 고압적인 행위를 했던 지난날들이 지금 황태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대체 왜 그랬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죄책감과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이 발끝에서부터 차오르며 들끓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그리고 그 감정의 끝은.
“……송무.”
무거운 황태의 음성에 송무는 눈물범벅이 된 채로 고개를 서서히 들어 올렸다.
송무의 눈에는 어째서인지 원망의 감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이 녀석에게 했던 잘못이 참 많은데.
이 녀석은 고작 이 한 번으로 다 털어 낸 건지 어째서 나를 바라보는 눈이 이토록 순한 건지.
“……미안하다.”
그런 생각을 하니, 평생 입에서 나올 것 같지 않던 한마디가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그리고.
“……고마워.”
기다렸다는 듯이 녀석은 대답한다.
어째서일까. 어째서.
어……?
왜 앞이 뿌옇게 흐려지는 거지.
주르륵.
흐르는 눈물 한 방울이 눈가를 타고 턱 끝에 매달려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고마워. 황태야.”
송무의 그 한마디에 황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를 악물지 않으면 울음소리라도 새어 나올까 봐. 참을 수 없는 소리가 터져 나올까 봐.
부서져라 이를 악물며 황태는 고개를 떨구었다.
* * *
“으휴.”
당의원의 처마 끝에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글거리기 짝이 없다. 무슨 사내새끼들끼리.
“약간 눈물 글썽거린 거 아니죠?”
“뭐래!”
누가 눈물을 글썽거려! 난 살면서 눈물 따윈 흘려 본 적도 없는 사람이라고.
그나저나.
“넌 왜 여깄어?”
“……뭐, 겸사겸사요.”
설화린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혀를 찼다.
여자한텐 원래 손 안 대는 게 내 철칙이긴 한데, 너무 달라붙어서 귀찮아 죽겠다. 아주.
진짜 팰 수도 없고.
“……궁금한 게 있어요.”
“말 안 해 줄 건데?”
“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
내 대답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질문을 하는 설화린을 보며 나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말 안 한대도.”
“당신, 대체 누구예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흠칫했다.
“뭐?”
“……어떨 때 보면 누구보다 유치하게 굴었다가 또 어떨 때 보면 누구보다 노회한 사람처럼 행동해요. 아까도 마치 강호 무림을 유랑했던 사람처럼 이야길 하고.”
신나서 떠들었던 게 이렇게 되돌아오네. 젠장.
하여간 똑똑한 것들은 골치 아프다니까.
“책, 책 읽어. 책 읽다 보면 다 깨우쳐. 세상 이치가 다 모여 있는 게 책 아니겠어?”
“……당신, 책 거들떠도 안 보잖아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말 돌리지 말고요.”
빌어먹을.
댈 만한 핑곗거리가 없다.
뭐, 죽었다 살아났다고 말할 텐가.
내가 천마신교의 교주 천무린이었다고.
그것도 아니면 하도 혈겁을 일으켜서 저승사자가 환생시켰다고 말하리?
그 무엇도 말할 수 없었다.
혹 말했다가 저승사자가 또 내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좋을 대로 생각해.”
“5년간 단 한 번도 이토록 단합되어 본 적이 없었어요.”
“뭐가?”
“8기 후보생들 모두를 하나로 만든 데다 몇 사람을 갱생시킨 건지. 총교관님을 비롯해서 모든 교관님들도 당신에게 집중하고 있는 거.”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좀 많은 걸 하긴 했네.
“무관 내 후보생들, 그리고 생도들은 수많은 문파들의 관심을 받아요.”
그 말에 나는 힐끗 설화린을 바라본다.
“월등한 기량을 가진 재목이 어디에서 등장할지, 또 누가 될지, 그런 초미의 관심사가 이곳 무관에 쏠려 있다고요.”
“하여튼, 할 짓 없는 놈들.”
내 신랄한 말에 그녀는 피식 웃었다.
“왜 웃어?”
“봐요. 또 세상만사에 초연해 보이는 말투잖아요. 보통 후보생들은 이런 말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 줄 알아요?”
……뭐 어떤데.
내가 말이 없자, 설화린은 혼자 말을 이어 간다.
“더 돋보이기 위해 노력을 해야겠다는 둥, 무공을 열심히 연마해야겠다는 둥, 어디에서 그리 관심을 가지는지 궁금하다는 둥 보통 그런 반응을 보이죠.”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당신은 참 이상해요.”
설화린의 눈빛이 나를 향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빛에 나도 모르게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뭐랄까, 저런 눈빛은 내게 상당히 죄책감을 들게 하는 눈빛인데.
닭살이 쭉 돋은 나는 황급히 말을 돌렸다.
“어, 얼른 비무대회 준비하러 가, 가야겠는데.”
그리고 쓸 수 있는 경신법 중에 최고의 효율을 보이는 운룡대팔식을 그 자리를 벗어나는 데 썼다.
그렇게 홀연히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설화린이었다.
* * *
“……소기의 성과를 보인 후보생들이 많습니다.”
검술 교관인 담진은 악교운과 배단아를 바라보며 연무장에서 벌어진 대련 평가를 떠올렸다.
그간 기록해 둔 서열과 순위가 무색할 정도로 수준 높은 시합을 펼친 후보생들이 하나둘 머릿속에 떠올랐다.
“수준이 월등히 높아졌어요. ……정말 말이 안 될 정도로.”
“정말로 높아지긴 한 것 같아요. 이 정도면 7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예요.”
“아뇨. 사천검법의 수준만 놓고 본다면 이미 7기를 뛰어넘었다고 봐야 합니다.”
배단아의 말에 담진은 대번에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알고 있다.
사천검법이라는 검법을 창안할 당시, 함께 참여하여 사천검법에 심혈을 기울였던 사람 중 한 명이 아닌가.
8기를 담당하는 어느 교관들보다도 사천검법에 대한 이해도가 가장 높으리라.
그래서 확신할 수 있었다.
사천검법의 운용은 그 어느 기수보다 8기가 가장 월등하다는 사실을.
“그래서 말인데, 17번 후보생이 말했던 것처럼 이번 비무대회의 성과가 괜찮다면 전체 진급도 고려해 봐야 합니다.”
담진은 악교운을 통해 들었던 천무린의 말에 무게감을 실었다.
“네에?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그건 그간 있었던 모든 원리원칙을 깡그리 무시하는 처사인 것 같은데요. 담 교관님.”
배단아는 당최 말이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갤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전체 진급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든 그녀였으니까.
“담 교관의 생각을 좀 더 들어 보도록 할까. 배 교관.”
악교운은 할 말이 더 남은 듯 보이는 담진의 표정을 읽고서는 턱짓을 했다.
“애초에 3차 진급시험 자체가 사천검법의 운용 시험이지 않습니까. 장담할 수 있습니다. 현 8기 후보생들의 사천검법 운용도는 역대 후보생들 중 단연 최고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진급시험 자체를 치르지 않을 순 없네. 시험이라는 것은 경쟁을 뜻하지. 곧 누군가는 떨어져야 한다는 말이야.”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진급시험은 비무대회에서의 역량을 집중케 하여 대신하고, 경쟁은 후보생들 사이에서가 아니라 섬서무관과 산동무관과의 경쟁으로 대신 치르게 하는 겁니다.”
검술 교관으로 있으면서 이토록 열과 성을 다해 토로해 본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담진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했다.
“늘 경쟁이라는 말로 아이들의 관계를 갈기갈기 찢어 놨지 않습니까. 지금처럼 아이들의 사이가 돈독해진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담진은 가장 가까이서 후보생들의 훈육을 맡고 있는 검술 교관의 자리에 있다. 그래서 이들이 얼마나 사이가 좋은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더욱이 기회가 생겼으니 내부적으로 경쟁을 시킬 것이 아니라 외부로 시선을 돌려 아이들을 더욱 단합시키는 겁니다. 그리하면 생도가 되어서도 그리고 차후에 무관 밖에서의 생활에서도 서로의 등 뒤를 맡길 수 있는 사이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배단아는 몇 마디를 더 하려다가 꾹 참았다.
담진의 말 속에 담긴, 진정으로 8기 후보생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드러난 목소리로 말하는 그의 말을 부정할 순 없었으니까.
자신 역시 8기 후보생들을 끔찍이 생각하니까.
악교운은 담진과 배단아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지. 비무대회에 집중하도록.”
그 말에 담진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반면 악교운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하지만, 오히려 그게 애들을 더 괴롭게 하는 것이 될지도.”
“예?”
담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악교운은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아, 아닐세.”
그저 그가 행동할 수 있는 것이라곤 눈을 질끈 감는 것뿐.
천무린이 빙긋 웃으며 날뛰는 모습이 잠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주 잠깐.
……끔찍했다.
다시 생각해 봐야 하나.